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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의 의미와 과제(영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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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9-10 ㅣ No.1685

[알아볼까요]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의 의미와 과제(영적 측면)

 

 

1.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30)

 

낙태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이제 세상의 법은 ‘괜찮다’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는 더욱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방법은 쉽고 빠르고 직접적인데, 하느님의 방법은 알기 어렵고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낙태 문제에 있어서 산모는 많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적 문제가 있거나, 원하지 않은 아이이거나,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환경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단지 아이를 키우는 문제 외에도 극복해야 할 다른 많은 법적, 인간적, 사회적, 문화적 장애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낙태를 ‘안 된다’라고 하니,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민이 더욱더 깊어지고 믿음 또한 흔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위기입니다. 이 위기는 천주교는 좋지만 그 가르침을 너무 무겁게 느끼거나, 미사와 영성체는 좋지만 그 교리와 계명은 부담스럽게 느끼는 현실을 말합니다. 이번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도 단순히 법적인 판단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합법적 판단은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줄 것이고, 그 때문에 신앙과 삶의 분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낙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기 예수를 대하는 마리아와 요셉과 같습니다. 이들이 가졌던 내적 갈등은 오늘 우리 신앙인이 갖는 갈등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씀이 그들에게 온전히 기쁨이 되는 인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마리아의 내적 갈등과, 요셉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마태 1,19)한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세상의 법과 눈으로는 이런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아이와 마리아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상황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때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루카 1,30),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그리고 오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낙태 문제에서 많은 사람이 선뜻 태아의 생명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태아 선택 이후에 이어질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입니다. 그 문제들은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낙태 문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두려움일 것입니다. 태아의 생명을 선택했을 때 감수해야 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태아를 선택하지 못하게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선택이 세상의 눈에는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생명이고 아이였습니다.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들은 아이의 생명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마리아와 요셉처럼 하느님을 믿으며 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지만, 교회의 가르침이 현실의 상황과 대치될 때,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세상에서 오는 근심과 걱정에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가리키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루카 24,38)

 

뱀이 사람에게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세상이 우리들의 마음에 의혹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의혹이 있는 마음으로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체외 수정 시술이 잘 되도록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기도를 부탁하거나 안수를 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배아감수술’을 또 다른 이름의 낙태라고 생각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정부가 정책으로 지원하는 합법적인 방법이고, 일반적으로 누구나 하는 방법으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낙태, 배아감수술, 인공 피임 등등에 대해서 유독 교회만 ‘안 된다’라고 하니 세상의 눈으로 보면, 교회의 가르침은 세상과 맞지 않고 고지식하고 고집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에는 조건과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버려지는 아이들의 생명, 그리고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임신한 여성의 삶을 뒤로 하고 우리가 하느님께 어떤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이어야 하고, 우리 믿음의 삶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2. 너희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마태 25,35)

 

체념으로 낙태 선택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거나, 교회의 낙태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할 때, 그것은 심각한 영성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생명에 대한 거부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리스도께 대한 거부인 것”(생명의 복음 104항)이기 때문입니다. 무죄한 태아의 생명 보호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던 그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첫 사람에게 직접 “낳고 번성하라”(창세 1,28)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 누구라도 이 명령에서, 그리고 이 소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소명을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듣지 않을 수 없으며,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하고 우리 각자를 찾으시며 소명으로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부족하다고 숨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부족하다고 자신을 감추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희망을 거는 것(마태 12,14. 21 참조)입니다. 신앙과 삶은 절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야고보 2,14,22)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모님과 성 요셉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태중의 아이가 온전히 기대어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방(房)을 보호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사람들에게 맡기셨던 작은 방(房)입니다. 바로 자궁(子宮)입니다. 우리 중에 이 방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 방에 대한 폭력을 이제는 멈출 때입니다. 그래서 그 방에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맡기는 가장 약한 아이를 사랑으로 보호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생명나무를 지키시기 위하여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우신 것’(창세 3,24 참조)처럼 오늘 우리를 통하여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하느님 당신께서 선택하신 ‘커룹’이고 ‘불 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9월호, 유성현 베드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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