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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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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18 ㅣ No.390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의미 있다.’ 또는 ‘의미 없다.’는 말, 어떤 경우에 사용하시나요? 의미는 언제 생기고, 언제 사라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 경우를 잘 들여다보면 아마 쉽게 짐작이 되실 겁니다.

 

 

의미는 언제 생기고, 언제 사라질까요?

 

예컨대 내가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의 쓸모 또는 맥락이 없어졌다고 느껴질 때,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지요? 역으로 무심코 한 말이나 행위의 쓸모 또는 맥락이 나중에 확인된다면, 그 말이나 행위의 의미가 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맥락을 넓혀 보면 어떤 말과 행위가 ‘관계성’ 안에서 이해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의 의미를 인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의미 없다.’는 말은 관계성이 없다거나 관계성이 파악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문화의 핵심=의미, 의미의 핵심=관계

 

이전 글에서 저는 문화를 ‘의미를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사유와 행위 양식의 총체’라고 규정했는데, 그렇다면 무언가를 ‘관계망’ 안에 놓을 수 있는지가 문화적 의미를 구성해 낼 수 있는지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곧 문화 개념의 핵심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의미 개념의 핵심에는 ‘관계’ 또는 ‘맥락’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관계가 있으면 의미가 있고, 관계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겠지요.

 

 

죽음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면

 

그런데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의미가 훼손되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죽음이 터부시되고 있다는 말이 대표적이지요. 지금까지 해 온 말에 비추어 보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죽음을 어떤 관계성 안에서 이해하는, 하나의 문화적 의미로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그녀를 만나기 100미터 전’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이야기와 딱 들어맞는 제목이라 옛 노래를 소환해 봅니다. 노래의 주인공에게 그녀를 만나기 100미터 전은 아주 큰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요. 그런데 만일 그녀가 그 자리에 없다면 어떨까요? 100미터 전의 의미는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 의미는 그녀 때문에 존재한 것이니까요.

 

 

‘초월성’ 개념의 상실

 

우리 사회가 죽음의 의미 구성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초월성’ 개념 상실과의 연관성 없이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사회의 세속화, 과학화가 진행되면서 죽음을 그 너머와의 관계성 안에서가 아닌 삶의 끝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흔히 듣는 말, ‘죽으면 다 끝이지 뭐’라는 말이 그런 생각을 잘 보여 주지요.

 

그런데 죽음을 삶의 완전한 끝이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여하한 관계성 안에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그렇습니다! 완전한 끝은 끝인데, 그 이후는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이끄는 사건을 무슨 관계망이나 의미망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완전한 끝’으로서의 죽음

 

경험적으로 확증할 수 없으니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이같은 논리에는 종교성과는 무관하게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죽음을 삶과의 관계성 안에 놓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런 사고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나름 오래된 뿌리가 있는 생각이지요. 다만 예전의 사고는 죽음 뒤 나는 없으니 아무것도 알 수 없고,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불가지론에 좀 더 가까웠다면, 우리 시대에는 완전하고 완벽한 끝으로서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완전한 끝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논리적인 말장난을 좀 해 보지요. 경험적으로 확증할 수 없으니 ‘끝’이라는 생각 또한 하나의 ‘믿음’ 아닌지요? 죽음이 끝이라는 것은 아직은 검증된 사실이 아닙니다.

 

특정한 종교적 믿음과의 관련성 이전에 저는 이러한 사유에 대해 적잖은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어떤 관계성 안에도 놓이지 못하게 될 때 우리 삶에 생길 수밖에 없는 심각한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무의미하다면 죽음의 길 또한 무의미하다

 

죽음이 무의미해져 가면, 그 죽음으로 향해 가는 길 또한 무의미해져 갑니다. 논리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니까요. 그 논리의 도미노를 타고 가면, 고통 예찬을 하자는 것은 아니나, 많은 경우의 임종 기간에 동반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막힙니다. 그 논리의 도미노를 계속 타고 가면 삶 자체의 의미가 흐릿해집니다.

 

그나마 비교적 젊고 건강할 때는 이 문제가 수면 아래 있을 수도 있겠으나, 늙고 병듦의 시기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되면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의미가 부재한 상태에서 삶의 의미는 충만할 수 있나?

 

죽음이 삶과의 충분한 관계성을 갖지 못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난제(難題), 그것은 결국 삶 자체에, 특히 늙고 병듦에 대해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누구도 그 과정을 피해 갈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죽음에 다시 어떠한 관계망을 부여할 수 있는가는, 우리가 삶의 중요한 과정으로서 늙음과 병듦을 어떻게 충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결코 분리된 문제일 수 없습니다.

 

 

죽음의 의미를 묻는 현대인들에게 종교의 대답은?

 

역사적으로 죽음의 문제에 대해 ‘답’을 해 온 주체는 대부분 ‘종교’였습니다. ‘초월성’ 문제에 대한 영역권 주장이 가능하다면 제1 순위는 종교일 겁니다. 꼭 제도로서의 종교 내에서만이 아니더라도 죽음을 초월성과의 관계성 안에 위치하게 할 수 있는지는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이해 문제에서도 핵심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오늘의 종교는 우리 시대 죽음 문제에 어떤 대답을 내놓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2월호, 천선영 율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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