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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17: 밥과 전장의 사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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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24 ㅣ No.403

[추기경 정진석] (17) 밥과 전장의 사내들


거칠디 거친 사내들도 진석 앞에선 고분고분

 

 

- 6ㆍ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부산의 천막촌.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학생 선발

 

국민방위군에서 훈련을 받던 어느 날 책임자인 소령이 기간 사병이 필요하다며 중학교 이상의 학력자를 찾았다.

 

“중학교 이상 다닌 사람은 손들어 봐!” 

 

장정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기가 무섭게 소령이 외쳤다. 진석이 몇 명의 장정과 함께 쭈뼛쭈뼛 손을 들고 나갔다. 

 

“너희는 이제 여기 있는 장병들을 대상으로 학력, 나이, 지방별로 구분하고 통계를 내도록!” 

 

갑자기 떨어진 명령에 진석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장정들 앞에 서서 평소처럼 거수로 사람 수를 세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숫자도 헷갈릴 것이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진석은 아예 사람들을 이동시켜서 구분하고 셈을 했다. 일사불란하게 인원이 파악되자 생각보다 빨리 끝을 맺었다. 차근차근 일 처리하는 진석의 모습은 지휘관 눈에도 띄었다.

 

“자네는 어느 학교에 다니다 입대했나?” 

 

“서울대 공대를 다니다 들어왔습니다.“ 

 

“그래? 그럼 곧 방위군 사관학교 학생을 선발하는데 지원해 봐. 그리고 기준을 알려줄 테니 후보생이 될 만한 사람들을 네가 한번 뽑아봐!” 

 

국민방위군 사관학교가 막 설정되던 무렵이었다. 1951년 3월 1일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3기가 개교하는데 사관생도로 훈련받을 숫자는 대략 2000명 정도였다. 진석은 국민방위군을 이끌 사관생도를 선발하는 업무를 맡았다. 안타깝게도 피란길 함께 김밥을 나눠 먹던 동네 친구는 학력 미달로 후보생에는 뽑히지 못했다. 진석과 동네 친구는 이별해야 했다. 

 

“진석아, 몸 건강하게 잘 지내고 나중에 또 보자!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고맙긴 뭘! 친구야, 너도 몸 건강하게 지내. 다음에 꼭 만나자.” 

 

진석은 마치 전쟁통에 친구를 버리고 가는 것만 같아 그 아이에게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끔뻑끔뻑 자신을 쳐다보던 친구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무엇보다 친구가 앞으로 돈이 없어 김밥을 사 먹지 못할 것이 걱정이었다. 

 

“저 친구가 앞으로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겁이 덜컥 났지만 친구가 국군에 배속됐을 것이라 위안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슬픈 마음을 뒤로하고 진석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선발한 사관생도 후보생들과 함께 부산의 범어사로 출발했다. 

 

진석은 1951년 3월 3일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해 후보생들과 한 달 반 정도 훈련과 교육을 받고 4월 15일 졸업했다. 당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인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3기에서 진석은 높은 성적으로 과정을 마쳤다. 어디서나 정직하고 성실히 임하는 성격 덕분이었다. 

 

진석은 같은 달 23일 국민방위군 제3단 6지대 직속 제1구대 제2 초대장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방위사령부 지휘관들이 부식비를 횡령해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방위군이 해산됐다. 국민방위군 장교들에게는 예비 사관 임명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휘관들은 진석에게 국민방위군에 계속 남기를 권했다. 만약 그랬다면 국군에 배속됐을 것이고 진석의 인생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영어 이력서를 순식간에

 

- 미군 통역관 시험에 응시한 진석은 처음엔 빠르게 말하는 미군들의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진석이 영문 소개서를 순식간에 써내려가자 미군들은 ‘오케이’를 외치며 그를 채용했다. 삽화=문채현.

 

 

진석은 국민방위군에 남지 않고 대구에 있던 미 8군 제 60병기단에서 통역관을 뽑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을 찾아갔다. 미군들은 진석을 앞에 세우고 몇 가지를 물어봤다. 진석은 난생처음 빠르게 들려오는 영어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시험관인 미군이 진석에게 영어로 이력서를 쓰게 했다. 학교 수업으로 영어를 익힌 진석은 영어로 말하기보다 영작문이 편했다. 

 

‘나는 서울대학생이고 국민방위군 소위입니다.’

 

순식간에 영문 소개서를 써내려가는 진석을 보고 미군은 이내 “OK!” 하고 외쳤다. 그렇게 진석은 통역관으로 채용됐다.

 

진석은 6월 2일 춘천으로 이동했다가 강원도 화천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 자동차 정비를 하는 한국인 노동자 100명의 관리를 맡았다. 이들은 미군의 탱크, 자동차, 트럭 등 모든 운송 수단을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거칠고 자유분방한 청년 100여 명을 통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진석의 부임 첫날 첫 임무는 장정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는 미군 보급창에서 준비했다. 그런데 긴장한 나머지 ‘밥솥’이란 영어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됐지만 자신만 기다릴 장정 100명의 밥을 지어 먹이려면 무슨 수든 써야 했다. 손발을 움직여 가며 뜻을 전한 끝에 밥솥을 구해냈다. 입대 전 칩거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어떤 이가 미군에게 북한군으로 오해받자 그를 변호해 준 이후로 처음으로 한 영어 회화였다. 

 

지뢰로 둘러싸인 군부대 철조망 안에서 일하는 전시의 사내들은 거칠었다. 그들은 노름으로 여가를 보냈고 사람 죽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점차 진석의 말에 고분고분해졌다. 진석은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들에게 욕을 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석은 언제나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 받은 가르침을 되새겼다. ‘바른말을 쓰라’는 어머니 말씀에 따라 욕설을 할 줄 몰랐던 진석은 전장의 사내들에게 ‘존중’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진석으로서는 어머니께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었다. 전장에서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낙담할 새가 없었다. 진석은 부산 어딘가에 계실 어머니와 만나기 전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머니를 찾아서 

 

1952년 초, 첫 휴가를 얻자마자 그가 향한 곳은 부산이었다. 연고도 없이 이모님과 피란을 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빨리 만나 자신의 무사함도 알려야 할 터였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수소문했지만 어머니를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무작정 내려가 어머니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를 찾다가 황해도 출신인 이병만 마티아라는 친구를 만났다. 진석과 동갑이었고 혜화동본당 신자였는데 서울대 치대를 다니던 청년이었다. 우연히 그에게 어떤 신부님이 전쟁 고아들을 돌보고 있는데 통역할 사람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진석은 황해도 연백본당 주임이었던 김영식(베드로) 신부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평화신문, 2016년 9월 25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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