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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2018-05-27.....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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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8-05-26 ㅣ No.2226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신명 4,32-34.39-40        로마 8,14-17       마태 28,16-20

2018. 5. 27. 이태원.

주제 : 삼위일체에 대해서(!)

오늘은 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삼위일체>는 한자로 쓰고, 우리말로 읽은, <천주존재, 강생구속, 상선벌악>과 함께 4대교리로 말하는 것의 하나입니다.

 

사람이 알아듣고 구별하는 하느님의 속성(屬性)’,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해서 하신 구원의 업적’, 그리고 사람이 드러내는 삶의 모습이 만든 결실을 하느님께서 판단하신다는 심판내용을 합쳐서 <4가지 중요한 교리>로 구별합니다. 오늘은 그 표현만 말씀드리고, 교리설명은 생략합니다. 오늘은 이 네 가지 교리의 표현에서 두번째로 말한 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에 관련된 것이라서, 세상이라는 곳에 붙잡혀 사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그 참모습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계시진리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삼위일체라는 우리가 신앙에서 만나는 표현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여러 대상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동일본체/또는/호모우시아라고 설명합니다. ‘하나(!)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실 때는, 세 가지 모양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설명만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그 모습이 어떤 모양인지, 규정된 표현은 없습니다. 다만, 그림으로는 성부는 근엄(謹嚴,=매우 젊잖고 엄숙하다)하고 수염이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성자는 십자가에 못이 박혀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리고 성령은 하늘을 나는 비둘기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묘사하는 이런 그림은 교회공동체의 의도일 뿐, 실제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명확한 규정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구별하고 설명하는 일은 좋은 의도이겠지만, 하느님의 본질에 관한 것은 사람의 능력과 재능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한계입니다. 실제로 내가 어떤 표현을 써서 하느님을 설명하면 다른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아듣겠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인간은 알아들으려고 도전하다가 한계에 부딪히면, <하느님은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요, 세상에서 뛰어난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는 소리이며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태어났다가 죽어야 하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해도 문제는 없을까요?

 

애석합니다만, 오늘 기념일에 들은 독서와 복음은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를 지나서, 교회공동체가 모양을 갖춘 이후에 생긴 개념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구하겠다고 덤빌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에 하신 일을 알아듣고 내가 삶에서 그 모습을 본받을 일을 생각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오늘 첫째 독서인 신명기는, 하느님의 뜻이 담긴 <법과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모세가 히브리백성에게 전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법과 계명>을 지키는 일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혹시라도 <법과 계명>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거부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을까요? <법과 계명>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반응은 하느님의 뜻에는 어긋나는 태도이지만, 누가 잘못된 자세를 걷어내고 올바르게 알아듣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을 제한하고 억압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법과 계명을 제정하신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드러내는 행동이 하느님의 뜻을 읽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겪으실 마음고생(!!)은 어떻겠습니까?

 

둘째 독서인 로마서에서, 바오로사도는 삼위일체의 셋째 위격인 성령의 작용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와 아빠라고 부를 수 있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이고 힘입니다. 그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일까요? 받아들이면 어떻게 삶의 자세를 드러내겠습니까?

 

하느님의 명령으로 들은 내용을 우리가 다 실천하고 살까요? 사제로 사는 저는 세상에 실현돼야 할 하느님의 뜻을 해석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그 말씀에 따라 사는지 살지 않는지 판단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각자 그 소리를 듣고서 자신은 과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인가 응답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몇 가지 사항을 들었습니다만, 그 내용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태도에 따라 실제로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생각만 그렇게 하고 실제 삶은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지만, 우리가 드러내야 하는 모습은 충실하고도 성실한 세상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올바로 흠숭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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