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4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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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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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1 ㅣ No.854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국문 초록

 

이 글에서는 광복에서부터 현재까지 한국 교회의 민족사 참여를 사회영성의 관점에서 성찰한 결과를 다룬다. 사회영성은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자세’로 정의할 수 있다. 광복 후 현재까지 교회의 민족사 참여를 교회가 사회에 대응한 방식의 성격, 사회영성의 지표들을 기준으로 네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첫째 시기는 광복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한반도의 사회 성격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칠 사건들이 대부분 일어났다. 그러나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맹아 단계였을 뿐 의미 있는 발전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둘째 시기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87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교회는 민족사의 여러 계기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영성도 괄목할만하게 성장하였다. 또한 이전 시기에 싹텄던 교회의 사회 문제에 대한 자각도 더 깊어졌다.

 

셋째 시기는 1988년부터 2007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정치 영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고, 시민사회도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이전 시기에 축적된 경험들이 사회복지와 사회사목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사회영성의 형태들도 더 다양해지고, 실현 분야도 더 넓어졌다.

 

마지막 시기는 2008년 이후에서 현재까지이다. 교회는 환경 정의, 정의 문제에 두 번째 시기처럼 활발하게 참여하는 중이다.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역사상 가장 다양한 형태들이 등장하였고, 평화를 매개로 국제 영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히는 중이다.

 

종합해보면, 사회영성이 성장했을 때 교회는 역사 안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때 복음의 본질도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에 더 깊이 뿌리내렸다. 그만큼 사회영성은 교회가 인류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하는 정도를 잴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다.

 

 

1. 머리말

 

그리스도교 영성에 사회영성1)이 따로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 영성에 이미 사회적 · 역사적 차원이 들어있는 까닭이다.2) 도날 도어는 이 맥락에서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 8)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3), 이 구절에서 주님이 요구하신 세 가지 요청을 균형 있게 통합하는 것을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정의하였다.4) 또한 그는 “우리의 영성은 ‘종교 · 신앙적인’, ‘도덕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세 차원 중에서 단지 하나나 둘이 아니라, 모두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5)면서, 사회적 차원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필수 요소임을 분명히 하였다.

 

프랜시스 미헌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차원을 ‘인간 내면’, ‘인간 상호간’ 그리고 ‘구조’(structure) 등 세 차원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특히 구조 차원을 가장 크게 강조하였다. 구조가 ‘인간 상호 간’ 차원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고, 현대 사회 대부분의 영역들(경제, 교육, 노동, 문화, 복지, 정치 등)이 구조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6)

 

미헌은 사회영성이 교회 안에서 내면을 강조하는 전통 영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강조돼 왔고, 관심도 덜 받아왔다는 문제의식하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회영성은 “구조적 차원,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가치가 드러나거나 실현되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신앙 혹은 이 신앙에서 비롯된 일관된 삶의 자세”7)라고 정의하였다.

 

그리스도교 구원은 본래 “개인적 · 사회적 · 정신적 · 육체적 · 역사적 · 초월적인 인간의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8) 당연히 이를 실현하는 방편인 영성도 이 다양한 차원을 포괄한다.9) 따라서 사회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을 구성하는 여러 차원 가운데 하나일 뿐 새로 정의를 내려야 할 개념은 아니다. 다만 교회사 안에서 사회영성이 과도하다 싶을 만큼 덜 강조되어 왔고, 무엇보다 현 단계 한국 교회에서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측면인 까닭에 전통적인 내면주의(intimist) 영성과 균형을 맞춘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10)

 

교회는 항상 민족사에 참여한다. 그런데 교회가 현실에 대해 침묵하면 기득권 옹호 행위로, 참여하면 특정 정파와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는 정치 행위로 평가받는다. 교회가 특정 시공간에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한국 교회도 전래 이후부터 민족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고, 이에 대하여 교회 안팎으로부터 긍정 · 부정 평가를 동시에 받아왔다.11)

 

한국 교회사를 살펴보면 한국 교회는 순탄한 시기보다 시련과 고난의 역사를 더 오래 거쳐 왔다. 전래 초기에는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숭고함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로는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나약한 모습도 간혹 보여주었다. 이 후자의 모습은 한국 천주교회가 지난 2000년 대희년을 맞으며 발표한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에 잘 나타나 있다.12) 이 문건은 전체 일곱 개의 ‘반성 또는 잘못에 대한 고백’ 항목 가운데 1~3항에서 한국 교회가 민족사에서 저지른 과오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문건에서 한국 주교들은 “우리는 참회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선의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끝맺으며, 이 문건을 작성할 때 사용하였던 성찰 기준을 간접적으로 제시하였다. 대략 이 기준은 교회가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노력 등이다.

 

그런데 성찰 기준이 될 수 있는 이러한 요소들과 여기에 이르기 위한 윤리 지침들을 교회 안에서는 사회 교리에서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민족사에 함께한다’는 말을 가톨릭 사회 교리의 주요 원리와 가치가 한국 사회에 실현되도록 교회가 노력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에 교회가 민족사에 ‘함께 해왔다’ 또는 ‘함께한다’ 함은 교회가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보다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또는 ‘노력하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옮길 수 있다.

 

이 글은 광복에서부터 현재까지 한국 교회가 민족사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을 사회영성의 관점에서 성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사회영성 실현 대상을 사회 교리에서 교회가 윤리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가르친 영역들, 이를테면 인권, 사회정의, 경제(분배 정의), 문화, 민생, 복지, 생명, 통일, 평화, 환경 등을 선정하였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 대상 영역들이 전통적 의미의 사회복지,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빈민 운동과 같이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 인권을 기준으로 참여한 계층별 민생 운동, 불의한 정치권력과 그들의 민주주의 질서 교란 행위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민권 · 인권 운동, 그리고 사회정의 실현 운동을, 인간 생명과 가정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생명 운동,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민족의 통일을 위한 통일 운동, 평화 운동, 1980년대 후반부터 새로이 대두된 환경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환경 운동,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문화 영역에 대한 참여 등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대체로 사회 교리의 관심 영역과 일치한다.

 

두 번째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사건들을 특정할 때 부득이 이 분야 연구자들의 기준을 따르고자 했다. 사회영성 실현 주체는 제도적 차원의 교회(예 - 성직자 또는 교회 공인 단체의 활동)에 국한하지 않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 규정한 모든 신원을 포괄하는 ‘하느님 백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세 번째 광복 이후의 역사 서술에 대하여는 이미 이 분야 연구자들이 기본 사실들을 정리한 바 있기 때문에 개관하는 수준에 머물고, 대신 각 시기마다 사회영성이 어떻게 심화 · 발전되는지 평가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13)

 

아쉽게도 새로운 주제에 대한 탐색적 연구이다 보니 글 전개 과정에서 논리적 비약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에 사회영성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이를 심화 ·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2. 사회영성의 식별 기준

 

사회영성을 사회(세상) 영역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자세라 정의하였다. 사회영성을 이렇게 정의하면 교회의 실천 과정 또는 그 결과를 평가하는 지표로는 신자 개인 또는 교회가 신앙을 사회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들에 기준을 제공하는 사회 교리가 적합하다. 이에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에서 간행한 《간추린 사회 교리》에서 제시하는 원리와 가치들을 식별 지표로 사용할 것이다.14)

 

이 문헌에서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는 대략 다섯 가지로 추릴 수 있는 원리들과 네 가지 근본 가치들을 제시하고 있다.15) 대체로 이 원리와 가치들을 기준으로 교회의 사회적 실천이 사회영성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이 영성을 어느 정도 실현하는지 그 정도를 평가해볼 수 있다.16)

 

1) 가톨릭 사회 교리의 중심 원리

 

(1) 인간 존엄성의 존중 원리. 교회는 인간을 “되풀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 침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간추린 사회 교리》 131항), 그리고 “사회의 궁극적 목적”(《간추린 사회 교리》 132항)으로 본다. 인간이 초월적 근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에 근거하여 인간의 “초월적 존엄성에 대한 존중”(《간추린 사회 교리》 132항)이 모든 사회생활의 기초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2) 보조성의 원리. 교회는 모든 책임과 결정이 지역 공동체들과 제도들 안에서 각 개인이 주도권을 쥐게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논지의 보조성의 원리를 가르친다.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사회에 맡길 수 없는 것처럼, 한층 더 작은 하위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단으로 옮기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해악이며, 올바를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간추린 사회 교리》 186항 ; <사십 주년> 49항).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는 보조성의 원리에 속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를 ‘참여’로 본다. 그리스도인이 노동, 경제 활동, 정보와 문화, 무엇보다 정치 생활 분야 등에 책임 있게 참여할 때 사회질서의 안정과 민주주의를 영속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17)

 

(3) 연대성의 원리. 교회는 신자와 교회 간의 일상적 연대와 세계적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인간이 한 인류가족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이기에 국가의 경계를 초월해 모든 사람의 권리와 발전을 증진시킬 상호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특히 부유한 국가들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책임을 필수로 본다.18)

 

(4) 공동선의 원리. 공동선은 경제, 정치, 문화와 같은 사회적 삶의 조건의 총체를 가리키는데, 이 조건들은 모든 인간이 기꺼이 그리고 충분히 자신의 인간성의 성취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 전체를 아우른다. 따라서 사회 교리는 개인의 권리를 항시 공동선의 증진 여부라는 맥락에서 판단한다. 이 또한 개인이나 일국 차원이 아니라 국제 영역으로 확대 적용해야 하는 원리이다.19)

 

(5) 재화의 보편적 목적.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 욕구를 충족하고 기본 생활을 영위할 때 재화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땅을 공평하게 허락하시어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셨다.20)

 

2) 근본 가치

 

이 근본 가치에는 진리, 자유, 정의, 사랑 등 네 가지가 포함된다. 이 가치들은 공권력, 이른바 국가권력이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척도 역할을 한다.21) 그리스도인은 이 가치들을 기준으로 현세 질서에 개입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1) 진리. 진리는 “인간의 행실과 말이 올바르다는 뜻…진실 또는 솔직함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행동으로 참된 것을 보여주고, 자신의 말로써 참된 것을 드러내며, 이중성과 위선을 피하게 하는 덕”22)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진리가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두 드러났으므로’, ‘예수께서도 진리’라고 믿는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466항).

 

교회는 “모든 사람은 언제나 진리를 추구하고 존중하며 책임 있게 증언하여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간추린 사회 교리》 198항)고 하면서, 진리를 증거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은 물론 모든 인간의 의무임을 강조한다. 이 주장은 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이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2) 자유. “자유는 이성과 의지에 바탕을 둔,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가톨릭 교회 교리서》 1731항). 자유는 ‘인간이 지닌 최상의 존엄성의 표지’(<사목헌장> 17항 참조)이자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가치이다. 자유는 남용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23)

 

(3) 정의. 전통적인 의미의 정의는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07항)이다. 주관적인 기준의 정의가 ‘다른 사람을 한 인격체로 인정하려는 의지에 바탕을 둔 행위’라면, 객관적인 기준의 정의는 ‘상호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 적용되는 확고한 도덕 기준’(《간추린 사회 교리》 201항)이다.

 

현대에는 교환 정의, 분배 정의, 법적 정의, 그리고 사회정의 가운데 특히 사회정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회정의는 “사회 · 정치 · 경제적 측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의의 구조적 차원과 그 해결책과 관계”(《간추린 사회 교리》 201항)가 있기 때문이다.

 

(4) 사랑. 사랑은 “본질상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8항)이다. 이 사랑에서 앞의 세 가지 가치들이 흘러나온다. 사랑은 정의를 전제로 하면서도 정의를 초월한다. 따라서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간추린 사회 교리》 208항)이어야 한다.

 

이상의 사회 교리 원리들과 가치들이 평가 지표가 되겠다. 아직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앞의 주교회의 반성 문건보다는 더 상세한 식별 기준이다.24) 이 지표를 활용하여 이러한 측면들이 많이 드러날수록 사회영성이 심화 · 발전된 것으로 평가하겠다.

 

 

3. 시기 구분

 

광복 후 한국 교회의 민족사 참여는 교회가 대응한 방식의 성격25), 사회영성의 구성 지표들을 기준으로 할 때 대략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광복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광복, 미군정기,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분단, 한국 전쟁, 전후 복구, 자유당 독재, 4.19 학생 혁명, 5.16 군사 쿠데타 등 이후 한반도의 사회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줄 주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러나 교회의 대응 측면에서 보면 소극적인 사회복지, 정치세력화, 그리고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모습이 지배적이었다.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교회가 공산주의에 대하여 선악(善惡) 이분법, 십자군 논리를 따름으로써 당대에 특히 단독 정부를 출범시킨 남한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심지어 전쟁 중일 때와 전쟁 끝 무렵에는 교회가 다른 사회 세력보다 더 호전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사회영성과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 후반에 가톨릭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고, 세계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신의 선교’(missio dei) 신학, 제3세계 신학, 해방신학 등과 같은 상황신학이 등장하면서 교회의 사회참여 분위기도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사회사업은 사회복지로 성격이 전환되면서 구조적 접근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영성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1960년대 후반에서 1987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민족사의 여러 계기에 교회가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던 때이다. 역사적으로는 개발독재, 유신 체제, 10.26, 군부 쿠데타, 광주 민중 항쟁, 군부독재 등과 같이 교회의 참여가 요청되는 사건들이 이어졌다. 교회는 이 요구에 부응하며, 이전 시기와 다르게 국가권력과 갈등 관계를 유지하면서 반유신 체제 저항 활동, 인권 수호 운동, 민생 운동에 투신하였다.26)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이 시기에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게 된다. 이 시기에는 이미 이전 시대에 싹트기 시작했던 교회의 사회 문제에 대한 자각이 더 구체화되었고, 이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시도들도 활발해졌다. 전 교회적인 사회참여 흐름이 신자들의 사회의식을 고조시킴으로써 사회영성도 성장할 수 있었다.27) 게다가 교회의 실천에 사회적 호응까지 따르면서 정당성도 높았다.

 

셋째, 1988년부터 2007년까지이다.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정치 영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고, 시민사회도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경제, 문화 영역에서는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국 경제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편입이 가속화되면서 10년 사이에 구제금융 사태와 금융 위기를 연이어 겪었다. 이 과정에서 시장(자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자본과 시민사회의 갈등 구도가 형성되었다.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이전 시기에 축적된 경험들이 사회복지와 사회사목 영역으로 계승 · 발전되었다.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교회에 참여를 요구하는 빈도가 줄었고, 이로 인해 교회의 사회적 관심이 제도화된 교회 영역을 넘어 뻗어 나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사회영성은 형태가 더 다양해지고, 분야도 더 넓어졌다.

 

마지막으로, 2008년 이후에서 현재까지이다. 집권 여당이 그동안 쌓아온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과를 무시하고,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빈번해졌다. 소득의 양극화도 심해져 계층 고착화가 우려되는 상황까지 전개되었다. 또한 환경 문제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서 여러 대립되는 이슈들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에 교회는 상층부에서부터 주요 국가 의제들에 대하여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현재도 여러 사안에서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구성 요소가 가장 다양하고 평화를 통해 국제적인 영역으로까지 관심의 대상이 넓어졌다. 이전 시기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새로운 차원과 영역으로 넓어지는 시기로 평가된다.

 

이렇게 네 시기로 나누어 시기별 주요 사건과 교회의 대응을 개관하고, 이에 따라 사회영성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4. 교회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광복 후에서 현재까지를 네 시기로 나누었는데, 이 장에서는 시기별로 교회의 참여사를 개관하고, 이어 각 시기에 사회영성이 어떤 성격을 띠었고 또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살펴본다.

 

1) 광복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1) 교회의 민족사 참여

 

이 시기 교회의 민족사 참여는 광복과 함께 형성된 미군정과의 우호적 협력의 시기, 단독 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시기, 전쟁 시기, 개신교와 경쟁하면서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는 시기,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시기 등으로 나뉜다.

 

먼저, 첫 번째 시기에는 교회가 미군의 남한 진주와 함께 원조를 제공하며 간접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 천주교회의 직접 지원에 힘입어 미군정과 밀월 관계를 형성하였다. 미군정의 종교 정책이 그리스도교에 일방적으로 우호적이고 심지어 특혜에 가까웠던 터라 교회로서는 이를 거부하기 쉽지 않았다. 마침 3 · 8선 이북을 소련이 점령하고 있었고 전 교회적으로도 공산주의와 대결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그리스도교 정권인 미군정과 교회와의 유착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28)

 

미군정은 남한의 그리스도인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았음에도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공영 방송에서 그리스도교 선교를 허용하였으며, 적산(敵産)을 그리스도교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배분하는 혜택을 제공하였다.29)이로 인해 형성된 교회와 미군정과의 우호적 관계는 미군정이 후원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협조로 이어졌다. 교회가 이승만과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30)

 

교회는 이러한 우호적 환경 덕에 개신교에 대한 경쟁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세력화에도 나설 수 있었다. 1946년 2월에 있었던 민주의원 구성, 같은 해 10월에 실시된 과도 입법의원 선거에 참여한 경우가 일례이다. 교회는 이때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에 천주교 대표로 장면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31)

 

두 번째, 이 시기에 교회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적극 관여하게 된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 정기총회의 결의로 남한만의 단정 수립이 확정되기 전부터 교회는 남한만의 단정 수립을 주장하는 우익 진영을 지지하였다. 교회는 《경향신문》을 통해 이 입장을 적극 지원하였다. 일례로, 《가톨릭청년》은 유엔 결의가 있고 난 뒤 이를 ‘5천 년 역사의 경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32) 이후에도 교회는 단독 정부 수립을 고집하며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민족주의 진영을 비난하였다.33)

 

남한 단독으로 총선을 치르게 되었을 때는 신자들에게 지방 선거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신자들의 출마와 이들의 당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종용하였다.34) 이 선거를 위해 서울교구에서는 유엔 조선위원단 입국 직후인 1948년 1월 11일 서울교구 각 본당 유지인 교우들로 ‘천주교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어 개별 본당 차원에서도 ‘본당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35) 천주교는 이미 노기남 주교 주도로 1945년 9월 천주교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한민당(한국 민주당)에 발기인으로, 9월 16일 한민당 창당 때는 40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36)

 

세 번째인 전쟁 시기에는 천주교회가 전쟁을 ‘유사 종교로 간주된 공산주의와의 성전 내지 십자군 전쟁’으로 해석하였다.37) 전쟁을 반대하거나 전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교회가 전쟁 피해 당사자가 되면서부터는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공격 강도를 더 높였다.

 

이 시기에 교회가 보였던 반공 활동의 예를 들어본다. 1950년 8월 부산 범일동 성당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서울교구와 이북 교구 출신 10여 명의 신부들이 젊은 신부, 신학생, 청년 신자 3,000명을 규합하여 천주교 청년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군에서 무기를 지급할 수 없어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전쟁 참여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1951년 중반부터 시작된 정전 협상 때는 이를 ‘원수와의 타협’으로 간주하여 시종일관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전쟁의 ‘평화적인’ 종결을 지속적으로 반대한 것이다.38) “극단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 방식의 문제 해결책이 안고 있는 위험성들과 약점들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전쟁 중에는 물론이고 전쟁 후에도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전쟁에 대한 한국 교회의 태도는 ‘맹목적’이었다.”39)

 

네 번째 시기에 천주교는 이승만과 갈라지게 되면서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시도하여 개신교와 경쟁에 나선다. 실제로 1956년 5.15 선거(3대 대통령 및 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총력을 경주, 마침내 당선시켰다. 1958년 총선에서는 천주교 신자 의원 9명, 예비자 4명을 당선시켰다.40) 이후 개신교가 이승만에 밀착하여 정치 세력화 의도를 노골화하자 위협을 느낀 교회는 장면과 민주당에 밀착하여 1960년 정 · 부통령 선거에서 개신교와 정면 대결을 벌였다.41)

 

마지막 시기인 5.16 군사 쿠데타 이후 1960년대 중후반까지는 군부의 정치 보복을 우려해 쿠데타를 승인하는 입장에 섰다. 5.16 쿠데타로 출발한 박정희 정권이 이승만 정권의 그리스도교와의 정교유착 관계를 탈피, 호의적 종교 집단에는 자유방임적 자유를 허용하고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종교 집단에는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이중적인 종교 정책을 폈던 탓이다. 교회는 장면과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 경험이 탄압의 빌미가 될 것을 우려해 군사 쿠데타 주역들을 승인하였다.42)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전쟁 후에 교회가 해외 원조를 기반으로 교육, 의료, 아동복지, 노인복지 영역에 기여하였다. 생존과 전후 복구가 시급한 시기에 교회는 교회의 재건 사업에 치중하면서도 가난하고 주변화된 이웃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우선 교육복지 측면에서는 해외 원조를 이용하여 간호학교, 기술학교 등을 설립해 가난한 이들의 자립을 도모하였다.43) 아울러 고등 교육, 간호, 약제, 양재, 방직 등 다양한 분야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가난한 이들의 장기적 자립과 사회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44)

 

의료복지 측면에서는 교회가 전쟁이 끝난 뒤 “1959년까지 병원 10개소, 의원 4개소, 의과대학과 간호학교를 설립하여 의료인 양성 사업을, 의료 사업의 연장에서 구라(救癩) 사업도 시작하였다. 1960년대는 외원과 국제 수도회의 파견 관구 혹은 총원의 지원을 받아 수도회 자체에서 병원을 설립하는 시대였는데, 15개의 병 · 의원을 수도회가 설립 · 운영하였다. 특히 수도회는 의료 사업을 농촌과 소도시 지역에 집중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을 지향하였다.”45)

 

아동복지 측면에서는 해방 후에 수녀원들이 보육원을 설립 운영하는 것으로 대처하였다. 전쟁 중과 전쟁 후에는 전쟁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아원과 보육원을 다수 설립하여 아이들을 돌보았다.46) 노인복지 측면에서는 아동복지보다는 적었지만, 역시 수녀원을 중심으로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돌보았다.47)

 

교회는 같은 해외 원조를 받았던 개신교와 달리 원조의 많은 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다. 교회 재건도 시급하였지만 이에 필요한 재원들을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우선 사용함으로써 사회영성의 태동에 기여하였다.

 

(2) 사회영성

 

이 시기의 사회영성은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이분법, 중세기의 타계(他界)적 영성에 가까웠다. 사회 교리에서 말하는 내면주의가 지배하는 시기였다. 이 맥락에서 교회가 차용한 영성은 성모 신심과 순교영성이었다. 이 두 영성은 사회적 격변기에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당시 교회가 열성적으로 수행한 반공 선전과 활동에 비춰보면 공산주의와의 성전(聖戰)에서 교회가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설사 지더라도 순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소지가 더 크다.

 

타계적 영성은 영성의 사회적 차원을 간과한 채, 교회가 개인 구원에만 치중하게 만들었다는 면에서 내릴 수 있는 평가이다. 그러나 이 타계적 영성은 역설적으로 적극적인 현세 영성이기도 하였다. 정교분리 원칙을 위배하고 집권 세력과 밀착 관계를 형성한 것이 한 가지 예이다. 정치세력화를 추구한 경우가 두 번째 예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예에 대하여는 다른 해석이 있다. 일례로 김녕은, 장면의 정치 참여를 가톨릭 신앙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려 한 시도로 이해한다. 장면이 가톨릭에 기반을 둔 종교적 이상을 정치 영역에서 실현하려 노력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장면에게 있어서 가톨릭 신앙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으며 늘 본인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과 그가 맡게 된 정치를 하나로 일치시키려 했다.”48)

 

조광도 장면과 그의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조광은 장면 정권이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언급의 일부로만 취급되는 것을 지양하고, “제2공화국의 역사는 해방 이후 줄곧 이승만의 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그침 없이 성숙시켜 가고 있던 고상한 이념들의 결론이었다”49)는 점을 새롭게 해석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지적들을 고려하면 장면의 정치 참여는 교회적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광복 후 한동안 교회가 미군정, 이승만 정권과 밀착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회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정도를 지나친 행위들로 평가할 수 있다.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대와 공격, 심지어 전쟁까지 불사하려한 측면은 인간 존엄성 존중 원리의 위반임은 물론 정의, 그리고 정의의 실현인 평화에 대한 부족한 이해의 사례이다. 당시 세계 교회 전체가 반공 노선에 서 있었고, 분단 후 북한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의 소식을 듣던 중이라 감정에 치우쳤던 탓일 터이다. 그러나 강인철이 앞에서 지적한 바처럼 전쟁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인간의 존엄성, 평화 등에 대한 숙고가 전쟁 중에도 그리고 전쟁 후에도 없었던 것은 반성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전체 시기에 걸쳐 교회는 역사의식이 부족하였다. 자신의 결정과 행위가 민족사에 어떤 영향을 줄지, 또는 주어야 하는지 자의식이 부족하였다. 이로 인해 천주교는 이후에 전개되는 친미 반공체제 확립에 큰 기여를 하게 되고, 그만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더디게 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원조 물자와 비용을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우선 사용하고, 이를 통해 장기적 사회 발전의 기초를 놓음으로써 사회영성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시도를 시혜적 자선 사업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당대의 이웃 종교와 정부 활동에 비교해보면 방법상으로 가장 근대적이었고 투자 액수도 가장 많았으며, 그리고 태도 면에서도 가장 헌신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시기는 교회가 사회복지에서 보인 헌신성이 아니었다면 자칫 사회영성의 암흑기가 될 수 있었다.

 

2) 1960년대 후반에서 1987년까지

 

(1) 교회의 민족사 참여

 

이 시기부터 천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 개발독재의 모순 분출, 정권의 탄압에서 교회를 수호할 목적으로 체제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50) 1962년 교계제도 설정으로 한국인 고위 성직자들이 국내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조직상의 계기가 마련된 데다, 곧이어 끝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러한 참여를 뒷받침할 교리-신학적 자원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현대 사회 안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한층 진취적인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비판적 정치 참여를 고무하였다.51)

 

이 시기에는 민생 문제에 대하여도 신자들을 중심으로 참여가 시작된다. 1960년대 초 노동 분야에서 시작한 민생 운동은 농민, 도시빈민으로 이어졌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70년대 초에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등장 후 본격적으로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였다.

 

가장 먼저 참여를 시작한 분야는 민생이었다. 민생 운동은 노동 쪽부터 참여가 시작되었다. 이 분야에 대한 참여는 천주교 노동청년회 결성과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천주교 노동청년회는 1958년에 시작하여 1960년대에 수원교구 선면공업주식회사 노조 결성, 서울대교구 드레스미싱 노조 결성, 전주교구 제지공업 임금 인상 사건 등에 관여했다.52)

 

교회 전체로는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에서 JOC 회원이 주도적으로 노조를 결성하다 탄압받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 노동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이후 JOC 회원들이 생산직 노동자들 중심으로 구성되면서부터 활동의 중심은 임금, 근로 조건, 인격적 대우 등 노동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53)

 

천주교 노동 운동은 농민 운동이 출발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천주교 농민회는 처음 한국 천주교 노동청년회 농촌청년부로 시작하여 1966년 10월 17일에 ‘한국천주교청년회’를 창립하였다. 이때는 천주교 농촌청년이 중심이 되어 착한 사람, 착한 생활, 모범 농사 등을 통한 마을의 환경변화를 추구했고 주로 종교, 기술, 생활 교육을 통한 계몽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1971년 11월 조직강화위원회에서 ‘농민 권익 옹호, 사회정의 실현’을 활동 목표로 설정했다. 이것이 천주교 농민 운동의 첫걸음이 되었고, 천주교 농민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천주교농민회로 거듭나면서 1974년 민간단체로서 최초의 ‘농지 임차 관계 조사’를 통해 토지 문제를 제기했고, 1975년부터 ‘쌀 생산비 조사’를 통한 가격 보장 활동에 나섰다. 현장 또는 전국 단위로 외국 곡물수입 반대, 강제농정 시정, 부당농지세 시정, 농협민주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농협이 고구마 계약수매를 이행하지 않아 발단이 된 ‘함평고구마사건’(1976~1978)에서도 농민은 2년 만에 승리하였고, 이를 계기로 농협의 고구마 수매, 80억 원 부정을 폭로하였다.54) 또한 감자농사 폐농으로 발단된 ‘안동농민회 사건’(세칭 오원춘 사건)은 천주교 농민 운동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빈민 운동도 시작되었다. 도시빈민들이 겪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교회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1968년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내 도시선교위원회에서 하는 실무자 교육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당시에는 천주교 노동청년회 회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이때 조직가가 주민들과 함께 주민조직을 만들고 그들이 스스로의 조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알린스키의 지역 사회 조직 방식을 검토하였다. 그 후에는 ‘인성회’ 안에 있는 ‘인간개발사무국’을 중심으로 빈민 지역에서 함께 살고 있는 이들 간에 유대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빈민 지역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의 인간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려 노력하였다.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 설립의 바탕이 된 복음자리 공동체의 형성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77년 170세대가 복음자리로 이주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의 보금자리를 건축하면서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들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80년대 전면적인 철거의 시발점이었던 목동 재개발 과정에서 복음자리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목동 지역민이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운영함으로써 자신들의 경험을 사회사목으로 확장해나갔다.55)

 

두 번째로 유신 체제 반대와 인권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시기별로 주체에서 차이가 나타났다. 1970년대에는 정권에 대해 비교적 자율성을 갖는 개신교, 천주교와 같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종교들이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자율적 영역에 속하는 사제들이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형태상으로는 예언자적이고, 내용적으로는 고발의 성격이 강하였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1969년에 주교회의 상설 기구로 설치되었다.56) 1975년 12월 10일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직속 기구로 재발족하고, 명칭도 한국정의평화위원회에서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로 변경하였다.57)

 

한국정의평화위원회는 1976년 3월 1일 명동 성당 3.1절 미사에서 ‘민주 구국선언’을 발표하였고, 1977년에는 한국의 인권 문제, 미군 철수 문제에 관한 메시지를 각국 정평위에 전달하였다. 1978년에는 교권 수호를 위한 기도회와 성명서 발표 등의 활동을 하였고, 1980년까지는 주요 사건에 대한 성명서 발표 및 인권 사건들에 대한 대책 활동도 병행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구속자 석방, 정평위 백서 발간, 각종 시국사건에 대한 성명서와 입장 발표를 이어갔다. 1982년부터는 인권 주일을 대림 제2주일로 지정, 주교회의 명의로 담화문 발표를 시작하였다. 1987년까지는 이전 시기의 연장에서 성명서 발표, 주요 사건에 대한 개입 활동을 하였다.58)

 

세 번째는, 1980년대에 시작된 통일 문제에 대한 참여이다.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은 1982년 12월 10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회북한선교부가 출범하면서 시작되었다. 북한선교부는 1984년 11월 주교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되었고, 1985년 10월 13일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 결정에 따라 북한선교위원회로 개칭하였다.59) 이때까지는 주로 조직, 문서 활동이 중심이었다.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앞에서 전개된 교회의 사회참여와 같은 맥락 혹은 분야에서 활동이 이루어졌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교회의 사회복지 영역도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노동자를 위한 복지 사업이다. 수원교구는 1963년 한국 교회 최초로 안양 근로자회관을 설립하였고, 1966년 6월에는 서강대학교에서 부설로 ‘산업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60) 여자 수도회들을 중심으로 1960년대 말부터 여대생기숙 사업, 버스 안내양들을 위한 교양 교육 사업, 숙박시설 제공 사업, 여성 노동자 교육 사업도 시작되었다.

 

청소년 복지는 1950년대에 고아원, 보육 사업의 형태로 이미 전개되고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는 1980년대에 이르러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주로 아동복지를 전문으로 하는 수도회들이 담당하였다. 재소자 복지는 1970년 4월 서울대교구 교도소 후원회(교도사목회)로 시작되어 현재와 같은 교도사목으로 이어졌다.61)

 

현대 사회복지의 개념으로는 이 시기에 교회의 민생 문제 관여, 정의구현 활동, 인권 운동 등도 사회복지에 포함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교회의 사회참여는 전체가 사회복지 활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사회영성

 

이 시기에는 제3세계의 등장과 함께 종교 영역에서도 독립, 해방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이 움직임의 영향으로 귀납적인 방법에 기초한 상황신학들이 대륙마다 등장하였다. 유럽에서는 정치신학과 ‘하느님의 선교’신학, 중남미에서는 해방신학, 북미에서는 흑인신학, 아시아에서는 토착화 신학이 활발하였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개신교 신학자들 중심으로 민중신학이 탄생하였다. 이들 상황신학은 해당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실천을 해석하고 이를 추동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신학의 현장도 아카데미에서 생생한 삶이 이어지는 현장, 특히 가난한 이들의 삶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이 신학들은 공통적으로 그동안 소홀하였던 그리스도교 영성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을 피억압자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그에 따라 신론과 그리스도론도 재정립하였다. 심지어 사회과학을 신학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특히 해방신학은 역사적 유물론을 분석방법론으로 활용할 정도였다.62) 해방 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하여도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신앙의 보편주의를 넘어 신앙과 신학의 민족화에도 주력하였다. 이 시기에 민족화는 토착화의 한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흐름들은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물에서 마신다”63)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에 이르는 방편은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이다.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 빈곤을 경험하는 이들에서부터 온갖 차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에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존재한다. 이때 영성은 스스로 가난해짐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처지가 되고 또 그들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는 자세로 이해된다. 이 과정에서 고통, 순교가 따르기도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것은… 생명권을 긍정하기 위하여 벌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 노력에서 힘을 얻는다.”64)

 

예수의 자기 비움(kenosis)에서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가 가능해지고, 이 동일시가 가난한 이들과 운명을 같이하는 힘이 되며, 함께 투신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이러한 힘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못자리가 된다. 

 

그리고 이 체험이 깊어질수록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지고 궁극에는 그분과 같은 운명이 된다. 가난한 이들에서 출발하여 가난한 그리스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이 사회영성의 기초가 된다.

 

이 시기에는 정의가 두 번째로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사제단의 이름에 ‘정의 구현’이 들어간 점이나, 5공화국이 역설적으로 ‘정의사회 구현’을 강조한 사실은 당시의 시대정신이 ‘정의’였음을 보여준다. 이 정의에는 분배 정의, 사회정의가 모두 포함된다. 당연히 이 정의는 인간의 기본권 보장과 연결돼 있다. 인간에 가장 기본적인 존엄을 인정받을 수 없었던 시절이니 사회정의의 요구를 인간 존엄성 실현에 시금석으로 삼을 만하였다.

 

세 번째는 연대성이었다. 실천 과정에서 개신교와의 교회 일치는 물론 기층 민중들과의 넓은 유대가 형성되었다. 교회의 경계가 넓어진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세상 전체로 넓어졌다. 교회의 이러한 자기 비움은 교회가 국민으로부터 도덕적 권위를 얻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무엇보다 이 시기 교회의 민족사 참여가 사회영성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측면은 다수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이후 다소 제도화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기억은 교회 안에서 사회사목이 확장되는 모습으로,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이어진다.65) 그리고 최근 시국선언에 다수의 성직자 · 수도자가 참여하는 모습도 넓게 보면 이 기억의 재생이라 할 수 있다.66)

 

이처럼 이 시기에는 이전 시기에 맹아를 볼 수 있었던 단계에서 사회영성이 크게 성장하고 확장되는 계기를 맞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하였던 교회상도 이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를 사회영성의 성장기로 부를 수 있다.

 

3) 1988년부터 2007년까지

 

(1) 교회의 민족사 참여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고, 형식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뒤로는 이전 시대의 사회적 역동이 크게 감소하였다. 6.29 이후에도 국가와의 갈등은 계속되지만, 5공화국 때나 1970년대에 비교할 때 그 빈도는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갈등의 강도도 상당히 약화돼 이 시기에는 교회와 국가 간 갈등 사례에서 “1989년의 임수경 양 · 문규현 신부 방북 사건과 1995년 한국통신 노조 진압을 위해 김영삼 정부가 명동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한 일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67)일 정도였다.

 

시민사회가 성장하였고, 이 성장은 자연스레 천주교의 사회적 관심을 교회 안으로 향하게 하였다.68) 이로 인해 천주교의 사회 운동은 대부분 체제내화되고,69) 이 틀 안에서 사회사목과 사회복지를 양 날개로 하여 이전 시대의 관심을 지속해나가게 된다.

 

1990년대 들어 1980년대까지 뚜렷하였던 정치 영역에서 전개된 국가와의 갈등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대신 생명 문제가 국가와 갈등의 초점이 되었다.70) 모자보건법71), 생명공학 분야에서 인간 복제 및 인간 배아 연구의 제한72) 등 교회의 생명윤리와 충돌하는 쟁점들에 대하여 직접 정치적 행동을 한 경우 등이 그 예이다.

 

이 양상은 정교분리를 실천하고, 종교다원주의가 실현된 나라에서는 어느 종교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자신의 문제를 공적인 의제로 삼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사건이기도 하였다.73) 이 현상은 종교가 공적 영역으로부터 퇴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읽혔다.74) 따라서 이 시기에 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대응하였던 정치 현안들이 주로 기존의 인권, 민주화와 관련된 문제에서 가톨릭 생명윤리에 위배되는 현안으로 변화해가는 것을 이러한 흐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론적으로 한국은 정교분리를 완전히 실천하는 나라이다. 실제 이 시기에 교회가 국가의 사회정치적 의제를 거론하는 경우는 이전 시대에 비하여 크게 줄었다.75) 반면 모성보호를 이유로 한 낙태 관련 법안, 생명 존엄성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입법 시도에 대하여는 반대를 분명히 하고, 직접 정치적 행동에도 나서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 또한 정치적 행동에 속하지만 이전 시대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주교회의 산하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대까지 주요 쟁점으로 삼았던 민주화와 인권 관련 의제들을 199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 다루었는데 이전 시대에 비하여 빈도가 줄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매년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키며 메시지를 발표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며, 산하에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와 환경소위원회를 신설하고 이 두 기구를 통해 사형 폐지 운동과 환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한 주요 국가적 사안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세미나를 개최하여 교회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76)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이 시기에 자립에 성공하고 마침내 해외 원조를 시작하는 단계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였다. 사회복지를 매개로 국가와의 제휴도 크게 늘어났다.77) 국가와의 제휴 범위와 양은 천주교 교세의 인구수 비중을 크게 추월하는 것으로 한국 종교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78) 정부 지원에 힘입어 천주교의 사회복지 참여 분야, 시설 · 단체 수, 재원 규모는 같은 시기에 여러 배 성장하였다.79)

 

해외 원조는 한국 교회의 공식 해외 원조 실무를 담당하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를 중심으로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위원회는 로마에 본부를 둔 국제 카리타스를 통하여 아시아 외 지역에 긴급구호 사업을 지원하였고, 아시아 지역 개발 사업은 아시아인간발전협력체를 통하여 지원하였다.80)

 

사회사목도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성장하였는데, 국가사회복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장 먼저 다가가 이를 정착시켜 사회복지 영역으로 이전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일례로, 이 시기가 시작되는 1988년 교세통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특수 사목(거의 대부분 사회사목 영역)에 종사하는 사제가 이 시기가 마무리되는 2007년에 721명으로, 본당 사목자 수 대비 37.3%를 기록한 경우를 들 수 있다.81) 이는 사제 성소의 급격한 증가, 그에 따르지 못하는 본당 설립을 일차적 원인으로 볼 수 있지만, 교회의 민족사 참여 의지를 나타내는 지표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이 시기의 사회복지 영역은 국가와 제휴하게 되면서 본래의 사회영성 측면이 약화되었다. 대부분의 활동 주체가 본당 신자에서 전문 직업인으로 이전되었고, 재원도 상당 부분을 국가가 책임지게 되면서 신자와 본당이 수동적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체제내화되긴 했어도 사회사목 영역이 사회복지보다 사회영성의 성장에 더 크게 기여하였다.

 

(2) 사회영성

 

이 시기에도 교회의 민족사 참여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다만 그 빈도와 강도는 이전 시대에 비하여 현저하게 줄었고 다소 약해졌다. 이 때문에 이전 시대에는 ‘가난한 이들(혹은 주변화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이 사회영성의 핵심이었는데, 이때부터는 ‘보조성’과 ‘연대성’이 사회영성의 중심 요소가 되었다.

 

우선 보조성은 사회복지 영역에서 국가와의 제휴 범위가 늘어나면서 과거와 같이 갈등 전략만을 고수할 수 없게 되면서 중요해졌다. 교회와 국가가 정교분리에 가깝게 각자의 고유 역할을 존중하면서도 협력을 도모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제휴와 견제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하는 ‘보조성의 원리’가 사회영성의 주요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연대성은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축이 제 몫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중요해졌다. 1970년대에는 시민사회의 토대가 빈약하여 교회 역할이 중요하였다면, NGO들이 광범위하게 늘어난 상황에서는 오히려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시민사회의 성장을 가로막을 위험이 있다. 이 경우에는 교회가 시민사회에 대하여 보조성의 원리에 충실하게 독립적 발전을 보장하면서, 국가와 시장에 대하여는 시민사회와 연대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사회참여의 일부 형태가 사회사목이라는 이름으로 제도 안에 편입되기는 하였지만, 본당과 달리 비신자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영역이 되다 보니 역시 책임자와 실무자 간, 실무자와 대상자 간 보조성의 원리가 중요해졌다. 사회복지 영역도 비신자들이 실무자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면서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 영역이 개방된 공간에서 교회의 모습을 직접 노출하는 장이 되어 교회가 선교 일선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한국이 세계화의 격랑에 빠져드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한국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했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 패러다임으로 이동하였다. 세계화는 한국 사회의 다문화 사회화도 촉진하였다. 외국인 노동자의 이주로 시작된 다문화 사회는 결혼 이주민, 사업 목적의 장기 체류 외국인, 기타 이유 등으로 일 년 이상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인구의 4%에 육박하고 출신국도 백여 개 나라에 이른다. 이 때문에 ‘나그네 환대’가 중요해졌다. 특히 현재는 ‘다문화 사회 담론’에 충실하게 이주민들과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천주교는 물론,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정의의 문제가 이전 시기처럼 사회영성의 중요한 차원이 되었다.

 

이전 시기에 성장하게 된 사회영성은 이 시기에 이르면서 훨씬 다양한 차원을 포괄할 필요가 커졌다.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이 ‘정의’, ‘보조성’, ‘연대성’ 더 나아가 ‘경제 정의’, ‘생태 정의’로까지 넓어져야 할 주 ·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영성의 차원이 넓고 다양해지면서 이전 시기처럼 특정 가치가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이전 시기에 형성 · 발전된 사회영성이 더 넓은 영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어서 퇴조라기보다는 다른 측면들의 심화로 볼 수 있다.

 

4) 2008년에서 현재까지

 

(1) 교회의 민족사 참여

 

천주교회는 이전 정부 들어서부터 2008년 미국 광우병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용산 남일당 철거 반대 참여, 4대강 사업 중지 촉구 활동82), 핵발전 반대,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참여해왔다. 특히 두 번째 시기를 연상시키는 빈도와 강도로 참여해왔다. 강정마을에서는 여러 명의 사제와 수도자들이 공무 방해를 이유로 구속될 정도로 반대 운동의 강도가 컸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10년 3월 12일 춘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생명 문제와 4대강 사업에 대한 입장’을 통해 4대강 사업에 대한 우려 입장을 공식 표명하였다. 같은 해 4월 21일에는 ‘4대강 사업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는 2011년 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 7월호에 <원자력 발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이라는 제하의 기고를 통해 원전의 위험성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또한 이해에는 대림 제2주일부터 한 주간을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제정하였다. 이어 강 주교는 2012년 3월에 <한미 FTA, 과연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글을 주교회의 홈페이지에 기고하였고, 최근에도 주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꾸준히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는 2011년 9월 15일 강정마을 해군기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지 건설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대한문과 강정마을에서 미사를 이어왔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4대강 사업, 원자력 발전,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한미 FTA와 같이 한국 사회 내에서 이해 집단 간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는 쟁점에 대하여 일관되게 ‘종말론적 상대주의’83) 입장에서 의견을 표명해왔다. 교회의 정당한 예언직 수행을 반대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음에도 교회는 이러한 움직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이전 시기의 마지막에서 전개되던 추세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사목도 확장 일로에 있다.

 

(2) 사회영성

 

교회의 참여 양상은 두 번째 시기와 비슷해 보이지만, 영성의 내용은 크게 다르다. 이 시기에 사회영성이 다시 확장되는 것을 보면 두 번째 시기의 기억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둘째 시기의 경험은 세 번째 시기에 여러 영역으로 확산되다가 이번 시기에 이르러 부분적으로 수렴되며 다시 부상하였다.

 

이 시기의 사회영성은 인간을 넘어 생태계로 범위가 확장되고, 평화가 새로운 요소로 등장하였다. 평화는 비단 국내를 넘어 동북아시아 더 넓게는 아시아 전체로 관심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 시기를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로 보았는데, 정작 교회의 관심이 이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은 이번 시기부터이다. 그러니 현재가 사회영성이 가장 심화된 시기라 평가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영성에는 이전 시대 사회영성의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활동에서는 여전히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이 요청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는 시민사회와의 보조성과 연대성이 요구된다. 강정의 경우에는 동북아 평화, 생태 정의가 중요한 차원이 된다. 노동 문제에서는 경제 정의가 요청된다. 따라서 이 시기가 기간은 짧지만, 이전 시대 사회영성의 모든 차원이 하나로 모이면서 성숙의 단계에 이르는 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5. 의미와 결론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는 역사학뿐 아니라 다른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도 흥미 있는 주제였다. 교회 안에서도 이 활동이 한국 사회 안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얻은 경험이었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 경험들을 이 글과 같이 다른 각도에서 의미를 해석해보는 작업은 없었다. 분명 지난 70여 년의 경험이 한국 교회는 물론 보편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지혜들이 들어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아직 낯선 주제인 사회영성을 기준으로 교회의 민족사 참여 경험을 들여다보니 새삼 새롭게 다시 조명해야 할 분야들이 많음을 보게 된다. 교회 외부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건들이나 인물들을 통해 의미가 드러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다른 각도로 보면 교회 안에서도 보이지 않게 면면히 기억으로 전수되는 넓은 경험의 층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 방법이 미숙하여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앞으로 가능성이 충분하다.

 

사회영성은 이제 한국 교회가 미래를 열어 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신적 자산이다. 다행히 한국 교회는 지난 70여 년 동안 긍정, 부정의 경험 모두를 통해 사회영성을 심화 발전시켜 왔다. 특정 시기에는 사회복지가, 또 어떤 시기에는 사회사목이 중심이 되면서 면면히 사회영성을 심화 ·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이 요소들을 발굴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더 확산시키는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실 교회가 잊고 싶은 시절에도 사회영성은 싹을 틔웠다. 잠복기로 보이던 시기에도 사회영성은 조용히 널리 확산되었다. 이 때문에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든 다시 불붙을 수 있다. 지금의 교회가 보여주는 실천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측면은 교회사에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터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영성이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는 교훈이다. 사회영성이 꽃필 때 교회는 민족사 안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반대로 민족사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통해 참여할 때 사회영성이 당대는 물론 기억으로 다음 세대에 전수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다수가 반대하고, 따라오지 않는다 해도 사회영성의 기준에 맞는 참여를 멈춰서는 안 된다.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와 악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기 소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교회는 한국을 넘어 인류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할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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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교회에 최근 사회영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산하 토머스 머튼 영성연구회에서는 토머스 머튼 영성의 여러 차원 가운데 실천 측면을 강조하여 ‘사회적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한국그리스도사상》 20,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2012 참조.

가톨릭대 김수환 추기경 연구소에서는 2011년부터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을 조명하는 세미나를 매년 개최하면서 사회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영성은 인간 존엄성의 옹호, 가난한 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는 태도 정도로 정의된다.

개신교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의 김진호 목사는 교회의 ‘공공성, 타인과 함께 수평적으로 나누는 관계의 품성’을 사회적 영성이라 정의한다. 최근 개설되는 교회 내의 여러 공개강좌, 강의 제목에서도 ‘사회적 영성’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교회 바깥에서도 간혹 사회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때는 대부분 활동가들의 소진(消盡) 회복, 역량 강화 수단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경우에는 영성의 원천을 인본주의에서, 이에 도달하는 방편들은 종교 안팎에서 자유롭게 선택한다. 반면 그리스도교 사회영성은 신앙인이 신앙의 동기에서 출발하여 영성의 원천과 방법 모두를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찾는다.

 

2)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 영성이 타계적 영성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통해 실현되는 현세적이고 평범한 것임을 <노동헌장> 반포 90주년을 기념하는 자신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 5장 “노동의 영성”에서 밝힌다. 그는 이를 밝히기 위해 <사목헌장> 34항 “자기와 가족들의 생활 유지를 위하여 노동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는 남녀는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속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에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를 인용하고 있다. 그의 노동 영성은 간단히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 활동에 참여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이를 “지극히 일상적인 활동”에까지 고루 미치게 하려는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그의 첫 사회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상호관계 안에서 완전해집니다”(53항)라고 가르치며 그리스도교 영성의 일상성,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였다.

 

3)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1요한 4,20) ;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신약성경에서는 이 두 말씀이 가장 자주 인용된다. 이 말씀들 외에도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혹은 내적) 삶이 사회생활과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하는 구절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4) 황종렬, Donal Dorr, 《영성과 정의》, 왜관 : 분도출판사, 1990, 31쪽.

5) 같은 책, 34쪽.

 

6) Francis Xavier Meehan, Contemporary Social Spirituality, ORBIS, 1982, pp. 6~8. 그의 영성에서 유추해보자면 구조는 어항에 비길 수 있다. 어항의 물이 썩으면 아무리 건강한 물고기를 풀어놓아도 산소 부족으로 죽게 마련이듯,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구조가 건강하지 않으면 훌륭한 신앙인들도 건강할 수 없다. 개인 구원이 사회 구원과 영성의 인간 내면 차원이 구조적 차원과 분리될 수 없다는 뜻인 셈이다.

 

7) ibid., p. 6. 여기에는 개인뿐 아니라 교회와 같이 실행의 주체가 집단인 경우도 포함된다. 개인과 교회 두 차원 모두에 다 적용되는 정의라는 뜻이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에서는 평신도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서 사회적 차원을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예수님의 성령을 따라 세상을 건설하게 하며, 사람들이 역사와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초월해 볼 수 있게 하고, 자기 형제자매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열정적 사랑을 기르게 하며, 주님께서 그들을 바라보시듯 그들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듯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간추린 사회 교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6, 545항.

 

8) 같은 책, 38항.

9) 영성의 본질적 정의 대신 이 글에서는 ‘신앙인의 삶의 방식’, ‘본질에 이르는 방편’에 가까운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10) 요즘 사용되는 의미, 곧 구조를 강조하는 사회영성은 교회에서 사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는 19세기 말에 와서야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 사회영성에 대한 본격적 관심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시작된다. 교회의 사회적 실천에서 공의회가 분기점이 되는 까닭이다. 근대 이전에는 사회영성이 교회의 삼중 본질 가운데 하나인 ‘디아코니아’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다. “교회의 가장 깊은 본질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kerygma-martyria), 성사 거행(leitourgia), 그리고 사랑의 섬김(diakonia)이라는 교회의 삼중임무…이 임무들은 상호불가분의 관계…사랑의 실천은 교회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도 되는 일종의 복지 활동이 아니라 교회 본질의 한 부분이며, 교회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데에 필수적인 표현이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5항-가). 그러나 이 봉사는 ‘자선 구호’ 차원에 머물러 있어 현대에 와서 구조적 접근을 시도하는 사회복지와 차이가 있었다.

 

11) 민족사가 폐쇄적 함의를 갖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1980년대 말 한국이 세계화 조류에 편승하게 되면서 민족사가 더욱 협소한 의미로, 심지어는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민족사를 사용하고자 하는데, 민족사를 세계사와의 유기적 관계에서 고찰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12)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과거사 반성문건 ‘쇄신과 화해’>, 2000년 12월 3일.

 

13) 강인철은 박사 학위논문인 《한국기독교회와 국가 · 시민사회》(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에서 광복 후부터 1962년까지 개신교를 망라하여 그리스도교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전쟁과 종교》(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에서는 한국 전쟁을, 《종교정치의 새로운 쟁점들》(오산 : 한신대학교출판부, 2012)과 《민주화와 종교 : 상충하는 경향들》(오산 : 한신대학교출판부, 2012)은 민주화 이후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정치학자 김녕은 한국 교회사 전체를 다루면서도 유신 이후에서부터 1989년까지에 대한 교회의 사회참여 과정을 학위논문에서 다루었다. 《한국 정치와 교회 - 국가갈등》(서울 : 소나무, 1996). 추교윤도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논문에서 유신 체제에서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다루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역할》(김포 : 위즈앤비즈, 2009). 최종철은 박정희 정권 시기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인천 : 인천가톨릭대출판부, 1997). 유신 체제에서 민주화 시기까지를 다룬 석사 논문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안수영, 《한국 가톨릭사제의 사회참여 활동의 특징과 변화》, 충남대대학원 석사 논문, 2001 ; 연규영, 《한국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의 정의구현 활동에 대한 고찰》, 광주 가톨릭대대학원 석사 논문, 2006 ; 천선영, 《한국 가톨릭교회 사제들의 정의구현 활동 : 그 논리적 구조와 대안적 전망》, 서강대 대학원 석사 논문, 1992. 문규현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II》(빛두레, 1994)도 이 시기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유홍렬은 《한국천주교회사 下》(가톨릭출판사, 1992)에서 광복 후에서 1960년대 초까지 한국 교회사의 흐름을 짧게 일별하였다. 조광, 노길명, 오경환의 저술들 가운데서도 일부가 이 시기를 다루었고, 얼마 전부터는 종교학계에서도 이 시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하였다.

 

14) 사회 교리 문헌의 출처와 번호는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가 간행한 《간추린 사회 교리》를 기준으로 하고, 옆에 문헌명과 항목 번호를 표기한다. 《간추린 사회 교리》에서 인용한 항목들을 표시할 때는 매번 각주를 달지 않고 인용구 다음에 문헌명과 항목 번호만 표시할 것이다. 이하 《가톨릭교회 교리서》, <사십 주년>, <팔십 주년> 그리고 <사목헌장> 역시 마찬가지로 매번 각주를 달지 않고 인용구 다음에 문헌명과 항목 번호만 표시할 것이다.

 

15) 이 원리와 가치들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가치들은 원리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선(善)의 구체적인 측면을 인정한다는 표현이자 “사회생활을 올바로 조직하고 질서 있게 이끌어 나가는 준거의 역할”(《간추린 사회 교리》 197항)을 한다.

 

16) 본래 이러한 기준들을 적용하여 평가하려면 지표들을 선정하고, 지표를 측정할 수 있는 구성 요소들을 설정하여 각 구성 요소당 척도를 부여, 계량화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시간을 고려하여 사회 교리의 중심 원리와 주요 가르침을 지표로 삼아 주관적 평가만을 시도하겠다. 사실 특정 시대의 어떤 사건 또는 문건이 대표성을 띠는지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주관을 피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17)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하여 국민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유로이 책임 있게 수행하도록 부름 받은 국민들의 가장 커다란 열망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모든 질서를 이루는 주축 가운데 하나이고 민주주의 체제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간추린 사회 교리》 190항).

 

18) “연대성은 인간의 타고난 사회적 본성,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과 권리, 그리고 일치를 향한 개인과 민족의 공동 노선을 특별히 강조한다. 개인들과 민족들 사이의 상호 의존의 유대”(《간추린 사회 교리》 192항)를 촉진하고 윤리적 · 사회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이 연대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함을 강조한다.

 

19)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간추린 사회 교리》 164항 ; <사목헌장> 26항)이다. “공동선은 모든 사회 구성원을 포함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능력에 따라 공동선을 이루고 증진하는 데에 협력할 의무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간추린 사회 교리》 167항 ; <팔십주년> 46항).

 

20)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간추린 사회 교리》 171항 ; <사목헌장> 69항).

 

21) “‘경제, 정치, 문화, 기술의 본질적 개혁과 필요한 제도 개혁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공권력의 필수적인 준거가 된다”(《간추린 사회 교리》 197항).

 

22)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2468항. 이하 《가톨릭 교회 교리서》.

 

23) “(자유는) ‘오직 진리와 정의로 다스려지는 상호 유대가 사람들을 서로서로 이어 주는 그곳에, 참으로 존재한다.’ 자유가 사회적으로 온갖 다양한 차원에서 수호될 때 자유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지고 폭넓어진다”(《간추린 사회 교리》 199항).

 

24) 사회 교리가 중요하게 제시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종말론적 상대주의이다. “구체적인 역사의 역동성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한정적이고 확정된 사회 경제 정치 조직의 시각으로는 식별해낼 수 없다”(《간추린 사회 교리》 51항). 이것은 교회가 모든 체제에 대하여 동일시가 아니라 상대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5) 사회영성을 성장시키는 교회의 대응은 대략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진다. 우선, 사회복지(이전에는 구제와 시혜적 봉사) 차원에서 전개된다. 사회복지는 교회의 삼대 본질 가운데 하나인 ‘봉사’(diakonia)를 실현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써, 실제로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사회봉사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이 활동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게 교회가 일관되고 보편적으로 지속해왔기 때문에 사회영성의 일차 구성 요소이다. 두 번째로는 구조적 차원으로 접근하였던 시도, 곧 사회-정치적 혹은 사회-경제적 차원의 실천이다.

 

26) 교회가 사회로부터 ‘대안적 헤게모니 기구’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었고,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27) 신자들의 사회참여 의사를 물은 설문조사 결과들(가톨릭신문 창간 60주년 기념 설문조사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에서는 제1차 조사(1987)에서부터 제2차 조사(2000)까지는 동의 비율이 높게 유지되다가, 제3차 조사 때는 감소세로 접어드는 양상이 나타났다. 교회의 사회참여가 활발했던 시기에는 신자들의 동의 비율도 높아지고, 반대 경우에는 동의 비율이 낮아진다는 뜻이다. 이는 반대로 신자들의 암묵적인 지지와 동의가 교회의 사회참여를 촉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톨릭신문사,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대구 : 가톨릭신문사, 2000, 138쪽 ; 가톨릭신문사,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대구 : 가톨릭신문사, 2007, 153~154쪽.

 

28) 최종고는 이 시기 교회가 미군정, 이승만과의 유착 과정에서 노기남 대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 한국 교회의 최고 수장이었던 노 주교가 미군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노 주교 측보다는 미군정의 적극적인 태도가 더 큰 영향을 주었고, 이승만과는 반일, 반공, 친미주의 노선에서 일치하였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최종고, <제1공화국과 한국천주교회>, 《한국천주교회창설이백주년기념 한국교회사논문집》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860~862쪽.

 

29) 강돈구, <해방이후 종교와 정치>, 《한국 근대 100년의 사회변동과 종교적 대응》, 한국학술정보, 2013, 104~106쪽.

 

30) 노길명은 미군정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대 정책을 “일찍부터 신학적으로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결 구도에서 반(反)공산주의를 선택하고 있던 천주교와 개신교를 친미 반공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보급의 통로”로 만들기 위한 통치 전략으로 본다. 노길명 · 박형신 외,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이학사, 2009, 24쪽.

 

31) 유홍렬, 《增補 한국 천주교회사 下卷》, 가톨릭출판사, 1992, 447쪽 ; 최종고는 앞의 글에서 노기남 주교를 정치주교로 평가하고, 노주교의 《회상록》을 인용하며 장면의 정치 입문과 당선 과정에 적극 개입하였음을 밝힌다. 최종고, 앞의 글, 854~860쪽 참조.

 

32) 《가톨릭청년》 1948년 4월호, 2~3쪽.

 

33) 최종고는 교회가 이승만에게는 상당한 밀접 내지 유착 상태를 보여주면서 왜 당시 김구,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협상과 문화인 108명의 시국선언에 대하여 냉담한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하여 의구심을 표한다. 그는 이때 보여준 교회의 행위가 정교밀착이라고 평가한다. 최종고, 앞의 글, 862쪽.

 

34) 《경향잡지》 1948년 2월호, 17~19쪽.

35) 《경향잡지》 1948년 2월호 ; 《천주교청년》 1948년 4월호 참조.

36) 강인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 : 인천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7, 624쪽.

37) 강인철, 《전쟁과 종교》, 오산 :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 263쪽. 

38) 같은 책, 267쪽.

39) 같은 책, 268쪽.

40) 강인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 : 인천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7, 646~647쪽.

 

41) 같은 책, 649쪽. 이에 대하여는 다른 평가도 내릴 수 있는데, 당시 세계 교회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던 반공 흐름을 지역 교회가 거부할 수 없었고, 반공주의는 이미 일제 시대부터 교회 안에서 계속되어 왔던 흐름이며, 광복 후 교회가 미군정, 이승만과 유착하면서 이미 공산주의에 대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교회가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남북 지역 모두에서 직접 피해를 입었으니 더욱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당시 상황에 더 가까울 터이다. 그럼에도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이유는 평가 준거로 삼은 사회 교리의 원리와 가치들 때문이다.

 

42) 노길명, 《한국사회와 종교운동》, 빅벨출판사, 1988, 34쪽.

 

43) 1950년 이후 설립된 각급 학교와 기술학교, 외국 가톨릭 기관이 제공한 유학 장학금에 대한 상세 내역은 역시 장정란이 잘 파악, 정리해 놓았다. 장정란, <한국전쟁과 선교 실상>,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237~243쪽 참조.

 

44) 같은 책, 242~43쪽.

 

45) 박문수, <가톨릭교회와 근대적 사회사업의 도입과 발전>, 《한국 근 ·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중)》, 가톨릭출판사, 2005, 439~440쪽.

 

46) 같은 책, 443~444쪽.

47) 같은 책, 444~445쪽.

48) 김녕, <장면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시민사회 : 이상과 현실>, 《장면 총리와 제2공화국》, 경인문화사, 2003, 366쪽.

49) 조광,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 ; - - -,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 247쪽.

 

50) 사제단의 창립 주역이었던 함세웅 신부는 교회가 정권에 대한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 교회의 수호 목적이었음을 밝히고 이를 반성한다. “교회가 한 주체가 된 것은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피납, 구속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대중 형제의 납치 사건이나 김지하 시인 사건 때에는 무관심하였던 교회가 주교가 구속됨에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어적으로 대응하였다는 데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함세웅,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역사와 증언>, 《종교신학연구》 1, 1988, 263쪽.

 

51) 같은 책, 263쪽.

52) 명동천주교회, 《한국 천주교 인권운동사 : 명동천주교회 200주년사 제1집》, 명동천주교회, 1984, 49쪽.

53) 박문수, <가톨릭 사회운동>, 《한국가톨릭대사전》 1, 1994, 160~162쪽.

54) 명동천주교회, 같은 책, 439~456쪽 참조.

55) 박보영, <천주교도시빈민화를 통해 본 천주교 빈민운동>,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이학사, 2009, 168~171쪽 참조.

 

56)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설립 25주년 기념 자료집 1969~1994》, 빅벨출판사, 1994, 241쪽.

 

57) 같은 책, 242쪽.

58) 같은 책, 243~252쪽.

59) 《경향잡지》(1988. 6), 20~21쪽. 

60) <산업문제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565쪽.

61) 같은 책, 445쪽.

 

62) 추교윤은 해방신학이 이 시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천주교 사회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추교윤, <천주교 사회운동의 전개와 특성>,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이학사, 2009, 43~44쪽.

 

63) 이성배 : Gustavo Gutierez, 《해방신학의 영성》, 왜관 : 분도출판사, 1987 참조.

64) 같은 책, 62쪽.

 

65) 박보영은 천주교도시빈민회 활동가들이 2000년대 들어 다양한 복지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지역 공동체에 투신하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박보영, 앞의 책, 185~186쪽. 이러한 현상은 1970~80년대 천주교 사회 운동 각 부문에 종사하던 활동가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이들 활동가들은 천주교를 떠나 시민단체로 옮겨 가거나 생활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교회에 머물던 활동가들은 새로운 사회사목 분야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66) 기억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 교회 사회영성에는 초대 교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순교영성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7) 김녕, <제5공화국 이후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 : 인천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7, 712쪽.

 

68) 자율적인 시민운동은 기존의 민중 운동과 분리되면서 폭이 더욱 넓어졌다. 특히 김영삼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추교윤, 《한국 천주교회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역할》, 김포 : 위즈앤비즈, 2009, 199~203쪽.

 

69) 추교윤은 이 시기에 교권에서 급진적 성향을 보이는 천주교 사회 운동 단체들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천주교 사회 운동 안에서 세 가지 형태로 분화가 일어났다고 보았다. 이 가운데 사제단과 정의평화위원회 같은 단체들은 이전 시기와 달리 “정치 현실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한 특성”을 가진 집단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객관적 상황의 변화라는 측면도 있지만 체제내화의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추교윤, 앞의 책, 54~55쪽.

 

70) 이 원인에 대하여 신자들의 중산층화가 이때부터 거론되기 시작한다. 1970~80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참여에 공감하며 입교한 중산층 신자들이 이 시기부터 체제 내로 편입되면서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내 신자 구성층의 변화와 함께 시민사회의 구성이 다양해지면서 교회가 독자적인 의제를 설정하기 어려워진 것도 영향을 주었다.

 

71) 이 법안에서 낙태를 허용 또는 방조하는 규정이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일례로 청주교구는 백만인 서명 운동, 국회 청원 운동, 타 종교와의 연대 운동 시도 등을 통하여 나름의 정치적 실천을 해왔다.

 

72) 이에 대하여는 신구교계가 합심하여 이런 연구와 시도들을 금지하는 법률 제정을 요구하였다(《국민일보》 2001년 5월 11일자).

 

73)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의 독주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양적 성장이 이어지면서 1980년대에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 3대 종교의 정립 구도가 형성된다. 천주교와 개신교 간에는 이미 거리가 존재하였던 데다 불교가 부상함으로 인해 어느 종교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정치 영역에서뿐 아니라 종교 영역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사실상 종교 다원 상황을 형성 · 고착시켰다.

 

74) 미국식의 공민 종교(civil religion)가 될 가능성도 점차 높아간다.

 

75) 민주주의 실현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이 현상은 천주교 사회 운동 진영의 퇴조에서 잘 드러난다. 1990년대 들어 기층 운동과 직접적인 정치적 실천을 앞세우는 운동은 심각한 자원의 감소를 경험하였다. 아울러 교회의 사회정치적 실천의 빈도도 감소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김녕, 앞의 글 참조.

 

76)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연혁.

http://cjp.cbck.or.kr/index.php?mm_code=716&sm_code=722 참조.

 

77) 심흥보는 이 현상을 “그동안 천주교가 이루어 왔던 사회복지 활동의 정신과 업적을 사회가 인정해 준 결과”라고 평가하였다. 심흥보,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388쪽. 실제 이러한 현상을 국가가 가톨릭의 투명성을 인정해 준 결과로 해석 가능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가톨릭과 같이 사회적 위신이 높은 종교들에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궁극의 목적이 국가의 책임을 민간에게 전가하는 데 있고, 국교가 아닌 바에야 종교별 형평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행사하게 되는 측면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일례로, 보건복지부 《2001 보건복지백서》는 국가가 종교와 같은 민간 복지 자원을 개발하고 육성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88쪽 참조.

 

78) 이태수, <시민 사회 내에서의 가톨릭의 사회복지의 역할과 과제>, 《시민사회와 종교사회복지》, 학지사, 2003, 165쪽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한국천주교사회복지편람 200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7쪽.

 

79) 박문수, <천주교의 사회복지>, 《한국종교교단연구 VIII : 사회복지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 58~63쪽 참조.

80) 박문수, <근대적 사회사업에서 사회복지로의 발전>, 《한국 근 ·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하)》, 가톨릭출판사, 2006, 360쪽.

8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회 통계>, 1988, 2008 참조.

 

82) 2010년 3월 8일 1,100명의 사제가 중단을 촉구하는 선언에 동참했고, 5월 10일에는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전국 사제 · 수도자 5005인 선언”(교구 사제 1,580명, 남자수도회 282명, 여자수도회 3,143명)을 발표하였다(《가톨릭신문》 2010년 5월 16일자).

 

83) 교회는 현세적 야심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 교리》 13항). 하느님 나라에 비춰보면 지상의 어떤 사회질서도 완전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모든 사회 체제에 대하여 상대적인 위치에 있다.

 

[교회사 연구 제42집, 2013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박문수(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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