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7일 (토)
(백)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머스 머튼의 영성20: 토마스 머튼의 기도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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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1-19 ㅣ No.1339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머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20) 토마스 머튼의 기도 정의


기도, 하느님의 신비 속에 들어가 그분을 발견하는 것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나무의 뿌리와 같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 나무는 모진 비바람에 이내 쓰러져 버리듯이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이내 쓰러져 버리고 만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끌어 주며, 그분과 온전히 하나 되어 그분 안에 뿌리내리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땅속에서 영양분을 흡수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 양식을 얻지 못하면 ‘예수님의 사랑 나눔’이라는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교회 안에서 많은 활동가가 오랜 세월 사람과 세상을 위해 선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내적 공허감으로 쓰러져 버리는 경우를 참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일을 시작하지만,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 속에 머물지 않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나 ‘자신의 능력’을 나누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 안에서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잘한다”는 칭찬의 소리를 갈망하게 되어 ‘자기 뜻’을 고집하는 영적 교만의 유혹에 떨어지고 만다. 이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영혼이 메말라 버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만 찾게 되기 때문이다. 콩나물시루에 매일 부어 주는 물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콩나물을 자라게 하듯, 매일 바치는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자라게 하여 자신을 비워내고 그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채우도록 돕는다.

 

토마스 머튼은 누구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매일 새벽 세시에 일어나 밤 기도와 묵상, 미사,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바치고 삼시경(오전 9시), 육시경(정오), 구시경(오후 3시), 저녁 기도와 끝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노동은 단순히 이익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기도의 연장이었으며, 그의 독서와 글쓰기 역시 하느님을 더 알고 사랑하기 위한 기도의 도구들이었다. 요컨대 그의 매일의 삶이 기도였으며, 기도를 살았다. 매일 기도의 삶은 그의 영혼이 관상을 통해 깨어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했으며, 영혼을 정화하고 비워내도록 도왔다. 하느님을 찾는 삶에서 그의 기도는 삶 일부가 아니라 전부였다.

 

그렇다면 머튼은 기도를 어떻게 정의했으며, 실제로 개인 기도는 어떻게 바쳤을까? 우리가 흔히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 혹은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머튼은 기도를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를 내렸다. ①하느님께 정신과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 ②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 그분을 발견하는 것.

 

머튼에게 있어 기도는 무엇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으로 보았다. 자신을 들어 높여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자신을 봉헌하는 시간이 바로 기도였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자신의 바람이나 기도문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 때 분심이 들거나 습관적인 기도문 암송을 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기도에 대해 회의를 느끼곤 한다. 때로는 기도 중에 느끼는 뜨거운 감정으로 기도가 잘되고 너무 좋았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머튼에게 있어 기도는 ‘하느님 중심적’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이 좋고 나쁨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높여 자신과 자신의 시간을 봉헌하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두 번째, 머튼은 기도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 그분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머튼에게 있어 하느님의 신비는 저 멀리 있는 우리와 다른 초월적이고 근접할 수 없는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신비를 머튼은 자신의 자아 안에서 발견하였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 안에 하느님의 신비로운 영역,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아인 참 자아(the true-self)가 ‘이미’ 있으며,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고 보았다.

 

머튼은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이미 발견한 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우리와 가까이 계신 분,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시는 분 안에서 편히 휴식하는 길입니다.” (「수도승적 사조」, p.32) 라고 말하였다. 이는 사막의 교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가 기도는 “개념이 아니라 안식”이라는 정의와 요한 클리마쿠스가 “기도의 가장 근본적인 자리는 고요함”이라고 표현한 것과 쥴리안 성녀가 기도는 “어머니와 같은 하느님 품에 안기는 것”이라고 묘사한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머튼은 왜 기도를 “안식이자 휴식”이라고 표현했을까? 다음 호에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1월 17일,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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