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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가사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의 창작 기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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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7-17 ㅣ No.1044

천주가사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의 창작 기반 고찰*

 

 

국문 초록

 

이 논문은 박해시기에 신자들의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사말 천주가사의 창작 기반을 규명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그 결과, 한문서학서인 《사종략의(四終畧意)》가 1801년 이후 조선에 유입되어 《말론》이라는 제하의 한글로 번역 · 필사되어 널리 유통되었으며, 사말 천주가사인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는 이 《말론》을 저본으로 하여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말교리 한문서학서들 중 ‘사말(四末)’이라는 명칭이 들어가지 않은 《사종략의》를 한글로 번역한 것은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예수회보다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가 저술한 이 서적을 지니고 입국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특정할 수 없는 세 천주가사의 작자는 교회서적의 번역과 필사에 힘을 쏟던 양반 내지 중인 신분의 신심 깊은 지식인 신자로 보인다. 이 작품들의 창작 시기는 민극가가 〈텬당강논〉과 〈디옥강논〉을 창작한 이후로, 그가 순교한 1840년부터 《말론》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후믁샹》이 나오기 전인 1868년 사이로 추정된다.

 

 

1. 머리말

 

천주가사에 대한 연구는 50여 년 넘게 자료소개와 해설로부터 시작하여 신학적 · 교회사학적, 음악학적, 문학적 접근 등으로 다양하게 진행되어 왔다.1) 그러나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자신의 전공분야에 국한하여 미시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천주가사에 대한 전반적인 면모를 고찰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또한 천주가사가 이백여 편 전승되어 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구의 활성도와 연구자의 참여도가 높지 않았다는 문제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천주가사가 천주교 교리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증적으로 규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종교와 문학의 만남이라는 거시적 측면과 구체적인 작품 분석이라는 미시적 측면의 연구가 동시에 결여되었던 것이다. 문학적 접근의 경우 국문학계에서는 천주가사가 종교적 이념이 강해 상대적으로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연구에서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었으며, 문학작품으로서 천주가사 전체를 분석하는 연구가 드물었다. 또한 신학 · 교회사학적 접근의 경우 작자의 신원과 영성 등의 종교적 측면에 국한함으로써 당대의 가르침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으며, 그 기반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와 성직자가 전무한 상태에서 서적을 통하여 교리를 깨우친 평신도들의 손으로 설립되었다. 평신도 교회지도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문학 장르인 가사의 형식을 빌려 일련의 천주가사들을 창작하였다. 그 중 주목되는 것은 천주교 박해시기에 창작된 천주가사들이다. 이 작품들은 내적으로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리교육을 담당하였고, 외적으로 비신자와 적대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교와 호교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 · 심판 · 천당 · 지옥이라는 네 가지 사후의 문제에 대한 사말교리(四末敎理)를 바탕으로 한 천주가사는 현세적 차원에서의 육화론적 영성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의 순교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논문의 2장에서는 당시의 사말교리가 천주가사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에 어떻게 투영되어 작품으로 형상화하였고, 이 천주가사들의 창작 기반이 된 한글본 교리서가 무엇이었으며, 한글본 서적의 원전인 한문서학서2)가 무엇이었는지를 천주가사 전체 내용과 비교하여 실증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천주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창작된 천주가사가 당시 어떠한 서적을 저본으로 하여 창작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당시 교회 가르침의 유입 경로와 전파 과정을 밝히는 데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3장에서는 이러한 실증적 작업을 토대로 하여 이 천주가사 작품들의 창작 기반이 된 서적이 선택된 이유, 그리고 이 천주가사 작품들의 작자와 창작시기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2. 사말교리서와 사말 천주가사

 

사말교리를 다룬 한글본 서적 중 가장 연원이 오래된 것으로 《말론》 과 《후믁샹》이 있다. 이 두 저서는 저술시기와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채 필사본으로만 전승되고 있다. 《말론》은 〈후죽을라〉, 〈심판〉, 〈공심판〉, 〈디옥〉, 〈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믁샹》은 소제목이 없이 서론에 해당되는 죽음에 이어 〈론심판이라〉, 〈론디옥이라〉, 〈론텬당이라〉, 〈공심판이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서적의 도입부가 흡사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공심판의 순서만 다르게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두 서적 중 다양한 사례와 예화를 들어 독자의 이해를 용이하게 구성한 《후믁샹》이 후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목되는 것은 《후믁샹》의 말미에 ‘大淸光緖二十年大朝鮮開國五百三年 甲午正月日畢 冊主崔神父’라고 적혀있다는 점이다. ‘대청광서이십년’은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인 덕종(德宗) 광서제(光緖帝) 재위 20년이며, ‘대조선개국오백삼년’은 1392년에 조선이 개국한 지 503년이 되는 해이므로 고종 31년인 1894년 갑오년이다. 이 기록으로 인하여 《후믁샹》이 1894년에 르장드르(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가 저술하였다3)고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날짜 뒤에 이어지는 ‘필(畢)’은 저술을 마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필사하기를 마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그 바로 뒤에 기술되는 ‘책주(冊主)’가 저술자라기보다 책 주인을 의미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광서이십년’은 이 책을 필사한 시기이며, ‘책주최신부’는 글자 그대로 이 필사본의 주인이 최신부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결국 한글본 사말교리서인 《말론》과 《후믁샹》의 작자와 저작 시기는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논자들은 중국에서 유입되어 외규장각에 수장되었다가 천주교 서적 금압에 따라 1791년에 소각된 《천주성교사말론(天主聖敎四末論)》과 1801년 형조에서 소각된 《사말론(四末論)》4)이 그 근원이라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후믁샹》보다 앞서 저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말론》은 국내에서 창작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유입된 한문서학서의 번역본이었다. 그 원전은 예상과 달리 ‘사말(四末)’이라는 용어가 들어가지 않은 《사종략의(四終畧意)》라는 것을 이 논문에서 밝히고자 한다. 《사종략의》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1책 4권의 한문서학서인데, 스페인 출신의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인 오르티스(Hortis Ortiz, 白多瑪) 신부가 1705년(康熙 44年 乙酉) 중국 북경 진원당(眞原堂)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제1권 〈사후지설(死後之說)〉, 제2권 〈사심판지설(私審判之說)〉과 〈공심판지설(公審判之說)〉, 제3권 〈지옥지설(地獄之說)〉, 제4권 〈천당지설(天堂之說)〉로 구성되어 있다. 1791년에 소각된 《천주성교사말론》과 1801년 형조에서 소각된 《사말론》과는 제목부터 다른 별개의 책이었던 것이다.

 

또한 사말교리를 핵심적으로 담고 있는 한글본 《말론》과 《후믁샹》의 근원에 대한 의구심과 아울러 소위 사말 천주가사의 창작 기반 역시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작자와 시기, 그리고 작자가 참조한 서적이 오리무중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진소는 ‘천주가사에 교과서 같이 영향을 준 대표적인 서적은 《사후묵상(死後默想)》과 《성교절요(聖敎切要)》이다. 《사후묵상》은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가장 깊은 영향력을 미친 영적 독서였다. 그 책의 차례는 이끔말, 사심판, 지옥, 연옥, 천당, 공심판을 논하고 있는데, 이끔말은 선종가를, 사심판은 사심판가를, 지옥은 지옥가를, 천당은 천당가를, 공심판은 공심판가를 이루었다.’5)고 하여 사말 천주가사가 《후믁샹》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한문서학서인 《사종략의》의 한글번역본인 《말론》이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의 저본이라는 사실을 이 논문에서 밝히고자 한다.

 

이제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의 전체 시구를 한글번역본 《말론》 및 한문서학서 《사종략의》와 대조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기로 한다.

 

1) 〈션죵가〉의 경우

 

〈션죵가〉는 영혼의 세 가지 원수인 마귀 · 세속 · 육신과 대적하며 계명을 잘 지키는 선자의 삶을 권고하는 한편, 육신에 머물러 영혼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악자의 삶을 경고하는 노래6)로 《박동헌본》과 《김지완본》에 전해오고 있다. 《박동헌본》은 4음보 124행7)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김지완본》은 4음보 123행으로 되어 있다. 두 이본의 내용은 거의 같은데, 《박동헌본》 서두에 ‘최도마신부져술’이라 명기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를 분석 자료로 삼는다.

 

1 가련다 셰샹사 난사람은 다죽다 [션죵가]

  사이 살미 잇면 반시 죽으미 잇니 [말론]

  凡人之生 皆必有死 [四終畧意]8)

2 보텬하에 모든사 년젼에 모다죽네

  이제 산  또 년 후에  사도 잇지 못 거시니

  今爲生者 一百年後 皆爲死者 無一可在矣

3 이러타시 헛된셰샹 경영것 무엇인고

  복 누리미 불과 일 인즉 복 일흐미 또 일 이니 엇고 일흐므로써

  근심고 즐거옴을 삼으면 엇지 심히 미련치 아니리오

  人所得之福 享之不過一刻 失之亦不過一刻 况以得失爲憂樂

  豈不是無可比之愚哉

4 죽을곳에 가난가 희락영복 탐소냐

  만일 셰샹 복낙을 탐면 밋치미 심니 … 명이 헛되고 거 것시면

  복낙이 더옥 헛되고 거 것시니

  若貪圖世福世樂 痴哉甚矣 … 生命虛假 其福樂更虛假矣

5 살고죽어 샹합야 셔로업지 못리라

  살기와 죽기 서로 응야 능히 서로 업시치 못 거시라

  生死相應相稱 不能相無

6 녜로부터 이제지 안죽난쟈 나업네

  녜로븟터 즉금지 죽지 아니 니 업서

  自古至今 無不死者也

7 예수셩모 죽으셧네 우리엇지 면손가

  예수와 셩모도 면치 못여 계시니 믈면 우리 사이랴

  吾主及聖母 未免其死 况世人能不死乎

8 귀쳔션악 무론고 죽잔난쟈 그뉘런고

  귀쳔과 현우와 션악을 의논치 말고 뉘 사이 되야 그 죽기 보지 아니며

  萬民貴賤大小善惡 無不皆然 孰爲生人 而不見其死哉

9 우리조샹 다죽언네 우리엇지 면손냐

  식이 션 로지 아니리오

  孰爲人子 而不依先人死乎

10 이목구비 오관삼 오나 썩난고나

   눈이 쟝 반시 보지 못 거시며 … 귀 쟝 반시 듯지 못 거시며

   … 입이 쟝 반시 먹고 말지 못 거시며 … 쾨 쟝 반시 능히

   맛지 못 거시며 … 슈족이 쟝 반시 능히 운동치 못 거시니 …

   오관과 톄 방종히 리오

   此眼 … 將必朽爛 不能再視矣 … 此耳 … 將必損壞 不能復聽矣 … 此口 …

   將必無氣出入 不能復嗜復談矣 … 此鼻 … 將必折毁 不能復齅矣 … 此手 …

   將來頑然如石 不能再動矣 … 身體百肢 將必歸土

11 연속부졀 강물히 이물가면 져물오고

   비컨 강물이 서로 년쇽야 끈허지지 아니 야 뎌 물이 가면 이 물이 오고

   比之河水 彼此相續 不能相斷 彼水往 此水至

12 뎌물가면 후물와셔 바다에가 치니

   이 물이 가면 훗물이 와 바다히 니러 이에 끗치니

   此水往 後水至 如此常流 至海乃止

13 사들도 이와히 시초브터 죽어완네

   우리 사이 이야 젼 사이 훗 사을 인도야 죽을 길흘 이니

   吾者無不似矣 先者引導後者行死路

14 어린 쟝셩고 쟝셩야 늙은후에

   아 쟝셩기 쵹고 쟝셩 이 늙기 촉야

   幼者催壯者速行 壯者催老者速亡

15 죽을길에 도라가셔 수황동 갈일쇼나

   번 죽기의 니러 아와 쟝셩을 가히 보지 못지라

   一至死候 幼者壯者老者 無一可見

16 친쳑붕우 림죵보면 나죽을일 각나네

   디친과 겨와 붕우의 죽으믈 보면 이제 날을 인도 줄을 각지니라

   見爾之親族朋友許多人死 則思彼前去引導爾死路

17 령혼육신 결합면 명잇 사이오

   사이 두 가지로 포함엿시니 서로 합면 산사이 되

   凡人包含二件 靈魂一 肉身一 二者結合 方爲活人 

18 령혼육신 난후 명업는 사이오

   서로 나면 곳 죽니

   二者相離 卽爲死人

19 령혼육신 난후에 시업 시톄로다

   서로 나면 명이 쇼멸고 오관과 톄 다 쓸 업니

   二者相離 生命滅矣 五官知覺息矣

20 앗갑도다 명이여 산육신에 허지면

   앗갑도다 명을 일흐면

   惜哉 失落生命

21 몸에속 조흔물건 나히나 쓸잇나

   몸의 쇽 물건을 다 일허 리니

   屬身之物 同失落矣

 

‧‧‧‧‧‧‧‧‧‧‧‧‧‧‧‧‧‧‧‧‧‧‧‧‧‧‧‧‧‧‧ (후략)9) ‧‧‧‧‧‧‧‧‧‧‧‧‧‧‧‧‧‧‧‧‧‧‧‧‧‧‧‧‧‧‧‧‧

 

이상과 같이 〈션죵가〉의 전체 내용을 《말론》 및 《사종략의》와 대조한 결과, 이 천주가사가 한문서학서를 번역한 한글신심서를 창작 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를 통하여 볼 때 《말론》은 《사종략의》를 한글로 번역하였지만, 다소 번거로운 부분은 생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션죵가〉 역시 《말론》을 저본으로 하여 시가화하고 있지만, 순서와 내용에 있어 다소 다른 점이 있다는 것도 드러났다. 전개 순서 면에 있어서 〈션죵가〉의 2~4행, 34행, 41~42행, 110행은 《말론》과 다름이 있다. 또한 내용 면에 있어서 〈션죵가〉의 70~72행, 76~77행, 81~82행은 《말론》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으로 작자가 독창적으로 삽입한 대목이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독창적인 삽입 내용이 천주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한문 투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자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2) 〈심판가〉의 경우

 

〈심판가〉는 죽음 이후의 사심판이 지엄함을 묵상하여 천주의 자녀다운 태도로 살아가길 촉구하는 노래10)로 《박동헌본》과 《김지완본》에 전해오고 있다. 공히 4음보 92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어의 일부가 다소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박동헌본》의 〈심판가〉는 첫머리에 ‘최도마신부져술’이라 명기된 〈션죵가〉와 말미에 ‘죠션최신부저술종’이라 명기된 〈공심판가〉 사이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를 분석 자료로 삼는다.

 

‧‧‧‧‧‧‧‧‧‧‧‧‧‧‧‧‧‧‧‧‧‧‧‧‧‧‧‧‧‧‧ (전략) ‧‧‧‧‧‧‧‧‧‧‧‧‧‧‧‧‧‧‧‧‧‧‧‧‧‧‧‧‧‧‧‧‧

 

73 강수난 밧으심은 네복락을 위이오 [심판가]

   내 강야 너 구쇽믈 위야 난을 밧으믄 네 락 밧기 위미오

   [말론]

   我降生爲救贖爾 受難爲爾受樂 [四終畧意]

74 만고능욕 밧으심도 네영광을 위이오

   만 가지 괴로옴을 밧으믄 네 만 가지 복 밧기 위이오

   受萬苦爲爾受萬福

75 십가에 죽으심도 네명을 위이라

   죽으믈 밧으믄 네 샹을 위이어

   受死爲爾常生

76 샹영복 윈치안코 영고디옥 네원이라

   도로혀 샹을 원치 아니 고

   爾反不願常生

77 공은사은 드리우나 은망덕 모난테

   샹 므릅쓰고 내 은 더으매 네 잇고 아지 못며

   而冒永死矣 我加恩愛 爾忘恩不認

78 훈계로셔 치나 귀를막아 듯지안코

   내 네 인도고 치매 간히 귀 막아 듯지 아니며

   引祐敎訓 爾詐聾不聽

79 위엄으로 놀거 고집야 두리잔코

   내 위엄을 베퍼 너 놀납고 무셥게 여도 네 더옥 이 고집야

   두리지 아니 고

   加威警嚇 爾加硬不畏

80 샹쥬 경만고 개과쳔션 아니며

   나 경만여시니 사라실 제 내 관셔야 네 뉘웃쳐 곳치믈 용납을

   보아시나 즉금인즉 내 위엄으로 공의 배프믈 볼 거시오

   而輕慢我也 生時多見我之寬恕 容爾悔罪改過 今時則見我之威嚴 而施公義也

81 인신 아비여날 탕하여 역니

   살아실 제 내 인 큰아비 되믈 아지 못며

   生時不肯認我 爲爾之至仁至慈大父

82 공의신 텬쥬젼 사죄령범 영벌이라

   이제 반시 내 공의신 쥬와 네게 죄 졍 법 되 줄을 알 거시니

   今必認我 爲爾至公至義之主 及爲定爾死罪之司者也

83 죄범자 말이업고 도망길 영원이라

   죄범  가히 답 말이 업서 … 도망코져 나 엇지 못고

   犯者無句可對 … 欲逃走而不可得

84 셩모텬신 셩인의게 긍련을 구고

   오직 셩모와 텬신과 셩인들의 불샹이 넉이시믈 라며

   只是恐有聖母可憐 天神可恤 聖人可慨

85 본명셩인 쥬보님 휼을 기다리나

   이에 눈을 둘너 쥬보을 면면 즈나

   乃轉目普視 而尋主保

86 쥬은 대죄인이 뎡벌시에 느졋도다

   다 한염즉다 고 벌염즉다 고 구염즉 지 못다 닐코니

   皆見之以爲可恨可罰 而不可救者也

87 죽니 못죽겟고 미리조11) 통곡이라

   죽고져 나 죽지 못여 오직 톄읍야 머리 조아

   願死又不可得 … 惟有呼號啼哭點頭

88 마귀겻 대령야 다손톱 버려들고

   마귀 … 즐거워 손벽쳐 밋치게 웃고 와셔 잡아 손을 느르혀 한 번 우희면

   魔鬼 … 快活至甚 鼓掌狂笑 而來擒我 其下手一爪

89 달녀드러 둘너싸셔 디옥으로 드러가네

   마귀 임의 령혼을 잡아 디옥의 더져 모든 마귀 영원히 괴로게 니라

   魔鬼旣捕靈魂 則丢于地獄 羣魔永遠苦之

90 호독룡 마자나와 화즁에 그려가니

   디옥의 독 룡과 암이 사을 잇그러 안흐로 드러가

   地獄龍蛇牽人于地獄內

91 뭇마귀와 악인들은 원수고 고로와라

   모든 마귀 원슈로이 괴롭게 이

   羣魔仇之 而加重重萬苦

92 영원영원 무궁니 놀납고도 앏흠이여

   영원이 궁진이 업믈 각면 그 괴로옴과 놀나옴이 더옥 심치 아니 리오

   永遠受之 而無窮盡可望 其所致之苦 所生之警畏 不亦甚哉

 

이상과 같이 〈심판가〉의 전체 내용을 《말론》 및 《사종략의》와 대조한 결과, 이 천주가사가 한문서학서를 번역한 한글신심서를 창작 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다만 〈심판가〉의 5~8행은 전개 순서와 내용 면에 있어서 《말론》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말론》의 소략한 언급을 자세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현세의 삶과 사심판의 결과로서의 상과 벌을 구체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사실감을 제고하고 있다. 작자의 소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 〈공심판가〉의 경우

 

〈공심판가〉는 예수 재림 후의 엄정한 심판을 미리 알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심하길 촉구하는 노래로 《박동헌본》과 《김지완본》에 전해오고 있다. 《박동헌본》은 4음보 115행인데 반해, 《김지완본》은 4음보 116행으로 이루어져 있다.12) 《박동헌본》 말미에 ‘죠션최신부저술종’이라 명기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를 분석 자료로 삼는다.

 

‧‧‧‧‧‧‧‧‧‧‧‧‧‧‧‧‧‧‧‧‧‧‧‧‧‧‧‧‧‧‧ (전략) ‧‧‧‧‧‧‧‧‧‧‧‧‧‧‧‧‧‧‧‧‧‧‧‧‧‧‧‧‧‧‧‧‧

 

13 셩이 살고 만국이 공격이라 [공심판가]

   셩이 셩으로 더브러 죽이고 나라히 나라로 더브러 싸화 [말론]

   民與民相殺 國與國相戰 [四終畧意]

14 양은 빗일코 태음은 피며

   일월이 빗 일코

   日月失光

15 셩신은 도수일코 하날은 운동업셔

   셩신이 도수 일코 하이 운동을 일코

   星辰失序 天失運動

16 너란히 진동고 크게열여터져 입을여

   너 히 크게 진동야 여져 큰 입을 려러

   全地大震裂 開大口

17 만흔셩과 고을이며 허러입에13)드러가고

   만흔 셩을 삼키고

   而呑下多城

18 산악은 문허지고 바다흔 어잇고

   뫼히 문허지고 바다물결이 서로 미러 싸호 소나고 바닷물이 넘쳐 근쳐 으고

   山林崩裂 … 海浪大發鬭聲 驚嚇世人 海水汎溢 淹滿隣方

19 뢰셩번긔 흉니 무졍신 힐소냐

   공즁의 뇌셩과 번 흉히 발고

   空中猛發雷電

20 모진바람 대야 믜와돌이 날이도다

   사오나온 람이 크게 니러나 뫼흘 불면 니게 고

   暴風大作 甚猛吹山 令其改移 而失原所

21 셰샹사 만물가져 쥬은 엿스니

   셰샹사이 만물으로써 쥬 반

   居世之人原用世物 不但失物當然 反以物大悖天主矣

22 만물노쎠 고로와셔 죄과보쇽 맛당다

   쥬ㅣ 만물노써 괴로옴을 더으샤 대략 그 죄 갑흐시니라

   天主以物加苦世人 畧報其罪 當然之理也

23 만히남은 사죽고 이증조와 이변보고

   사이 변의 징됴 보매 놀나물 이긔지 못야 얼골이 초췌야 다 죽은 형샹과 고

   世人見天地大變 不勝慌忷 而驚駭如死矣 容貌憔悴 面色如土 正是皆成死人之像矣

24 육신각 못거든 물가산 못밧긔라14)

   음식을 각지 아니코 을 평안이 지 못고 물과 업을 도라보지 아니고

   世人不思飮食 不貪睡臥 不圖財物 不營生理

25 집사은 산에가고 산즘승은 집에오네

   사은 도망야 뫼흐로 가 난을 피고 즘은 셩으로 드러와 명을 구니

   人逃至山 以避災難 禽獸入城 以救生命

26 부모 셔로나 동셔남북 분쥬졔

   부모와 녜 서로 도라보지 못야

   父母兒女不能相顧

27 흉이죽고 깁히죽어 셔로 모로도다

   부모 동력흐로 가 흉히 죽고 녜 셔력흐로 가 즉시 죽으니

   父母往東凶死 兒女往西暴死

28 심판에 니러셔 공즁으로 불이일허

   심판 의 니러 공즁으로조차 큰 불이 내려

   審判已至 從空中大火降來

29 대셰샹이 츅만야 인내물을 진별네15)

   희 츙만야 만물을 오고

   充滿地面 焚燒萬物

30 금슈이즁16)오금보 다변야 죄가되네

   셰샹사과  즘셩과 고기와 베레와 초목과 오금과 보의 모든 물건이

   다 변야  되지라

   世人鳥獸魚虫草木 五金寶貝等物 皆變爲灰矣

 

‧‧‧‧‧‧‧‧‧‧‧‧‧‧‧‧‧‧‧‧‧‧‧‧‧‧‧‧‧‧‧ (후략) ‧‧‧‧‧‧‧‧‧‧‧‧‧‧‧‧‧‧‧‧‧‧‧‧‧‧‧‧‧‧‧‧‧

 

이상과 같이 〈공심판가〉의 전체 내용을 《말론》 및 《사종략의》와 대조한 결과, 이 천주가사가 한문서학서를 번역한 한글신심서를 창작 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전개 순서 면에 있어서 〈공심판가〉의 2행, 72행, 98행, 102행은 《말론》과 다르다. 또한 내용 면에 있어서 〈공심판가〉의 12행, 35~36행, 111~115행은 《말론》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으로 작자가 독창적으로 삽입한 대목이다. 특히 12행은 성경의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루카 21,11)라는 부분을 시화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112~113행은 《쥬교요지》 상편 〈텬쥬ㅣ텬당디옥을두샤셰샹사의션악을시험야갑흐시니라〉의 ‘셰샹 복은 복이 내 몸에 드러오 텬당복은 내 몸이 복 속에 드러간지라(세상복은 복이 내 몸에 들어오되 천당복은 내 몸이 복 속에 들어간지라)’를 시화하고 있어 이채롭다.17) 아울러 이 노래의 결론 부분인 111~115행은 작자의 감흥으로서 〈공심판가〉뿐만 아니라 〈션죵가〉와 〈심판가〉에 대한 대미라 할 것이다. 작자의 지적 수준과 신심을 상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3. 사말 천주가사의 작자와 창작시기

 

이상과 같은 실증적 대조 작업을 통하여 사말교리에 관한 한문서학서인 《사종략의》가 국내에 유입되었고, 이 목판본이 한글로 번역되어 《말론》이라는 제목의 필사본으로 유통되었으며, 이 필사본을 기반으로 하여 천주가사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가 창작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러나 《말론》은 《사종략의》를 원문 그대로 직역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다소 변형하며 번역하였고, 설명이 긴 부분은 축약하였다. 또한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 역시 《말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말론》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시적 형상화를 위해 순서와 내용을 다소 변형시키며 반영하였다.

 

이처럼 사말 천주가사의 창작 과정과 기반을 구체적으로 규명한 것은 다수에 의하여 필사되어 이본으로 전승되어 오는 천주가사의 내용을 정확하게 판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판본에 따라 부분적으로 내용이 다르거나 오늘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을 창작 기반이 된 원전을 통하여 정확하게 복원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말론》 필사본들 간의 선후관계 및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 필사본들 간의 선후관계를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한문서학서 · 한글번역서 · 천주가사를 한 자리에서 비교한 결과, 《김지완본》 소재의 천주가사들이 《박동헌본》 소재의 것들보다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로써 보면 《김지완본》이 《박동헌본》보다 늦게 등장하였다 하더라도, 《김지완본》이 《박동헌본》에 비하여 앞선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세 천주가사의 내용 단락도 필사본 《말론》과 목판본 《사종략의》의 배열상태로써 보다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의도 있다. 《말론》에서 몇 칸의 여유를 두고 글이 이어지고 있는 경우, 그리고 《사종략의》에서 줄을 바꾸어 새로 시작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내용 단락을 나누는 데 있어 오류를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의 창작 기반에 대한 실증적 작업은 이 작품들을 창작한 작자와 동일인물 여부, 그리고 창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우선 당시 교회지도자들이 《사종략의》를 국내에 유입하여 한글로 번역한 연유를 살피기로 한다. 이 책 외에도 사말교리와 관련한 한문서학서가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회 선교사인 바뇨니(Alfonso Vagnoni, 高一志, 1566~1640) 신부가 1636년에 중국 강주(絳州)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4책 4권의 《천주성교사말론(天主聖敎四末論)》,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쿠플레(Philippe Couplet, 柏應理, 1624~1692) 신부가 1675년에 중국 경일당(敬一堂)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사말진론(四末眞論)》,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인 모텔(Jacques Motel, 穆迪我, 1618~1692) 신부가 1688년에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말념효(四末念效)》 등이 그러하다. 이처럼 당시 신자들에게 익숙한 ‘사말(四末)’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한문서학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종(四終)’이라는 다소 생소한 제목의 서적을 한글번역본의 원전으로 선택한 까닭이 의문이다.

 

이는 천주교 서적 금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조정은 1784년 이 땅에 설립된 천주교가 확산되어 나가자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장령 유하원(柳河源)이 상소하기를, “서양의 천주학 서적이 관상감(觀象監)과 역관(譯官)들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천문과 역법의 도수(度數)를 살펴보는 데 불과할 뿐이더니, 불행히도 근자에 백성들을 속이는 일이 날로 심해지고 천주학의 무리들이 많아졌습니다. … 법사로 하여금 더욱 금절해서 영구히 이 문제를 제거하게 하소서.” 비답하기를, “이른바 서양의 천주학 서적은 참으로 그런 점이 있어 그대의 말이 타당하니 그대로 시행하겠다.”하였다.18)

 

당시 관리들은 천주교 확산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한문서학서의 유포로 보았다. 따라서 그러한 불온한 서적이 국내로 들어올 수 없도록 엄하게 금하는 것이 방책이라는 상소가 잇따랐다.

 

그러한 와중인 1791년에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을 당한 뒤 외종사촌인 권상연(權尙然)과 더불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운 신해진산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였지만, 교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전국으로 확산되어가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대중을 사학에 물들게 하는 서적을 수입하거나 소지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서적 금압을 넘어설 더욱 확실한 방도가 필요하였다. 천주교 서적들을 대중이 접촉할 수 없도록 발본색원하는 조치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결국 서적을 소각하여 없애는 극단적 방안이 대두되었다. 천주교에 호의적이던 정조 역시 이에 수긍하였다.

 

수찬 윤광보(尹光普)가 상소하여 정학(正學)을 밝힘으로써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으라고 하고, 또 홍문관에 소장한 여러 책들을 큰 거리에서 태워버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 … 홍문관에 소장한 서양의 여러 책들을 큰 거리에서 태워버리라는 일은 네 말이 매우 옳다. 그러나 어찌 꼭 멀리 큰 거리에까지 내갈 것이 있겠느냐. 즉시 홍문관에서 태워버리도록 하라.”하였다.19)

 

결국 1791년 정조의 지시로 당일 홍문관 마당에서 《주교연기(主敎緣起)》 2책과 《진정화상(進呈畵像)》 1책이 소각되었다.20) 또한 강화의 외규장각에 수장되어 있던 27종 48책의 천주교 관련 서적들도 그해 12월 한양으로 올려 보내져 소각되었다.21) ‘천주성교사말론 일건사책(天主聖敎四末論 一件四冊)’도 이에 해당하였다. 이어 1801년 신유박해 때 형조에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압수하여 소각한 서적과 성물들 중 ‘사말론일(四末論 一)’이 포함되어 있었다.22) 당시에 ‘천주성교(天主聖敎)’라는 용어가 교회서적에 통상적으로 쓰였음을 감안하면, 1791년과 1801년에 각각 소각된 한문본 《천주성교사말론》과 《사말론》은 동일한 서적23)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한문서학서들이 소각된 이후였다. 정조가 중국에서 천주교 서적을 들여올 수 없도록 금령을 내렸던 것이다.

 

전교하기를, “평안 감사와 의주 부윤 및 세 사신에게 엄격하고 분명하게 말을 만들어서 저마다 서학 책에 대한 금령을 더욱 잘 알게 하라. … 이후로는 각별히 엄히 신칙하여 혹시라도 다시 범하는 일이 없도록 모두 공문을 보내 알리라.”하였다.24)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신자들의 교리교육, 특히 종말론적 영성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해에 따른 순교 영성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사말교리교육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상교회보다는 천상교회에, 현세보다는 내세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사말교리는 더욱 중시되었다. 따라서 교회지도자들은 사말교리와 관련한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신자들에게 유포하는 것이 시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국에 의하여 두 차례에 걸쳐 공식적으로 소각된 《천주성교사말론》과 《사말론》으로 인하여 ‘사말(四末)’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서적은 한문서학서 검열과 금압에 있어 우선적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교회지도자들은 사말교리 관련 한문서학서 중 제목에 ‘사말(四末)’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천주성교사말론》, 《사말진론》, 《사말념효》 등과 같은 서적보다는 사말교리와 관련이 없는 듯한 《사종략의》에 주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이나마 ‘평안 감사와 의주 부윤 및 세 사신’의 눈을 속임으로써 그들의 감시를 피해 국내로 유입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말교리서가 단속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이 한문서학서를 몸에 지니고 입국하였을 수도 있다. 특정할 수 없는 그 선교사는 서적 이름에도 주목하였을 것이지만, 예수회 선교사들이 저술한 《천주성교사말론》, 《사말진론》, 《사말념효》보다는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가 저술한 《사종략의》를 선택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로마 교황청은 15세기 이래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가톨릭 식민지 개척 국가에 해외포교 사업을 위임하였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에서, 스페인은 아메리카와 필리핀 등지에서 이 보호권을 시행하였다. 당시 마카오에서 중국 선교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포르투갈은 교황청 포교성성에서 파견된 선교사 및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과 마찰이 잦았다.25) 조선 교회는 1792년 포르투갈의 보호권 하에 있던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되었으나, 1831년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어 교황청 직속의 포교지로서 파리 외방전교회에 포교 사업이 위임됨으로써 북경 교구에서 독립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조선 교회에 대한 보호권을 고집함으로써26) 조선의 초대 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심하게 견제를 받아 조선 입국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는 조선 교회의 보호권을 주장하던 포르투갈 선교단의 주축이었을 뿐만 아니라 1773년에 해산되기까지 하였던 예수회 선교사들27)이 저술한 서적보다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스페인 계통의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가 저술한 서적을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종략의》가 조선에 유입된 이후 한문에 능통한 신심 깊은 신자가 이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그 제목을 당시 신자들에게 익숙하였던 《말론》으로 붙였을 것으로 보인다. ‘종’이 아닌 ‘말’이라는 용어를 씀으로써 신자들이 거부감 없이 손쉽게 다가가 읽고 교회의 가르침을 습득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박해 시기였으므로 《사종략의》의 유입자와 유입 경로, 한글 번역자와 유통 경로, 심지어 한글번역 필사본의 원본인 한문서학서의 제목 등을 철저히 비밀로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말론》의 저자와 저작 시기,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천주가사의 작자와 창작 시기를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사종략의》의 번역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 책의 한글번역본인 《말론》의 앞뒤에는 여타의 신심서적들과 달리 어떠한 표기도 없다. 따라서 초기 교회의 흐름을 살펴 번역자를 추정하는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이래 한문서학서 번역 작업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이가환은 약간 문예가 있어서 관직이 2품을 겪었으므로 가장 사당의 추복(推服)한 바가 되었으며, 이승훈이 구입해 온 사서(邪書)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널리 전파하였으니, 이가환이 실제 주관하였습니다.28)

 

창현(昌顯)이라고 불리는 최(崔) 요한도 역관 집안 아들로서 활동적이고 정력 많은 인물이었다. 천주교에 나온 후로는 모든 교회 서적들을 자기 손으로 베껴, 그것으로 크게 봉사를 하였다. … “주일(主日)과 축일성경(祝日聖經)의 해석”이라는 한문책을 조선말로 번역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29)

 

한국 천주교회 설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양반 신분의 이벽과 더불어 당시 높은 관직에 있던 이가환은 서명이 밝혀져 있지 않은 일련의 한문서학서들을 번역하였다. 또한 이벽에게 세례를 받은 중인 신분의 최창현은 주일과 첨례 때 사용하기 위하여 성경에 주해를 붙인 《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을 번역하였다. 이로써 보면 양반이나 중인을 비롯한 지식인 신자들은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30), 중인이나 평민 신분의 신자들은 이를 한글로 필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강화부외규장각봉안책보보략지장어제어필급장치서적형지안(江華府外奎章閣奉安冊寶譜略誌狀御製御筆及藏置書籍形止案)》과 《사학징의(邪學懲義)》에 한문서학서 《사종략의》와 한글필사본 《말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종략의》는 1801년 이후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사종략의》 번역의 주체와 시기 문제는 누가 언제 《말론》을 저본으로 하여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를 지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간 최양업 신부가 이 천주가사 작품들의 작자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논자에 따라 최양업 신부의 친작은 27수31), 22수32), 19수 이상33), 19수34), 16수35), 6수36), 4수37), 확정불가38) 등으로 다양하게 규정되었다. 그 중에서 ‘최도마신부져술’이라 명기된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를 최양업 신부의 친작으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말론》의 순서와 구성뿐만 아니라 내용을 거의 그대로 시가로 옮기다시피 한 작업을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최양업 신부가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 세 천주가사 작품들 안에 작자의 의식이나 소양이 크게 개입되어 있지 않고, 시행(詩行)이 저본인 《말론》의 내용과 다르지 않게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설령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를 최양업 신부의 친작으로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즉 이 작품들은 《김지완본》과 《박동헌본》에만 수록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이 땅의 유일한 방인사제가 친히 창작한 작품이었다면, 여느 천주가사들보다도 널리 퍼져 애송되었을 것이므로 이본도 그만큼 많이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앞서 살핀 것처럼 서두에 ‘최도마신부져술’, 말미에 ‘죠션최신부저술종’이라 명기된 《박동헌본》이 《김지완본》보다 후대의 자료를 저본으로 하여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앞선 자료를 보고 필사한 《김지완본》에 최양업 신부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은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가 최양업 신부의 친작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단서가 된다. 즉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의 자료를 저본으로 한 《박동헌본》에 기재된 최양업 신부에 관한 언급은 후대에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결국 《말론》을 저본으로 하여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를 창작한 작자는 동일인물39)로서 당시 한문서학서를 비롯한 교회서적을 번역하거나 필사하던 양반이나 중인 신분의 신심 깊은 지식인 신자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는 《말론》의 내용을 크게 변환하지는 않았지만, 방대한 산문 내용을 운문으로 함축할 수 있는 소양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의 작자가 사말교리와 관련한 천주가사를 창작하면서 이 작품들에 국한한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작품들을 창작한 작자는 죽음 · 사심판 · 공심판을 다루면서 그 결과로의 천당과 지옥을 제외시켰다. 이는 곧 이 세 천주가사가 창작되기 이전에 천당과 지옥에 관한 천주가사가 존재하였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민극가(閔克可, 1787~1840)는 〈삼셰대의〉와 〈텬당강논〉 · 〈디옥강논〉을 창작하였다.40) 그는 두루 다니며 문답식 교리서나 신심서들을 필사하는 ‘셔역(書役)’을 생업으로 삼다 회장으로 발탁되어 신자들에게 ‘힘을 다야 강론며’ 지냈다.41) 그가 창작한 〈삼셰대의〉는 아담 창조, 원죄, 낙원 추방, 노아의 방주, 신앙선조 아브라함, 모세의 십계명, 마리아 잉태, 예수의 탄생 · 공생활 · 수난 · 부활, 성령강림 등을 담고 있는데, 삼세가 현세 · 천당 · 지옥이라는 점에서 보면 〈삼셰대의〉에서 현세를 그리고 있으므로 뒤이어 〈텬당강논〉과 〈디옥강논〉이 등장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러므로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의 작자는 이미 신자들 사이에서 유포되고 있던 〈텬당강논〉과 〈디옥강논〉을 제외한 나머지 사말 천주가사를 창작하였던 것이다.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가 《말론》과 《후믁샹》뿐만 아니라 《쥬교요지》 · 《셩교요리문답》 · 《셩교문답》 · 《텬당직노》 · 《회죄직지》와 같은 다양한 문헌을 기반으로 하여 창작된 〈텬당강논〉 · 〈디옥강논〉42)과 다른 양상을 지닐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민극가가 기해박해 때인 1840년 1월 30일에 순교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는 그 이후에 창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이와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볼 수도 있다. 즉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가 창작된 이후에 민극가가 〈텬당강논〉과 〈디옥강논〉을 창작하였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말 천주가사가 상선벌악 교리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선벌악의 결과인 천당과 지옥에 관한 내용을 빼놓고 사말 천주가사를 창작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는 〈텬당강논〉과 〈디옥강논〉이 널리 유포된 이후에 창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이 세 천주가사의 창작 시기는 1791년과 1801년에 천주교 서적들이 소각된 후 《사종략의》가 국내에 유입되어 《말론》으로 번역된 뒤라 할 것이다. 즉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는 민극가의 〈텬당강논〉과 〈디옥강논〉이 널리 유포된43) 이후인 1840년에서, 《말론》을 저본으로 하여 보다 풍부한 내용으로 저작된 《후믁샹》이 나오기 이전인 1868년44) 사이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4. 맺음말

 

이 논문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자마자 불어 닥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던 신자들의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사말 천주가사의 창작 기반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즉 천주가사가 천주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다는 전제 하에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에 당시의 사말교리가 어떻게 투영되어 작품으로 형상화하였고, 그 창작의 기반이 된 서적이 무엇이며, 그 한글필사본의 원전인 한문서학서가 무엇인지를 실증적으로 고찰하고자 마련되었다. 그 결과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사말교리를 다룬 한문서학서인 《사종략의》가 1801년 이후 조선에 유입되어 《말론》이라는 제하의 한글로 번역 · 필사되어 널리 유통되었으며, 사말 천주가사인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는 이 《말론》을 저본으로 하여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여러 종류의 사말교리 관련 한문서학서 중 《사종략의》를 한글로 번역하여 필사한 것은 사말교리 관련 서적의 소각 및 금압과 관련이 있다. 즉 《천주성교사말론》과 《사말론》이 소각되는 한편, 이러한 유형의 서적들을 금압하는 강경한 분위기 속에서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하여 ‘사말(四末)’이라는 명칭이 들어가지 않은 이 한문서학서를 유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살벌한 상황 속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예수회보다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가 저술한 이 서적을 몸에 지니고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국내에 유입된 이 《사종략의》는 당시 신자들에게 익숙하였던 《말론》으로 번역되었으며,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를 창작한 작자는 이 한글번역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특정할 수 없는 세 천주가사의 작자는 교회서적의 번역과 필사에 힘을 쏟던 양반 내지 중인 신분의 신심 깊은 지식인 신자로 보인다. 이 천주가사 작품들의 창작 시기는 사말교리 중 천당과 지옥에 관한 노래가 빠져있다는 점에서 민극가가 〈텬당강논〉과 〈디옥강논〉을 창작한 이후였을 것이다. 즉 민극가가 순교한 1840년부터 《말론》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후믁샹》이 나오기 이전인 1868년 사이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학과 신학 · 교회사학의 만남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실증적으로 진행된 이 연구는 그간 미시적 측면으로 접근하였던 천주가사 연구에 새로운 안목을 제공하는 한편, 천주가사 작품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촉진할 것이다.

 

* 이 연구는 2018년도 서울디지털대학교 대학연구비의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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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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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79.

한명수, 〈복자 김종륜 루카의 수택본 《사후묵상》의 친필사에 관한 일고〉, 《부산교회사보》 97, 부산교회사연구소, 2018.

홍민자, 〈천주가사의 교회음악적 의의〉, 《최석우 신부 화갑 기념 한국교회사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1) 천주가사 연구사는 김문태, 〈천주가사 〈향가(思鄕歌)〉의 교리 실현화 양상〉, 《신학전망》 184, 광주가톨릭대 신학연구소, 2014, 115~117쪽 참조.

 

2)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서양의 종교서나 과학서 등을 한문으로 번역하였거나 직접 저술하였던 서적들을 대체로 한역서학서라 통칭하였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한문서학서라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

 

3) 하종희, 〈한국 천주교 관련 고문헌의 출간 및 출판문화사적 연구〉, 숙명여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부록 Ⅸ ; 《가톨릭대사전》 〈사후묵상〉.

 

4) 《江華府外奎章閣奉安冊寶譜略誌狀御製御筆及藏置書籍形止案 乾隆六十年八月日》 〈西小卓〉 ; 《邪學懲義》 〈附妖畵邪書燒火記〉 참조.

 

5) 김진소, 〈천주가사의 연구〉,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264쪽. 김옥희와 김영수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김옥희,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Ⅰ》, 계성출판사, 1986, 24~25쪽 ; 김영수, 《교주 천주가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121쪽).

 

6)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김문태, 〈천주가사 〈션죵가〉의 교리 시가화 양상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 《어문연구》 171,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6 참조.

 

7) 원문 135행 중 103~112행과 131행은 앞뒤의 내용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반복된다. 필사자의 실수가 명백하므로 중복된 부분을 삭제하면 124행이 된다. 실제로 《김지완본》에는 이 부분이 없다.

 

8) 우선 천주가사의 원문을 들고, 이어 시구의 저본이 된 한글번역본 《말론》의 원문, 그리고 한문서학서 《사종략의》의 원문을 차례로 첨부함으로써 천주가사의 창작 과정을 실증적으로

밝히기로 한다.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필자 임의로 천주가사 앞에 번호를 붙이고, 모든 원문을 띄어쓰기한다.

 

9) 발표지면의 제약으로 대조 원문의 대부분을 생략하고, 그 일부만 싣는다(이하 동일). 세 자료를 대조한 원문 전체는 별도 첨부된 부록을 참조할 것.

 

10) 〈심판가〉와 〈공심판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김문태, 〈천주가사 〈심판가〉 · 〈공심판가〉의 교리형상화 양상과 복음화 방향〉, 《신학전망》 190, 광주가톨릭대 신학연구소, 2015 참조.

 

11) 《김지완본》에는 ‘머리조아’라 표기되어 있다. 《말론》 〈심판〉에 ‘톄읍야머리조아’라 하였으니 울며 머리를 조아린다는 표현이 맞다.

 

12) 《김지완본》이 1행 더 많은 것은 98행에 《박동헌본》에 없는 ‘인자신 대부얼굴 영원이 못뵈옵고’가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13) 《김지완본》에는 ‘터진입에’라 표기되어 있다.

 

14) 《김지완본》에는 ‘밧기라’로 표기되어 있다.

 

15) 《김지완본》에는 ‘잉여물을 진멸네’로 표기되어 있다.

 

16) 《김지완본》에는 ‘금슈어츙’으로 표기되어 있다.

 

17) 이러한 교리서의 표현은 《후믁샹》 〈론텬당이라〉의 ‘셰샹 락은 락이 내 쇽에 들 텬샹락은 내가 락쇽에 들미니(세상락은 낙이 내 속에 들되 천상락은 내가 낙 속에 듦이니)’로 계승

되고 있다.

 

18) 《일성록》, 정조 9년 을사(1785) 4월 9일(무자), 〈장령 유하원이 상소하여 징토하고 서양의 천주학 서적을 금할 것을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일성록》,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의 번역문은 한국고전번역원 참조).

 

19) 《조선왕조실록》 정조 15년 신해(1791) 11월 12일(계미), 〈수찬 윤광보가 정학을 밝힘으로써 사설을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기를 청하다〉.

 

20) 《승정원일기》 정조 15년 11월 12일 (계미), 〈감찰다시를 한다는 신기의 계〉.

 

21) 《江華府外奎章閣奉安冊寶譜略誌狀御製御筆及藏置書籍形止案 乾隆六十年八月日》 〈西小卓〉.

 

22) 《邪學懲義》 〈附妖畵邪書燒火記〉.

 

23) 배현숙(〈17 · 8세기에 전래된 천주교서적〉,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34쪽.) 역시 이러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24) 《일성록》 정조 15년 신해(1791) 11월 11일(임오), 〈서학에 관한 여러 책을 받아 오는 것에 대해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25) 최석우, 〈조선교구 설정의 교회사적 의미〉, 《교회사연구》 4,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 62~69쪽 ;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교회사연구》 4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191쪽 참조.

 

26)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79, 중 211~217쪽, 하 143쪽 참조.

 

27) 서양자, 《중국천주교회사》, 가톨릭신문사, 2001, 102쪽 · 120쪽 참조.

 

28) 《조선왕조실록》 순조 1년 신유(1801) 10월 27일(경오), 〈이만수의 토사 주문〉.

 

29)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같은 책, 상 315쪽 참조.

 

30) 조광, 〈조선후기 서학서의 수용과 보급〉, 《민족문화연구》 44,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6, 209쪽 ; 배현숙, 앞의 논문, 41쪽 ; 강혜영, 〈조선후기의 서적금압에 대한 연구〉, 《서지학연구》 5 · 6, 한국서지학회, 1990, 139~140쪽 참조.

 

31) 홍민자, 〈천주가사의 교회음악적 의의〉, 《최석우 신부 화갑 기념 한국교회사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315쪽.

 

32) 하성래, 《천주가사 연구》, 성황석두루가서원, 1985, 122~123쪽.

 

33) 김옥희, 앞의 책, 1986, 8쪽.

 

34) 오숙영, 〈천주교 성가 가사고〉, 숙명여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1, 38쪽 ; 심재근, 〈천주교가사연구〉, 《국어국문학연구》 8, 원광대 국문학과, 1982, 64쪽 ; 신규호, 〈한국기독교 시가연구〉, 단국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25쪽 ; 이혜정, 〈천주가사의 저작배경과 내용의 변화〉, 《종교연구》 34, 한국종교학회, 2004, 394쪽.

 

35) 조지형, 〈최양업 신부 소작 천주가사의 목적과 특성〉, 《누리와 말씀》 34, 인천가톨릭대, 2013, 324~330쪽.

 

36) 김진소,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연구의 의의〉,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234쪽. 그는 〈사향가〉 · 〈선종가〉 · 〈공심판가〉 · 〈사심판가〉 · 〈칠성사가〉 · 〈피악수선가〉를 최양업 신부의 작품으로 규정하여 작자를 확정할 수 없다는 이전의 견해(〈천주가사 연구〉,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265~267쪽)를 수정하였다.

 

37) 류한영,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영성》, 청주교구 배티 순교성지, 1999, 66쪽 ;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영성》, 청주교구 배티 순교성지, 1999, 59쪽 ; 윤미영, 〈박해시대 천주가사와 서한 연구를 통한 최양업 신부의 영성〉, 서강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21~22쪽 ; 양희찬, 〈국문학의 입장에서 본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307쪽.

 

38) 이경민, 〈천주가사 연구〉, 전남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29~31쪽 ; 김영수, 《천주가사 자료집(하)》, 가톨릭대 출판부, 2001, 617쪽.

 

39) 하성래(앞의 책, 196쪽)와 류한영(앞의 논문, 66쪽 · 103쪽) 역시 이와 같은 견해를 밝힌 바 있다.

 

40) 차기진, 〈조선후기의 천주가사에 대한 재검토〉, 《교회와 역사》 27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8~10쪽 참조.

 

41) 《긔일긔》, 120~121쪽 참조.

 

42) 김문태, 〈천주가사 〈텬당강논〉 · 〈디옥강논〉의 교리 시가화 양상〉, 《어문연구》 175,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7, 75~78쪽 참조.

 

43) 차기진(앞의 논문, 12쪽)은 〈삼셰대의〉의 저술 시기를 민극가가 40세 무렵이었던 1827년경이라 추정한 바 있다.

 

44) 한명수는 《후믁샹》의 이본들 중 1868년에 순교한 김종륜 루카가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택본이 있다고 하였다(〈복자 김종륜 루카의 수택본 《사후묵상》의 친필사에 관한 일고〉, 《부산교회사보》 97, 부산교회사연구소, 2018, 40쪽).

 

[교회사 연구 제53집, 201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문태(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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