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7일 (목)
(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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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16 ㅣ No.913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1)

 

 

콘스탄티누스의 종교

 

313년에 교회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드러내는 단초였다. 이는 교회와 사회 사이에 생긴 하나의 새로운 관계, 즉 교회가 그리스도교 국가로 간주되는 하나의 국가 안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내포한다. 국가는 그리스도교의 삶에 직접 개입하면서 국가를 이념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교회에 요구했다. 황제는 제국의 법과 질서를 뒤흔드는 교의적인 논쟁을 무마하려 했고 공의회를 직접 소집했다. 동시에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재정적, 물질적 그리고 법적인 편의를 제공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280년경, 나이수스에서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어머니 헬레나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리스도교에 회의적인 황제였고 어머니는 312년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그가 과연 어떤 신앙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래 콘스탄티누스 가족의 종교 성향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종교 혼합주의로 일종의 유일신관이었다. 그러나 밀비오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와 관련된 전설은 당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왜 자신을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 그리스도 덕분에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그는 믿었다. 비록 에우세비우가 콘스탄티누스를 극찬했지만, 실제로 콘스탄티누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죽기 직전에야 침대에서 세례를 받았을 뿐이며(337년), 생전에 저지른 많은 범죄를 볼 때 그를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심지어 자신들의 가족들까지, 즉 장인과 세 명의 인척들, 아들 하나와 그의 아내를 사형에 처했다. 그는 윤리 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인의 대표적인 예였다.

 

313년, 로마제국의 서쪽은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동쪽은 리키니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두 황제가 서로 충돌했다. 당시 리키니우스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있었다.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자,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교를 수호하기 위해서 종교 전쟁을 수행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쟁에서 패한 리키니우스가 암살되자 콘스탄티누스는 324년,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때를 그리스도교 제국의 원년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동쪽에 머물러야겠다고 작정하고, 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그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 비잔티움이라는 작은 마을을 선택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했다. 새 수도를 정할 때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하느님으로부터 그 장소를 계시받았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은 330년 5월 11일에 장엄하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봉헌되었다. 이 봉헌 예식에 이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참석했다. 제국의 수도 이전은 제국뿐만 아니라 속국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제국의 무게 중심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했고, 제국의 서쪽은 후대 황제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은 교회 안에서 ‘제2의 로마’가 되려고 시도했으며, 그리스 문화권의 그리스도인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끌어들였다. 새 수도 건설은 향후 교회 분열을 야기할 씨앗을 품게 된 사건이었다. [201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2)

 

 

그리스도인 황제들

그리스도인 황제들은 전통 종교의 수장을 의미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제관)’라는 칭호를 지니고 교회 안에서 대제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315년부터 동전에 그리스도의 모노그램(상징)이 새겨졌고, 이 동전들은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하는 수단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을 ‘사도들과 동일시’하거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의 주교’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것은 황제가 교회 일에 직접 간섭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박해가 끝나고 황제의 태도가 이렇게 바뀐 것은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실현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신성한 본성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황제를 모든 그리스도인의 수장, 즉 새 모세이자 새 다윗으로 받들었다. 바로 황제에 대한 이러한 칭호 때문에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호의를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종교 의식에 사용할 바실리카와 궁전을 주었다. 황제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예루살렘의 성묘 대성전, 베들레헴 대성전,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성당들과 같은 아름다운 예배 장소들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주교들에게 값진 선물을 하사했다.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유산 상속을 허락한 덕분에, 교회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법적 특권을 갖게 되었다. 교구 법정에서 민사 재판이 열렸고, 주교들은 총독과 같은 서열로 간주되었다.

그 어떤 황제도 종교 문제가 제국의 안녕을 해칠 경우에는 그 문제를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분쟁을 중재해 달라고 호소했다.

313년부터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나투스 논쟁에 관련하여 황제의 중재를 계속 요청했다. 도나투스 논쟁은 4세기 내내 아프리카 교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312년에 케킬리아누스가 카르타고의 주교로 서품되자, 아프리카 교회는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케킬리아누스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케킬리아누스를 서품한 주교들이 키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배교한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립 주교로 도나투스를 임명했다. 도나투스 논쟁은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많은 도시들에서 도나투스파 주교들과 가톨릭의 주교들이 서로 적대 관계를 이루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합법적으로 서품된 주교들에게만 재정 지원을 하자, 도나투스파 주교들은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에게 호소했다. 황제는 이 문제를 이탈리아와 갈리아의 주교들에게 일임했다(314년, 아를 시노드). 이탈리아와 갈리아의 주교들은 도나투스를 단죄했다. 이에 도나투스의 추종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도나투스파들이 점거하고 있던 모든 성당에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양쪽 모두에게 예배의 자유를 주었고,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그들만의 성당을 새로 짓도록 자금을 대 주었다. [2017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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