2020년 12월 5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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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13: 프란치스코, 가난 아닌 내외적 소유 포기하는 삶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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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20 ㅣ No.1488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13) 프란치스코, 가난 아닌 내외적 소유 포기하는 삶 강조

 

 

-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이라는 말 대신 ‘소유 없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성인이 말씀하신 ‘소유 없음’과 ‘물질적 가난’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이’라고 하지 않고 ‘소유 없이’라고 말한 것은 인간 관계성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림은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있는 프레스코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난(소유 없음)을 서약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존재의 원천이신 하느님마저도 사랑이시기에 홀로 존재하실 수 없어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에게는 그런 관계성의 하느님이 필요하고 또한 우리 서로가 필요하다. 나중에 다시 더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우리 인간뿐 아니라 창조된 모든 존재는 그렇게 ‘존재의 위대한 사슬’이라는 사랑의 유기적 관계성 속에 살아가도록 창조되었기에, 이것을 순리로 받아들이려는 겸손과 작음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길이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 작가이자 그의 추종자였던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겸손과 작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6. 소유 없음의 영성 - 프란치스칸 가난Ⅱ

 

프란치스코는 ‘가난’(paupertas-poverty)이라는 명사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 대신 ‘소유 없이’(sine-proprio)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프란치스칸들의 서원문에도 가난이라는 말 대신 ‘소유 없이’라는 말이 나온다. 달리 얘기하자면 프란치스코가 이해했던 가난, 즉 프란치스칸 가난은 물질적 가난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인 무엇, 즉 내외적 소유를 포기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생애 말년에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부터 계시받은 삶(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고 따르는 삶-복음적 삶)을 형제들에게 설명해 주고자 쓴 권고 말씀(28개)은 대개 ‘가난의 찬가’ 혹은 ‘소유 없음의 찬가’라고 불린다. 그런데도 이 권고 말씀 어디에도 물질적 가난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소유 없음’과 ‘물질적 가난’은 어찌 보면 비슷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프란치스코가 ‘아무것도 없이’라고 하지 않고 ‘소유 없이’라고 말한 것은 관계성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의 프란치스칸 일라이 델리오(Ilia Delio, OSF)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갖고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인간 인격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고, 가난이라는 것을 인간 관계성의 상황 속에서 보았다.”

 

델리오 수녀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프란치스코가 ‘소유 없이’ 살아가는 것에는 세 가지 분야를 내포한다고 한다. (1) 우리의 내적 자신과의 관계성과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가 소유하는 것 (2) 우리의 다른 이들과의 관계성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것 (3) 우리의 하느님과의 관계성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것.

 

사실 소유의 문제는 단순히 우리의 필요성에만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존재나 하느님의 존재를 대신하는 문제로까지 넘어서는 개념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할 때 그것을 ‘나’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에고(ego), 즉 가짜 자아는 우리에게 내가 소유하는 것을 ‘나’로 착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소유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재능이나 지위, 자신과 타인에 대한 통제력 등과도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참 자아’는 힘을 잃게 되고 ‘참 자아’를 창조해 주시고 그 참 자아와 일치하여 계신 하느님마저도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가짜 자아인 에고가 하는 일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자아를 가짜 자아로 대신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소유’의 문제이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고 만다.

 

에리히 포름의 「소유냐 삶이냐」의 중심 주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포름은 자신의 저서들, 특히 「소유냐 삶이냐」에서 산업주의와 현대화가 만들어낸 ‘자기-중심적 소유욕’은 인간을 진정한 삶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주장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소유욕을 향한 환상과 착각으로 인해 야기된 참된 삶(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관계성이신 하느님의 생명력)의 균형이 깨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이 소유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꺼지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잠재된 소유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이 불행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정상인 것처럼 매도하는 소비주의 산업사회와 돈이 가장 큰 행복을 전해준다는 자본주의라는 사이비종교에 의해 우리 인간이 집단 최면 상태에 걸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가 ‘가난’이라는 단어 대신 ‘소유 없이’라는 특별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8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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