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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문헌으로 되새기는 기해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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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2-14 ㅣ No.1069

문헌으로 되새기는 기해박해 (1)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과 기해척사윤음(己亥斥邪綸音)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미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사학죄인들은 칼과 톱과 차꼬를 낙원으로 달려가듯 여깁니다.’(『승정원일기』 헌종 5년, 1839년 3월 5일)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순조가 서거하고 그의 손자 여덟 살 난 어린 헌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자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839년 3월 5일(음)에 우의정 이지연이 천주교를 끝까지 조사해서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청하자 순원왕후가 이를 그대로 따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학인 천주교를 토벌하여 다스리라는 <사학토치령>이 1839년 4월에 공식 반포되면서 기해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해 10월 18일(음)에는 헌종이 천주교의 폐해를 막기 위해 백성들에게 내린 교서, 즉 천주교를 척결하라는 <척사윤음>이 공포되었습니다. 검교제학 조인영이 쓴 이 글에서 왕은 천주교인들이 신주를 부수고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교황을 괴수처럼 받들고, 혼인하지 않는 것을 정결로 여기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어 천주교인들이 아비와 임금을 업신여기고, 천당 · 지옥 이야기로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꾸짖었습니다. 천주교가 조선의 건국이념인 인 · 의 · 예 · 지 사단과 군신유의 · 부자유친 · 부부유별 · 장유유서 · 붕우유신 오륜을 무시하여 천륜과 인심과 미풍양속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리석은 백성들이 사악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계도하고, 끝내 따르지 않는 자는 모조리 제거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천주교는 당시의 지도이념이었던 유교를 전적으로 거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과 천주교의 가르침이 어찌 인간의 본성인 사단이나 인간의 윤리인 오륜과 배치되는 것일까요? 또한 천주와 부모, 교황과 임금, 동정과 부부, 천국·지옥과 현세가 어찌 상반되는 것일까요? 당시에 죽기를 각오하고 진리를 증거하였던 신앙선조들을 떠올립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나 이념이나 노선을 지닌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되새기게 됩니다. [2019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수원주보 4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국문학)]

 

 

문헌으로 되새기는 기해박해 (2) 기해일기(己亥日記)

 

 

‘세복(世福)과 존영(尊榮)을 업신여기고 육정을 끊고 몸을 버려 죽고 … 혹독한 형벌이며 모든 고난을 굳센 마음으로 감수하여 치명한 자가 무수하다.’(『기해일기』 중)

 

조선대목구의 제2대 대목인 앵베르 주교는 19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사적을 조사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하상, 현석문 등에게 자신이 체포되어도 그 일을 계속하도록 일렀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그해 8월 14일(음)에 모방, 샤스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이튿날 정하상도 서소문에서 참수를 당해 치명하였습니다. 조선교회를 떠맡은 현석문은 최영수, 이경천 등과 함께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정리하였으며, 최 베드로와 이재의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이후 현석문도 1946년 7월 20일(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 뒤 페레올 주교가 기해박해 때의 목격자와 증인들을 불러 순교 기록을 재검토하였습니다. 마침내,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 등의 사적을 추가하여 《1839년과 1846년에 순교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완성하였습니다. 당시 홍콩에 머물던 최양업 부제가, 프랑스어로 작성된 이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생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라는 제목을 붙여, 훗날 이들 중 69위가 시복 시성되는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필사본으로만 전해오던 이 책은 1905년에 활판본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 증거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심과 열정이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복락과 지위와 영예, 심지어 목숨마저도 초개처럼 여겼던 신앙선조들의 삶을 되새겨 봅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어디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이러한 신앙선조들의 신심을 본받아 우리도 생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증거하여 먼 훗날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자랑스러운 신앙선조로 여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2019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수원주보 4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국문학)]

 

 

문헌으로 되새기는 기해박해 (3) 상재상서(上宰相書)

 

 

‘대저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가 해야 할 본분입니다.’(《상재상서》 중)

 

정하상은 유진길, 조신철 등과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8,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였습니다. 신유박해 때 모방 신부가 순교한 이래 이 땅에 사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1831년에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어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1835년에 초대 대목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선종하자, 이듬해 초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이어 1836년 말에 샤스탕 신부가, 일 년 뒤에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였습니다. 조선천주교회가 재건되는 기틀이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곧 기해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서양서를 배워 익히매 본디 재덕이 있고 도리가 밝은 까닭에 오래지 않아 신품에 오를’(《기해일기》 중) 정하상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839년 8월 15일(음) 서소문에서 참수 치명한 그는 체포될 때를 대비하여 재상에게 올릴 호교론서인 《상재상서》를 미리 지어놓았습니다.

 

정하상은 《상재상서》에서 천지의 창조주이신 천주의 존재, 천주의 은혜와 인간의 섬김, 십계명과 불멸의 영혼, 상선벌악과 천당지옥, 천주교회의 올바름 등을 논하고, 이어 부모와 군주를 업신여긴다는 비판과 외국 종교 배척의 부당함을 낱낱이 밝혔습니다.

 

이 문헌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이를 온몸으로 증거한 올곧은 선비, 성직자 영입과 교회 재건을 위해 한평생을 오롯이 봉헌한 교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가 남긴 글을 곱씹어 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목숨을 걸고, 누구의 영광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아울러 기해박해 18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나를 있게 하신 하느님을 공경하고 내 영혼을 구하는 일에 얼마나 진력하고 있는지 되새겨 봅니다. [2019년 12월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수원주보 4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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