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2일 (화)
(백)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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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 속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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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7 ㅣ No.1008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 속 정치

 

 

넷플릭스(세계적인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로, 2016년부터 한국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했다.)의 인기 드라마 중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는 미국 워싱턴을 배경으로 한 정치 드라마이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드라마는 많은 인기를 얻으며 2017년에 시즌 5가 방영될 예정이다.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하원 의원인 프랜시스 프랭크 언더우드(캐빈 스페이시)와 그의 아내 클레어(로빈 라이트)가 워싱턴 정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일으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드라마는 전개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 영상 전체를 지배하는 색깔(Color tone)이 있는데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에서는 따뜻한 주황이나 노란색 계열을, 순수한 사랑이나 우정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는 환한 흰색 계열을 쓴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경우 전체적으로 블루(Blue) 톤 계열을 이용해 표현했다. 둘은 부부지만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는 서로의 외도조차 문제 삼지 않을 만큼 정치적 파트너의 관계일 뿐이고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 배신과 음모, 심지어 살인조차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냉혹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와 잘못된 정치를 고발하는 내용은 영화의 주 메뉴였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 는 당시의 극단적인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코미디라는 장르로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많은 영화들이 당시 사회의 잘못된 현상에 답답해하던 대중들의 마음을 해소시켜 주었다.

 

우리나라 영화의 경우는 어떠할까? 영화 ‘내부자들’, ‘마스터’, ‘더 킹’ 등 유독 우리나라에는 부패한 정치인들을 통쾌하게 응징하는 영화가 많다. 왜 그럴까? 영화를 제작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관객이다. 어떤 관객층을 타깃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스토리의 방향을 잡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부패한 정권과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영화가 많이 제작되는 것은 현 사회현상에 대해 답답해하고 분노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답답한 상황을 영화를 통해서라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얼마 전 개봉한 ‘더 킹’(2017, 한재림 감독)도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주인공 태수(조인성)의 성장과정을 한국 정치사의 어두운 면과 결합시켜 이끌어 나간다.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작업인지를 알기에 비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약간의 용기를 내 본다면 영화에 나오는 대사들이 너무 직설적이다. 영화의 영상과 대사, 음악은 그 영화가 뜻하고자 하는 것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특히 권력의 설계자인 ‘한강식’(정우성)이 ‘태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하는 충고는 추리소설에서 누가 범인인지를 미리 가르쳐 준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의 비판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하고 그 의미를 찾아내기 보다는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현실상황에 대한 정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하고 감히 짐작해본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사회적 부조리를 주제로 한, 특히 권선징악의 결말로 이어지는 영화들이 흥행을 하는 것이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다. 결국 영화는 자극이 될 수 있을 뿐 현실세계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의 반복이 어쩌면 사람들에게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은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약화시키고 우리를 지치게 만들며 급기야 포기하게 만든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냉소주의다. 냉소주의는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선의를 지니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실망시키고 좌절시키는 상황이 반복해서 벌어질 때 일어나는 일종의 ‘번 아웃(Burn out)’현상이다. 냉소주의는 ‘번 아웃’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냉소주의는 아직 ‘번 아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가지고, 선의를 가지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실망시키는 전염병이다. 냉소주의는 불합리한 상황의 반복에 대해 생존을 위한 자기 방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악한 자들과는 다르며,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갈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소주의’가 아니라 ‘인내’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분도출판사, 2016)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라하의 사제 ‘토마시 할리크’는 “신앙과 무신론의 가장 큰 차이는 ‘인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께서 베푸시는 수많은 기적과 말씀에도 불구하고 비아냥과 음모, 심지어 당신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배신까지 당하시지만 그분은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인내’이다. 그리고 지금도 인내하고 계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다. 인내를 뜻하는 영어 단어 ‘perseverance’는 단순히 자신의 감정이나 불편한 상황을 참고 억제하는 ‘Hold’의 뜻만이 아니라 ‘steady persistence’, 즉 어려움들, 장애물들 혹은 절망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계속해서 해 나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꾸준히 계속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내이며 세상을 바꿔 나가는, 하느님 뜻대로 우리를 바꿔 나가는 힘이다.

 

지난 몇 개월간 우리나라는 크나큰 홍역을 앓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더 이상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함께 마음을 모아 인내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 기쁨을 누리는 시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월간빛, 2017년 5월호, 한승훈 안드레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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