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1일 (목)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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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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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16 ㅣ No.913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1)

 

 

콘스탄티누스의 종교

 

313년에 교회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드러내는 단초였다. 이는 교회와 사회 사이에 생긴 하나의 새로운 관계, 즉 교회가 그리스도교 국가로 간주되는 하나의 국가 안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내포한다. 국가는 그리스도교의 삶에 직접 개입하면서 국가를 이념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교회에 요구했다. 황제는 제국의 법과 질서를 뒤흔드는 교의적인 논쟁을 무마하려 했고 공의회를 직접 소집했다. 동시에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재정적, 물질적 그리고 법적인 편의를 제공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280년경, 나이수스에서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어머니 헬레나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리스도교에 회의적인 황제였고 어머니는 312년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그가 과연 어떤 신앙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래 콘스탄티누스 가족의 종교 성향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종교 혼합주의로 일종의 유일신관이었다. 그러나 밀비오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와 관련된 전설은 당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왜 자신을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 그리스도 덕분에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그는 믿었다. 비록 에우세비우가 콘스탄티누스를 극찬했지만, 실제로 콘스탄티누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죽기 직전에야 침대에서 세례를 받았을 뿐이며(337년), 생전에 저지른 많은 범죄를 볼 때 그를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심지어 자신들의 가족들까지, 즉 장인과 세 명의 인척들, 아들 하나와 그의 아내를 사형에 처했다. 그는 윤리 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인의 대표적인 예였다.

 

313년, 로마제국의 서쪽은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동쪽은 리키니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두 황제가 서로 충돌했다. 당시 리키니우스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있었다.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자,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교를 수호하기 위해서 종교 전쟁을 수행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쟁에서 패한 리키니우스가 암살되자 콘스탄티누스는 324년,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때를 그리스도교 제국의 원년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동쪽에 머물러야겠다고 작정하고, 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그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 비잔티움이라는 작은 마을을 선택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했다. 새 수도를 정할 때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하느님으로부터 그 장소를 계시받았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은 330년 5월 11일에 장엄하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봉헌되었다. 이 봉헌 예식에 이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참석했다. 제국의 수도 이전은 제국뿐만 아니라 속국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제국의 무게 중심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했고, 제국의 서쪽은 후대 황제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은 교회 안에서 ‘제2의 로마’가 되려고 시도했으며, 그리스 문화권의 그리스도인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끌어들였다. 새 수도 건설은 향후 교회 분열을 야기할 씨앗을 품게 된 사건이었다. [201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2)

 

 

그리스도인 황제들

그리스도인 황제들은 전통 종교의 수장을 의미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제관)’라는 칭호를 지니고 교회 안에서 대제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315년부터 동전에 그리스도의 모노그램(상징)이 새겨졌고, 이 동전들은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하는 수단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을 ‘사도들과 동일시’하거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의 주교’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것은 황제가 교회 일에 직접 간섭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박해가 끝나고 황제의 태도가 이렇게 바뀐 것은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실현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신성한 본성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황제를 모든 그리스도인의 수장, 즉 새 모세이자 새 다윗으로 받들었다. 바로 황제에 대한 이러한 칭호 때문에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호의를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종교 의식에 사용할 바실리카와 궁전을 주었다. 황제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예루살렘의 성묘 대성전, 베들레헴 대성전,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성당들과 같은 아름다운 예배 장소들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주교들에게 값진 선물을 하사했다.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유산 상속을 허락한 덕분에, 교회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법적 특권을 갖게 되었다. 교구 법정에서 민사 재판이 열렸고, 주교들은 총독과 같은 서열로 간주되었다.

그 어떤 황제도 종교 문제가 제국의 안녕을 해칠 경우에는 그 문제를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분쟁을 중재해 달라고 호소했다.

313년부터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나투스 논쟁에 관련하여 황제의 중재를 계속 요청했다. 도나투스 논쟁은 4세기 내내 아프리카 교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312년에 케킬리아누스가 카르타고의 주교로 서품되자, 아프리카 교회는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케킬리아누스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케킬리아누스를 서품한 주교들이 키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배교한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립 주교로 도나투스를 임명했다. 도나투스 논쟁은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많은 도시들에서 도나투스파 주교들과 가톨릭의 주교들이 서로 적대 관계를 이루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합법적으로 서품된 주교들에게만 재정 지원을 하자, 도나투스파 주교들은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에게 호소했다. 황제는 이 문제를 이탈리아와 갈리아의 주교들에게 일임했다(314년, 아를 시노드). 이탈리아와 갈리아의 주교들은 도나투스를 단죄했다. 이에 도나투스의 추종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도나투스파들이 점거하고 있던 모든 성당에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양쪽 모두에게 예배의 자유를 주었고,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그들만의 성당을 새로 짓도록 자금을 대 주었다. [2017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3)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이교 신앙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 내의 모든 종교에 양심과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 옛 종교들은 비록 예전의 힘은 상실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동쪽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고, 전통적인 종교들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로마의 원로들과 지성인들이 속해 있던 환경은 한마디로 문화적 ·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옛 전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땅을 비옥하게 해주고 가축을 번성하게 해 준다고 믿어 온 옛 종교 예식들을 계속 거행했다. 본래 이교도 주의란 단어는 ‘시골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파가누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인 법령들이 4세기에 점점 더 많이 제정되었다. 황제들이 점차로 이교 종교 예식들을 주도적으로,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압박을 받아서 금지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로마 법전에 나오는 몇몇 법령들이 잘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마술, 점술과 같은 특정 행위를 금지했다. 이후로 이 같은 금령들이 점차 늘어났고 더욱더 엄격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마침내 희생 제사를 금지하고 이교 신전들을 봉쇄했다. 그리고 이를 어기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 법령이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았으며 이 법령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조카 율리아누스의 재위(361~363) 중에 이교 신앙이 다시 번성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배교자’라고 불렀다. 이 배경에는 콘스탄티누스의 상속자들이 그의 일가족을 모두 살해했고, 그만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비난했고 전통종교를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그가 전사하자, 사람들은 그가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에, 그를 계승한 황제들은 이교도와 그리스도교의 이단에 대해서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379년,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대제관이라는 칭호를 거부했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 392년에는 모든 이교의 신앙 관습이 금지되었는데 이것이 고대 종교에는 독(毒)이 되었다. 4세기 초부터 이와 같은 역전 현상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박해를 가하던 이교도들이 이제는 박해를 당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전에는 국가 공권력이 이교주의를 보호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했다. 이같이 상황이 역전이 되었지만 여전히 종교와 로마제국의 분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종교는 여전히 사회의 토대이며 사회 구성원을 결속하는 역할을 했다. 단지 종교가 이교주의에서 그리스도교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신앙과 이단자들에게 대항해 싸우면서 국가 공권력의 도움을 받는 것을 좋게 생각했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며, 심지어 황제들도 결국에는 그런 식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몇몇 주교들은 프리스킬리아누스를 단죄할 때 공권력의 개입을 주저했다. 프리스킬리아누스는 380년대 스페인 아빌라의 주교였는데 교회 공동체를 선동하여 아주 엄격한 비밀 단체로 만들어버렸고, 이에 스페인의 주교들이 그를 마니교도라는 교회 당국과 트리어에 있는 막시무스 황제에게 고발하였다. 그와 추종자들은 비윤리적이며 마술을 행했다는 이유로 황제의 명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는 교회의 일을 세속 법정에 세운 최초의 사건이었고, 이 판결에 대해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고발한 주교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교회의 문제를 공권력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데에 대한 반발이었다. [2017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4)

 

 

복음화로 변화된 사회

그리스도교 정신은 과연 후대에 로마제국의 사회 제도에 영향을 끼쳤을까? 물론 이다. 325년에 일요일과 그리스도교의 주요 축일이 공휴일이 된 이후로, 그리스도교의 전례력은 로마제국의 사회생활에 리듬을 가져다주었다. 그리스도교의 영향은 가족 문제와 관련된 법령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제정된 법들은 노예와의 간음을 금지하고 누구를 막론하고 이혼을 할 수 없게 했다. 노예 제도에도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당시에는 교회도 노예를 소유했는데, 노예 가족들을 해체시켜 헤어지게 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노예들은 성당에서 성직자가 입회한 가운데 노예 해방 선포문이 낭독되면 훨씬 더 쉽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간수들이 수감자들을 굶겨 죽이지 못하게 하고, 수감자들이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햇빛을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수감자들의 인권도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 성직자들은 감옥을 방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또한 현행 관습을 크게 변화시키기 힘든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는 자선 단체를 설립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 제도가 변화된 것은 이들 자선 활동 기관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사도행전 시대 때부터 행해져 온 자선 활동은 그리스도교 제국에서도 성행했다. 카파도키아 지방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주교는 성당, 수도원,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와 병원을 갖춘 명실상부한 그리스도교 도시를 건설했다. 여행자, 병자, 가난한 이들이 이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주교 밑에 500명의 남자 간호사 부대가 있었고,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는 순례자들을 맞을 수 있는 숙소가 있었다. 하지만 사회를 완전히 그리스도교화 하는 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새 세례자들이 항상 자신들의 옛 생활 방식을 바꾸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유아 살해는 법률로 금지되었으나, 어린이 유기는 법률로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검투사 경기를 금지하는 법이 있었지만, 4세기까지는 유명무실한 법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입대를 꺼리는 경향은 사라졌다. 후대의 로마제국은 더욱더 전체주의적 통치 구조에 입각한 폭압적 경찰국가가 되어갔다. 법을 집행할 때는 흔히 고문이 자행되었다. 주교들이 종종 이러한 법의 폭력을 반대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테살로니카에서 7천 명을 학살하도록 명령한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성찬례에 다시 참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회 예식을 거쳐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청했다(390년). [201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5)

 

 

세례식과 참회 예식의 발전

교회에 평화가 도래하기 전만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313년 밀라노 관용령으로 교회에 평화가 찾아오자,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로마제국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부과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적 요구는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세례식과 참회 예식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지만, 사목적인 면에서는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 표지를 받고, 기본적인 신앙 교육을 받고, 축성된 소금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도 하지 않았다. 예비신자 기간을 늦출 수 있는 대로 늦추고, 아주 늙거나 죽음이 임박해서야 세례를 받으려 했다. 사실, 세례를 받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지만 참회는 일생에 단 한 번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적인 욕망을 다 사용하고 난 다음에 그리스도교에 결정적으로 투신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교회는 이와 같은 잠정적인 예비신자들보다 일찍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보였다. 사순 시기가 시작될 때 세례 후보자로 지명되고 신경을 통해서 신앙의 내용이 단계별로 설명되었다. 성토요일에 구마 의식을 거치고 사도신경이 장엄하게 낭독되는 것을 들은 후 본인들도 사도신경을 암송해야 했다. 교리 교육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세례 받기 전에 받는 ‘세례 교리’와 세례를 받고 나서 받는 ‘신비 교리’가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례 교리는 주교 신경과 도덕적 회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신비 교리는 세례 자체와 성찬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중죄를 저지른 경우 참회는 일생에 단 한 번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들은 가능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즉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참회를 미루었다. 공적 또는 교회법적 참회는 예외적인 의식이었다. 즉, 중죄와 스캔들을 일으키는 죄를 범해서 성찬례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사람들만이 참회를 할 수 있었다. 중죄를 범한 사람은 원칙적으로 주교에게 비밀리에 죄를 고했고 죄인들이 참회 행위를 시작하면, 안수를 해주고 참회복을 입혀주었다. 참회 기간은 죄의 경중에 따라 달랐고, 여러 해가 걸릴 때도 있었다. 참회 기간이 끝나면, 일반적으로 성목요일의 발씻김 예식 때 주교가 참회자들에게 안수하며 죄를 용서해 주었다. 참회자에게 주어지는 조건은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공적 참회가 이처럼 엄격하다 보니, 많은 부작용이 생겨났다. 예비신자들은 세례 받기를 자꾸 뒤로 미루었다. 특별한 어려움을 겪지 않고 단번에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세례였기 때문이다. 일단 세례를 받은 다음에 죄를 지은 사람들은 가능한 한 일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참회를 미루었다. 왜냐면 그들은 사업과 현실의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참회의 기회가 한 번으로 제한되고 엄격하여 5세기가 되자 참회단에 속해 있던 많은 죄인들이 참회단에서 이탈해 버렸다. 참회 규정이 너무 엄격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현상과는 달리, 아주 엄격한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한 정신으로 엄격한 공적 참회를 받아들였다. [2017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제국 치하의 교회(4~5세기) (6)

 

 

화려한 예식의 발전

 

호화로운 대성전과 교회 건물, 제의와 전례용품으로 성찬례는 점점 더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연설, 행렬 그리고 강론의 횟수가 늘어났다. 서방 교회에서는 성찬례를 매일 거행하는 관습이 점차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동방 교회에서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관습이 지역에 따라 다양했다. 이렇게 전례주년도 점차적으로 고정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2세기 말부터 부활 대축일 경축이 50일까지 연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기념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 경축은 4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오래전부터 부활 대축일 전 이틀은 단식과 부활 준비 기간이었다. 특히 부활 성야에 세례를 받을 예비신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한편, 사순 시기 자체는 부활 대축일에 앞서 40일 동안 지내는 준비 기간이었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것은, 박해가 끝나고 교회에 평화가 찾아온 후에 곧바로 생겨났다. 사순 시기가 처음 제정될 때에는 부활 대축일 전 일주일 동안만 단식을 했는데, 나중에 그 기간이 40일로 연장되었다. 사순 시기의 기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산되었는데, 이 기간을 정한 의도는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것을 본받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사순 시기에 집중적으로 예비신자들의 세례를 준비시킴으로써 이 시기의 의미는 계속 강화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고정된 날짜에 지내는 축일 두 가지가 생겨났다. 동방 교회에서는 1월 6일에 하느님의 지상 현현, 즉 예수 탄생과 세례를 기념하는 공현 축일을 지냈다. 1월 6일은 이집트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축제일이었다. 그러나 서방 교회에서는 330년경부터 12월 25일에 예수의 탄생을 기념했다. 이날은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는 시기를 맞아 승리를 거둔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의 축제일이었다. 4세기 말에는 이 두 축일이 동방과 서방 교회에서 각각 거행되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예수의 현현’인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따로 지내고, 예수의 또 다른 현현인 동방 박사들의 방문, 예수의 세례, 첫 기적인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따로 지냈다.

 

또한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신심이 교회 안에 널리 퍼졌고, 순교자 공경 예식은 거창하게 발전했다. 때로는 예전 이교도들의 종교 의식을 차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무덤에 음식을 가져다 놓는 관습인 레프리게리움(refrigerium - 위안)이 바로 그것이다. 바티칸 언덕 위에 지은 성 베드로 대성전과 같이,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곳에 거대한 대성전이 지어졌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죽으면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지은 대성전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순교자의 유해에 대한 깊은 관심은 엄청나게 선풍적인 발굴 작업으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스테파누스 성인의 유해와 사도들의 유해 등의 발굴로 이어졌다. 그리고 발굴에 대한 관심은 성경과 관련된 장소들,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과 관련된 장소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잘 정리된 순례기 중에서 에게리아(Egeria)가 400년경에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기록한 《여행기 또는 성지 순례》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성지 순례자들의 신심은 성지순례 안내자들의 업무를 촉진시켰고, 이로써 엄청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2017년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 연중 제24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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