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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헌종(교구 설립기): 아들의 소명을 슬퍼하지 않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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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5-20 ㅣ No.1189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헌종(교구 설립기)] 아들의 소명을 슬퍼하지 않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

 

 

성사(聖事)를 갈구하는 신자들

 

한국 교회의 교구는 편지를 통해서 세워졌다고 말할 정도로 ‘서간’(청원서)이 큰 역할을 했다. 신유박해 이후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에 필사적이었다. 1811년부터 꾸준히 밀사를 파견했고 밀사들은 온전히 자기 몸을 바쳤다. 30년 넘게 성사 없이 살며 병자성사도 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이들의 열망은 절실했다.

 

목자를 얻으려는 조선 신자들의 청원서를 받은 북경교구는 당시 자족하기도 힘든 형편이었고, 교황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교황께 도달한 편지들이 선교 잡지에 실렸다. 어떤 이는 조선 신자들의 이 청원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큼 감동했다. 그는 조선인을 본 적도 없고, 조선인의 언어조차 짐작도 못하지만 번역된 편지에서 조선인들의 마음을 잃었다. 그리고 그 또한 교황청과 자신의 선교회를 감동시킬 만한 편지로 답했다.

 

교황청은 1831년 조선교구를 설립하고 그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Bruguiere, 1792-1835년, 蘇)이다. 동서양의 감동은 성직자 영입에서 끝나지 않고 교구를 설정하게 했다. 이후로는 조선인이 성직자를 찾아 나서지 않고, 성직자들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입국하려 애쓰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교회 국경까지만 왔다. 그가 준비해 온 길로 모방 신부(Maubant, 1803-1839년 羅伯多錄)가 입국했다.

 

조선 신자들은 이렇게 선교사들을 모셨지만, 때로는 선교사들의 입국 방도가 막막했다. 특히 세 선교사가 처형된 기해박해 이후에는 육로는 이미 노출되었다. 이때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이 김대건 신부(1821-1846년)이다. 김 신부는 선교사들이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이룬, 밖에서 자란 첫 열매였다. 그는 육지로 들어와서 바닷길을 열었다.

 

한편, 그의 모친은 우리 교회 박해 100년 동안 유일하게 신부의 어머니로 생존했던 여인이다. 그는 아들이 옥에 갇히고, 공개 처형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였다.

 

 

바닷길을 연 김대건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 무렵, 경기 · 충청 일대를 사목 방문했다. 그리고 은이공소에서 골배마실에 사는 김대건을 만났다. 그는 김제준과 고 우르술라(1798-1864년)의 맏아들이었다. 김대건은 7월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12월 동료 두 명과 유학길에 올랐다. 신학생들은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고 우르술라는 열다섯 살짜리 아들을 외국으로 떠나보냈는데, 이 아들은 건강한 편도 아니었다. 민란 때문에 아들이 마카오에서 필리핀 마닐라로 옮겨 다니는 등의 세세한 행적은 몰랐어도 이듬해 함께 떠난 최방제의 사망 소식은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이듬해 기해박해 때는 남편이 순교했다. 그것도 사위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사위도 친족을 밀고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고 우르술라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신자들의 집을 돌면서 구걸하며 살게 되었다.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 함대의 통역 겸 조선 교회와의 연락을 목적으로 메스트르 신부(Maistre, 1808-1857년, 李)와 김대건은 세실 함장의 배를 탔다. 그러나 함장이 조선 항해를 포기하자, 이때부터 김대건은 조선 입국로를 뚫는 사자가 되었다. 그는 1842년 말 변문에서 북경 사신 일행으로 오던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기해박해 소식을 들었다. 모친의 근황도 알게 되었다.

 

이후 김대건은 1843년 초부터 혼자 또는 메스트르 신부나 주교를 모시고 조선 국경까지 다섯 차례나 왔고, 두 번은 국경을 넘기도 했다. 그때는 신학생이었다. 그리고 부제가 된 뒤에 세 번째로 입국을 시도해서,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서 석 달간 주교를 모시러 갈 준비를 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고 우르술라는 아들이 3년간 국경을 헤매었고, 조선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들은 소식 없이 떠났다.

 

 

공개 처형당하는 아들 앞의 어머니

 

김대건은 4월 30일 배를 마련하여 페레올 주교(Ferreol, 1808-1853년, 高)를 모시러 상해로 떠났다. 그는 주교를 뵙고, 1845년 8월 17일 금가항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직후, 그들은 귀국 여정에 올라 10월 12일 강경 부근 황산포에 도착했다. 자리가 잡힌 뒤 김 신부는 서울 인근, 용인 지방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했다. 그는 은이공소에서 비로소 어머니를 만났다.

 

그러나 그도 잠깐, 김 신부는 주교의 새로운 지시를 받았다. 그는 1846년 4월 12일 어머니 곁에서 부활절을 지내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 김 신부는 5월 14일 선교사 영입로를 개척하러 일곱 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연평도 쪽으로 나가, 6울 5일 체포되어 6월 21일 서울로 압송되고, 40여 차례 심문을 받았다. 결국 김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군문효수형은 공개 처형이다. 새남터 형장 모래사장에 군중이 모여 섰고, 김 신부는 손을 등 뒤로 묶인 채 백사장 가운데로 끌려나왔다. 관장은 그가 외국인과 교섭한 죄를 지었다는 선고문을 읽었다. 신부는 자신이 외국인과 교섭한 것은 천주교를 위해서였으며,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음을 설파했다.

 

관례에 따라 신부의 상의를 반쯤 벗기고, 양쪽 귀에 화살을 꽂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회를 한 줌 뿌렸다. 그들은 신부의 무릎을 꿇리고 머리채를 꼽아 놓은 창자루에 매달아 머리를 쳐들게 했다. 신부는 그들이 칼질하기 편하게 자세를 취했다. 망나니 열두 명이 신부의 주위를 돌며 제각기 목을 내리쳤고, 여덟 번째 칼에 머리가 떨어졌다. 신부의 시신은 사형당한 바로 그 자리에 묻혔고, 포졸들이 이를 지켰다. 신부가 순교한 지 40일 만에야 교우들은 유해를 거둘 수 있었다. 이민식은 유해를 자신의 선산인 미리내에 안장했다.

 

김 신부는 옥에서 편지로, 아직 조선에 들어오지도 못한 친구 최양업 부제에게 모친을 부탁하고, 주교께 모친을 위로해 달라고 청했다. 고 우르술라는 1864년 아들의 묘 옆에 묻혔다.

 

자식이 고통당하느니 차라리 자기 목숨을 내놓기를 원하는 모정은 포청, 옥, 형장, 묘에 늘 동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정은 주께 바친 자식의 소명을 이해하며 존경과 조심스러움으로 절제하는 사랑이었다. 아들의 고통을 보는 것은 처절했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이가 그 뜻을 이루는 것을 확인하는 ‘환희’였고 평생 가는 위로였다. 시복시성 대상에 들지도 못한 수많은 ‘우르술라’가 ‘엄마의 정’을 억제하고 고통에 찬 환희로 박해 시기 교회사에 거름이 되었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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