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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순교자의 영적 고향, 말레이반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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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6-15 ㅣ No.527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 공동기획 · 아시아 교회 복음화 길을 따라서] 아시아 순교자의 영적 고향, 말레이반도 -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1)


아시아 교회 성장의 숨은 토대,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

 

 

페낭에 있는 가톨릭 묘지. 신자와 선교사, 신학생들의 무덤이 뒤섞여 있어 페낭교구는 무덤을 발굴해 이를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페낭에서 발견된 유해

 

태국 방콕 한인성당을 방문했을 때 한 신자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난해에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우리나라 신학생 10여 명의 유해가 발굴됐다는데 들어보셨나요?” 

 

함께 성당을 방문했던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옥승만 신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우리나라 신학생들의 발자취를 드디어 찾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지난해 페낭에서 발견된 신학생 유해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과 미얀마인이었다. 동아시아 출신 신학생 유해라는 말이 와전된 것이었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는 서로 교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해프닝이었다.

 

 

순교자의 산실, 페낭 신학교

 

유해를 발굴하면 국적 확인을 해야 할 정도로 페낭 지역에는 많은 외국인 유학생들이 있었다. 페낭 신학교 때문이다. 페낭 신학교는 박해로 신학교를 세울 수 없었던 아시아 지역에서 사제 양성소 역할을 한 ‘아시아 신학교’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지에서 사제 양성을 위해 페낭에 신학생을 파견했다.

 

다만, 명성과 달리 신학교의 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ㄱ’자 형태의 2층짜리 건물 한 동이 신학교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잔디밭 한쪽에 세워진 페낭 신학교 출신 성인과 복자의 이름을 기록한 비석은 과거 이곳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103위 순교 성인인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는 물론 태국의 복자 니콜라스 킷밤룽 신부까지 친숙한 이름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신학교 건물 뒤편에는 옛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으로 오르기 위해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절로 숨이 거칠어진다. 40℃를 오르내리는 기온과 끈적끈적할 정도로 습한 날씨에 시달리며 공부했을 신학생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실제로 이곳 신학생들은 혹독한 날씨와 기생충, 풍토병 등에 시달리며 목숨을 잃기도 했다.

 

페낭 신학교는 1665년 파리외방전교회가 태국 아유타야에 신학교를 설립하며 출발한다. 이후 신학교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인도 등지로 옮겨다녔고 1808년 페낭에 자리 잡는다. 당시 학생은 20명 정도였으나 이후 각 나라 신학생들이 줄지어 입학하기 시작하면서 1855년에는 128명까지 학생이 늘어난다. 이후 각 나라에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페낭 신학교를 찾아오는 유학생 수는 크게 줄었다. 현재는 말레이반도 내에 위치한 3개 교구의 신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도 1855년을 시작으로 1858년과 1882년, 1883년, 1884년에 여러 차례 신학생을 파견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 12명이 사제품을 받았다. 페낭과 한국은 선교사들도 많은 연관이 있다.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는 물론 조선 초대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도 조선으로 오기 위해 페낭을 거치기도 했다.

 

페낭교구장 세바스티앙 프란시스 주교는 “한국 교회는 물론 아시아 교회의 성장 바탕에는 페낭 신학교가 있었다”며 “현재 교구에서는 신학교의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신학생들의 무덤을 발굴해 각 나라 교회에 알리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페낭 신학교는 과거 ‘아시아의 신학교’ 역할을 하며 수많은 사제를 양성했고 아시아 복음화의 산실 역할을 했다. 사진은 페낭 신학교 전경.

 

 

말레이반도와 가톨릭교회

 

페낭이 위치한 말레이시아 말라카 지역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복음이 전파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달리 이 지역 교세는 다소 약한 편이다. 2016년 말 현재 말레이시아 가톨릭 신자는 약 119만 명이다. 이 가운데 30만여 명이 말레이반도 지역 신자다. 말레이시아 교회는 3개 대교구를 포함해 9개의 교구와 190여 개 본당, 신부 280여 명의 교세를 보이고 있다. 말레이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단일 대교구로 이뤄져 있고 28곳의 본당과 145명의 신부, 15만 명의 신자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두 나라 교회는 현재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있다. 특히 말레이시아 교회는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한 정부로부터 여러 차별을 받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선교다. 법에 따라 주류인 말레이족에게는 선교가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 내 신자들의 절반은 ‘부미푸트라’라고 불리는 중국ㆍ인도계와 소수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특별한 박해는 없지만, 종교에 대한 청년층의 무관심 속에 신자 수 증가세가 조금씩 꺾이고 있다. 또 기존 신자의 노령화까지 겹치며 신자 감소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말레이반도의 복음화 역사는 1511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말라카 지역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조선 중종 6년 때로 한반도에는 아직 천주교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시기이다. 당시 말라카 지역은 신자 수가 2만여 명에 이르는 등 빠른 교세 확장을 보여준다. 

 

그러나 말레이반도 복음화 과정에는 장애물이 많았다. 말레이반도의 정글 기후와 복잡한 언어 등은 복음화를 방해하는 요인이었다. 특히 이 지역을 사이에 둔 제국주의 세력들의 전쟁은 말레이반도의 복음화를 거의 중단시키기에 이른다. 이후 말레이반도 복음화는 중국ㆍ일본계 신자들이 이주를 시작한 19세기까지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고 그마저도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교세가 크게 위축된다. 그리고 1955년에 이르러서야 쿠알라룸푸르 대교구와 페낭 교구에서 첫 본토인 주교를 배출하게 된다. 이어 1972년 말라카-싱가포르대교구로부터 싱가포르대교구가 분리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6월 16일, 장현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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