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1일 (토)
(녹)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11: 프란치스코, 가난과 겸손으로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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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29 ㅣ No.1478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11) 프란치스코, 가난과 겸손으로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

 

 

조토,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망토를 주는 프란치스코’, 1297~1299년, 프레스코, 270x230㎝,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5. 육화의 영성과 하느님의 겸손 - 프란치스코의 ‘작음’의 영성 1

 

가난하신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으로서, 그리스도라는 원천적 성사 안에 숨어계시는 분이시고, 또한 심지어는 우리가 먹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인 빵(밥)의 형상 안에까지 숨어계시는 분이시다. 이분은 이렇게 세상의 웅장한 논리나 큰 소리로서가 아니라 침묵과 겸손 가운데 잔잔하게 현존하시면서 그 사랑으로 강력한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세상의 논리나 큰 목소리로서가 아니라 침묵과 논리를 넘어서는 사랑의 신비를 관상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만이 이런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프란치스코가 선택한 가난과 작음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관상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보나벤투라는 주님의 가난과 겸손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신심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그는 전심으로 우리 주님의 몸인 성체에 대한 사랑으로 불탔으며 자신을 그와 같이 낮추시는 사랑, 그와 같은 사랑에 찬 낮춤을 생각할 때면 경이에 차서 넋을 잃었다. 그는 자주 그리고 너무도 경건히 성체를 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열중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대전기」 9장 2항)

 

하느님의 이런 가난하고 겸손한 사랑을 잘 드러내 준 프란치스칸 신비주의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자코포네 다 토디(Jacopone Da Todi, OFM 1230~1306)이다. 그가 지은 시 중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계속해서 구애를 하시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는 시가 있다. 그 시의 시작 부분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애를 하는데, 인간은 이 구애에 반응을 하긴 하지만 결국은 계속 다른 사랑을 찾아 하느님을 피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시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인해 계속 쫓아오시고 인간은 자기의 기만적 사랑을 찾아 진정한 사랑에서 계속 멀어지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 시의 맨 마지막에 아주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하느님의 구애 말씀이 나온다. “정 그렇다면, 네가 나의 하느님이 되어다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엄청난 겸손이요 자기 낮춤인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구걸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그것도 다른 것을 구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 사랑으로 만드신 우리에게서 ‘사랑’을 구걸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그 사랑을 받아들여 사랑을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우신 본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자유롭게 그 사랑에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우리에게 구걸하시는 분이시다.

 

 

5. 육화의 영성과 하느님의 겸손 - 프란치스코의 ‘작음’의 영성 2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가난해야 하는 이유,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고, 온전히 사랑이신 분과 일치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가난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필연적인 하느님의 속성인 것이다. 중세의 우리 프란치스칸 학자들, 특히 요한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학자들은 육화, 즉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를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크시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어 우리 인간과 일치하심으로써 우리 인간을 완성으로 이끌어가시기로 영원성으로부터 계획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의 죄라는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이라는 필연에 의한 것이고, 이 하느님의 인간 되심의 주도권이 인간이나 악에 있지 않고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의지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이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 삶 한가운데로 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분이 당신을 너무나 낮추시어 내려오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하찮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세의 프란치스칸 학자들 이전에도 리옹의 이레네오(140~202)나 고백자 막시무스(580~662)와 같은 초기 교회 학자들도 육화를 그저 인간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해주거나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한 하느님의 행위로보다는 인간과 우주를 완성점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삼위일체 하느님 내부의 근본적인 계획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였다.

 

자신의 스승이 둔스 스코투스 전문가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가 말하는 ‘오메가 포인트’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물리적인 진화를 해 가는데,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도 진화하여 그리스도로 완성된다는 것이 바로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이런 사상은 둔스 스코투스나 보나벤투라 같은 신학자들과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실제로 보나벤투라는 모든 피조물이 인간을 중심으로 서로 어우러져서 하느님께 수렴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 진화와 수렴 역시도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영원성으로부터 창조된 우주의 역사 안에서 주도해 가시는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9월 27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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