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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심리학이 만난 영화: 접촉 가설, 그린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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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6-17 ㅣ No.934

[심리학이 만난 영화] 접촉 가설, 그린 북

 

 

“내 딸이 석탄 자루들하고 있을 때 자빠져 자고 있지 말라고. 알아들었어?” 장인이 사위를 나무란다.

 

“업체에서 가지들을 보낼 줄 제가 알았겠어요?” 사위도 눈앞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석탄 자루와 가지

 

클럽에서 새벽까지 일하고 동이 틀 무렵에야 집에 들어온 토니. 술에 취해 주먹을 휘두른 손님을 제압하느라 힘을 좀 썼더니 피곤함이 몰려온다. 곤하게 잠들었던 토니는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에서 깬다.

 

거실로 나가 보니 다섯 명의 남자가 소파에 앉아서 고함을 지른다. 장인과 친척들은 야구 경기 중계방송을 보고 있다. ‘도대체 왜 이 시간에 다들 자기 집에 있지 않고, 여기 모여서 소리를 지르는 거지?’

 

이유를 물어보니 토니의 아내 돌로레스 곁에 있어 주려고 왔단다. 험악하고 거친 일들이 벌어지는 1962년, 뉴욕 브링스의 코파카파나 클럽에서도 힘과 주먹이 필요할 때 부르는 사람이 바로 토니다. 그런데 토니가 있는 집에 토니의 아내를 지키겠다고 남자 친척 다섯 명이 모인 것이다.

 

주방 바닥에 곰팡이가 나서 업체에 교체 작업을 요청했는데, 인부 두 명이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장인이 말한 ‘석탄 자루들’과 토니가 말한 ‘가지들’은, 바로 이 두 명의 흑인을 가리킨 것이다. 장인과 친척들이 모인 이유는 토니가 자는 동안 돌로레스가 흑인 남자 두 명과 함께 있는 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업이 마무리 되자, 돌로레스는 두 명의 인부에게 음료수를 한 잔씩 건넨다. 흑인 인부들은 감사하다며, 음료수를 마시고 조용히 떠난다. 그들의 입술이 닿았던 유리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토니는 마치 병균이 묻은 봉지를 집어 올리듯 유리컵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서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화를 당하지 않고 휴가를 즐기는 안내서

 

1962년, 인종 분리라는 이름으로 인종차별이 이루어지던 시절, 차별은 법과 관습, 그리고 관례라는 이름으로 잔인하게 실행되고 있었다.

 

흑인은 여행 중에 돈이 있다고 아무 데서나 잘 수도 없었다. 흑인들만 머물 수 있는 지정된 업소에서만 숙박이 가능했다. ‘그린 북’(Green Book)은 바로 흑인들이 잘 수 있는 숙박업소가 어디에 있는지 안내한 책자다.

 

‘화를 당하지 않고 휴가를 즐기려는 흑인 운전자를 위한 안내서.’ 실제 1960년대 그린 북의 표지에는 왜 흑인들이 그린 북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지 이렇게 쓰여 있었다.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피터 패럴리 감독의 그린 북은 인종 차별을 정상이라 여기던 시절, 백인 남자와 흑인 남자가 두 달 동안 인종 차별이 가장 심한 미국의 남부를 여행한 기록을 담은 로드 무비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은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이탈라아계 백인 남자 토니 발레롱가와 천재적인 흑인 피아니스트 돈(도날드) 셜리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 중 한 명은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다. 닉은 이 영화로 두 명의 작가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셜리 역을 맡은 배우 마허샬라 알리는 같은 날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접촉 가설

 

그린 북은 서로 잘 맞지 않는 남자 둘이 티격태격하면서 길을 떠나고, 여행을 마친 뒤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결국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한다는 로드 무비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영화다. 이 영화는 고정 관념과 편견을 해소하려면 직접 만나서 부대끼고, 상호 작용해야 한다는 우리의 믿음을 확인시켜 준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접촉 가설’(contact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접촉이 갈등을 줄인다는 것이다.

 

상대를 자주 만나 보지 않아서 서로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그 결과 고정 관념과 편견이 발생하는 것이니, 이를 극복하려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상호 작용의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접촉 가설은 직관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실제 연구들에 따르면, 고정관념과 편견을 이미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하면 오해와 편견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토니와 백인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돈이 자주 만나면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서로를 더 미워하고 싸울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위해 시작한 만남이 증오와 전쟁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린 북에서는 어떻게 접촉의 빈도가 증가하면서 토니와 돈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만남이 전쟁의 시작이 되지 않으려면

 

접촉이 우리가 기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유발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함을 심리학 연구들은 보여 준다. 먼저, 접촉하는 두 사람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토니와 돈은 모두 계획된 공연을 마치는 것이 목표였다. 모든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공연 기획사가 약속한 돈을 마저 받을 수 있었다.

 

둘은 같은 목표가 있었다. 만일 둘의 목표가 다르고, 심지어, 경쟁하는 상황이라면, 고정 관념과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만남은 쉽게 전쟁으로 변한다.

 

둘째, 공동의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이 상호 보완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 서로의 호감과 존경심은 쉽게 자란다. 토니는 완력과 현장 지능으로 셜리를 보호해 주는 구실을 한다. 반면, 셜리는 토니가 아내에게 쓰는 초등학생 수준의 편지를 아름다움과 감동의 시로 탈바꿈해 주는 선생님 역할을 한다.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하지만 상대가 목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상대에게 가진 고정 관념과 편견은 변하지 않거나 강화된다.

 

셋째, 상호 작용은 서로 동등한 지위에서 이루어져야만 성공적이다. 둘 중한 사람이 더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가진 상황에서의 상호 작용은 갈등을 일으키기 쉽다. 갈등은 다시 기존의 고정 관념과 편견을 강화한다. 토니가 운전기사 면접을 보러 카네기 홀에 있던 돈의 거처를 찾아갔을 때, 돈은 토니에게 여행 중 자신의 옷을 다리고, 구두를 닦으며, 시중드는 일도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토니는 단호하게 그런 하인 같은 일을 절대 못한다고 못 박는다. 토니는 돈에게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킨다. 그래서 토니는 공연장으로 돈을 데려다 주고 그를 보호하는 보디가드의 임무를 한다. 둘의 만남은 그제야 동등하게 시작될 수 있었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만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만남을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전쟁이 아닌 평화로 만들려 한다면 만남이 사랑과 평화로 자랄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만남을 증오와 전쟁으로 만드는 악마는 우리가 신경 쓰지 못하고 지나쳤던 곳, 곧 ‘디테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전우영 -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무료 온라인 공개 강좌 서비스인 케이무크(K-MOOC)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디자인한 ‘심리학 START’를 강의하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 프라이밍」, 「내 마음도 몰라주는 당신, 이유는 내 행동에 있다」 등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9년 6월호, 전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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