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동화작가 마해송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23 ㅣ No.942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동화작가 마해송 (상)


늦은 나이에 입교했지만 아침미사 거르는 일 없어

 

 

- 故 마해송 작가의 생전 모습.

 

 

“생각하면 참으로 오랜 세월, 나는 많이도 빌며 살아왔다. 하늘에도 빌었다. 땅에도 빌었다. 달님에게도 빌었고 별님에게도 빌었다. 바윗돌에도 빌었고 대감님에게도 빌었다. 빌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살 때였을까? 어려서 비는 것을 본 맨 처음은 어머님이 대감님께 비는 것을 본 것이었으리라.”

 

동화작가 마해송(馬海松, 본명 馬湘圭, 프란치스코, 1905~1966)은 어릴 때부터 지녀온 종교심에 대해 이같이 회상한다. 위의 인용구로 시작되는 자전적 수필집 「아름다운 새벽」(1961, 민중서관)은 이러한 종교심이 가톨릭 신앙이라는 종착지를 찾게 되는 과정을 그린 신앙고백서다. 이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에 오르며 교회 안팎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74년 작가 사후에는 다른 수필, 추모글과 함께 묶여 성바오로 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마해송은 한국을 대표하는 동화작가다. 유능한 잡지 편집자이자 수필가, 문장가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학 세계의 중심이자 핵심은 동화다. 그는 1920년대 초 「바위나리와 아기별」, 「어머님의 선물」을 발표하면서 한국 아동문학을 선구적으로 개척했고, 일제시대에는 「토끼와 원숭이」, 「떡배 단배」 등 고통받는 민족 현실을 풍자하는 동화를 창작했다. 해방 후에는 더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고, 그 성과로 동화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주요 문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1959년 「모래알 고금」으로 제6회 자유문학상을, 1964년 「떡배 단배」, 「비둘기가 돌아오면」으로 제1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은 평단의 폭넓은 지지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그의 장편동화, 중단편동화, 동극, 노래가사, 수필 전부를 담은 「마해송 전집」(전 10권, 문학과 지성사)이 완간됐다.

 

아동문학연구자인 원종찬 인하대 한국학과 교수는 그의 동화에 영향을 미친 삶의 이력을 네 가지로 꼽는다. 개성 출신(1905), 색동회 가입(1924), 일본 잡지 ‘문예춘추’ 입사(1924), 종군문인 활동(1950)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어린 시절 민족 고유의 풍속과 문화를 넉넉히 향유할 수 있었고, 이것이 민족에 대한 애정으로 나아갔다. 또 방정환 선생이 창립한 색동회 활동은 어린이 애호 사상을 형성시켰고, 그가 한평생 동화를 창작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한편 1921년 일본 유학 이후 20여 년간 ‘문예춘추’의 편집자, ‘모던일본’의 사장으로 일본 유명 작가들과 교류하며 지낸 경험은 사회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종군문인 활동은 적극적인 반공주의 작품을 창작한 배경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1958년 세례를 받고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면서 1950, 60년대 그의 후기 작품은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아름다운 새벽」에서 그는 집안일을 거들던 ‘대구 할머니’와 부인 박외선 여사(체칠리아, 전 이대 무용과 교수, 1915~2011)가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힌다. ‘대구 할머니’가 작중인물로 등장하는 동화 「앙그리께」를 창작하면서 그는 부인을 통해 1·4 후퇴 당시 가톨릭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안면이 있던 사제를 떠올리는데 그가 바로 시인, 번역가, 영성가로 유명한 최민순 신부였다.

 

“생각난 신부가 있었다. 피난 대구에서 두 어 번 만난 적이 있던 신부였다. 그때만 해도 천주라든지 신부라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무심했지만, 몹시 수줍어하고 여자처럼 부드럽고 겸손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여러 나라말을 알고 학문이 깊고 덕이 높은 신부라고 들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날그날을 당장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살았기 때문에 태도가 어쩌면 오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서 주춤해졌다… 그러나 시를 쓰고 수필을 쓰는 신부라면 그즈음의 내 태도가 불손했다 하더라도 이해가 있을는지 모른다는 희망도 가져 보았다. 그 신부라면 자주 찾아가서, 나무 그늘 같은 데서 예사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교리를 엿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아름다운 새벽」 중에서)

 

최민순 신부에게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꾸준히 가톨릭 교리를 전해 듣고도 마해송은 신앙에 대해 여러 고민과 회의를 거치지만 결국 세례를 받기로 결심한다. 수필집의 제목인 ‘아름다운 새벽’이란 1958년 10월 3일 새벽 6시 성가수녀원에서 최민순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그 새벽을 말한다. 「아름다운 새벽」은 신앙을 갖기까지 오랜 여정의 끝, 즉 영세일 새벽에 대한 묘사로 마무리된다. 이후 마해송은 최민순 신부와 함께 전국가톨릭용어위원회에서 성경, 기도문의 용어를 검토, 통일, 심의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아들 마종기(라우렌시오) 시인은 가족 모두가 신부님께 여러 개인적인 일들을 상담하고 자문을 받는 등 절친했다고 전한다.

 

마해송은 상당 기간 고심하면서 늦은 나이에 입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입교 후에는 혜화동성당에서 매일 아침미사에 참례할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다. 최근 출간된 전집에 발굴, 수록된 수필 ‘또 일본에서 드린 미사’에는 40일간 아내와 함께 일본을 방문하는 중 시골 마을에서도 늘 성당을 찾아 아침미사를 참례하는 작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영세 이후 줄곧 「가톨릭소년」에 작품을 발표했기에 그의 후기작 대부분은 「가톨릭소년」에 실려 있다. 단편동화 「생각하는 아버지」(1963.4.), 「경우 밝은 여우」(1963.6.), 「개한테 진 여우」(1963.7.), 「눈이 빠진 아이」(1963.8.), 「여우 없는 여우골」(1963.9.)을 발표했고, 중편동화 「그때까지는」(1963.11.~1964.5.)을 연재했다. 1966년 11월 6일 만 61세에 뇌일혈로 선종해, 「가톨릭소년」 1966년 12월호에 게재된 단편동화 「들국화 두 포기」가 유작이 됐다. 그 해 가톨릭신문은 국내 10대 뉴스로 “장면, 마해송씨 서거”를 선정할 정도로 그는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다.

 

* 김유진(아동문학평론가) - 아동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글쓰기와 토론을 강의한다. 동시집 「뽀뽀의 힘」을 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24일, 김유진(아동문학평론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동화작가 마해송 (중)

 

부조리한 국내외 세태 풍자한 의인동화 발표

 

 

- 마해송 동화 책표지. 「토끼와 원숭이」(배경)와 「떡배 단배」 「모래알 고금」 「앙그리께」.

 

 

마해송의 동화는 작품 창작 당시의 시대상과 작가의 사상을 세심하게 고려하면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시대 현실에 면밀하게 조응하며 동화를 창작했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연구자인 이재철은 그를 “시대와 같이 살면서 시대와 같이 호흡한 작가이며, 시대에 아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저항하고 자기 변모의 가능성을 위해 끊임없이 꿈틀거린 작가”로 평가한다.

 

그 대표작이 의인동화인 「토끼와 원숭이」다. 이 작품은 우화(알레고리)의 형식으로 일제 식민시기,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쟁탈전 등의 현대사를 담고 있다. 1931년 「어린이」에 첫 회만 발표되고 1933년 다시 연재가 시작됐지만 총독부의 검열로 원고가 삭제됐다. 1946~1947년 자유신문에 연재되고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15년 이상이 걸린 이 작품은 그간의 정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큰 개울 동쪽에는 원숭이 나라가 있었고 개울 서쪽에는 토끼 나라가 있었는데 서로 모르고 지냈다. 원숭이는 영악하고 싸움 싸우기를 좋아하고, 토끼는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살기를 좋아하였다.”

 

「토끼와 원숭이」의 첫머리다. 원숭이는 일본을, 토끼는 우리나라를 지칭한다. 원숭이들은 토끼 나라를 침략하고, 자신들처럼 ‘세상에서 제일가는 짐승’을 만들어주겠다면서 토끼들의 두 귀를 자른다. 원숭이가 남쪽에 있는 뚱쇠 나라까지 공격하자 뚱쇠들은 북쪽의 센이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원숭이를 물리친 뚱쇠와 센이리는 자기들끼리 다시 전쟁에 붙는다. 일제 치하의 민족 현실과 해방 후 제국주의 질서를 알레고리로 명쾌하게 나타낸 것이다.

 

1948~1949년 자유신문에 연재된 중편 동화 「떡배 단배」도 비슷한 이야기다. 조용했던 섬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배 한 척이 들어온다. 떡을 주는 떡배와 단 것을 주는 단배는 섬사람들의 입맛을 길들여 놓고, 섬에서 나는 귀중한 전복과 맞바꾸는 부당 거래를 한다. 또 떡배와 단배가 전쟁을 하는 와중에 섬사람들까지 두 무리로 나뉘어 전쟁을 치르기까지 한다. 이 동화 역시 강대국의 침탈과 전쟁을 우화의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마해송은 이렇듯 동시대 현실과 역사를 의인동화나 우화의 형식으로 풍자했다. 우화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현실을 알리는 데 적절한 수단이었다. 또 패권적인 세계 질서, 부패한 정권,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려는 의도에도 적합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마해송의 동화에는 가톨릭 신앙의 영향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1966년 유고작에 이르기까지 이후 십여 년간 그의 후기작을 아우르는 가장 큰 특징이자 변화이다. 

 

단편 「천사가 지켜준 아이」는 유괴되어 토굴에 갇힌 옥이가 기도의 힘으로 탈출하게 되는 이야기다. 토굴에 갇힌 옥이는 평소 습관대로 “임하소서, 성신이여! 하늘로서 네 빛을 쏘사 내 마음에 충만케 하소서”라고 저녁기도를 한다. 또 무서운 생각이 들자 “천주님, 이 집에 복을 내려주세요. 열두 종도(사도-필자 주)는 앞문 뒷문을 지켜 주시고, 천사를 아가를 지켜 주시고…”라고 되뇌인다. 며칠 후 근처를 지나던 경찰이 토굴에서 새어 나오는 눈부신 빛을 발견한다. 다가가보니 키 큰 장수들이 금빛 창과 은빛 도끼를 들고 토굴을 지키고 있었고 토굴 안에는 옥이가 천사의 날개에 감싸여 잠들어 있었다. 옥이의 기도대로 이루어진 장면은 마치 가톨릭교회에서 오랜 전통으로 이어지는 기적 이야기 한 편을 보는 듯하다. 

 

마해송의 후기작에서 선하고 순응적인 작중 인물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로 그려진다. 「모래알고금」의 임영수, 「토끼와 돼지」의 식모 아주머니, 「앙그리께」의 마산 할머니와 뒷집 할머니, 「비둘기가 돌아오면」의 수남이의 주인집 할머니 등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착한 인물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로 설정된다. 임영수는 가난한 이를 도우며, 식모 아주머니 역시 불쌍한 을성이를 아껴주며 늘 ‘하느님 사랑’을 역설한다. 마      산 할머니는 작품 초반에는 식모 영애에게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뒷집 할머니의 인도로 신앙을 갖게 되면서 영애를 마음 깊이 아낀다. 작중 인물의 성격이 변화될 정도로 가톨릭 신자인 인물들은 모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덕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들 인물들을 통해 당시 가톨릭 신자들에게서 두드러졌을 신앙과 삶의 자세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일이 “천주님 뜻”이기에 현재 주어진 삶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감사하는 태도다. 

 

단편 「꿈은 가슴마다」에서 피난길에 자식들을 여의고, 창수라는 아이를 우연히 기르게 된 아버지는 신앙으로 창수를 받아들인다. 

 

“‘집을 떠나지 말고 그대로 견디었다면 할머니도 돌아가시지 않고 명순이도 잃지 않고 동수도 물론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을!’ 그런 생각이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돌렸다. ‘아냐! 모두 천주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이 들 때면 창수에게 자연히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창수를 맡아 기르라고?’ 창수를 맡아 기르라고 천주님이 주신 것같이 생각되고 할머니까지도 창수를 맡아 기르라고 잔뜩 움켜잡고 계셨던 것같이 생각되어서 창수를 아끼고 사랑하기를 극진히 했다. 그것이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창수는 천주님이 주신 애야!”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도 까닭 없는 일은 아니었다.”

 

신앙 고백을 담은 수필집 「아름다운 새벽」에서 입교 전 마해송은 가톨릭 신앙에 대해 이성적으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의한다. 깊이와 통찰을 가지고 의문하는 가운데 성서와 교회 전통을 꾸준히 체화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다수 작품에서는 그러한 깊이와 통찰이 온전히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가톨릭교회의 신앙관과 인간관이 지극히 호교적이고 순응적으로 표방되어 있다. 어린이를 마냥 천사처럼 여기는 ‘동심천사주의’의 영향인 듯 가톨릭 신앙인도 천사처럼 그려진다. 가톨릭 신앙이 마해송의 작품에 미친 보다 의미 깊은 영향은 장편소설 「앙그리께」, 「모래알고금」 연작을 통해 확인된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31일, 김유진(아동문학평론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동화작가 마해송 (하)

 

“ 기도하면 사회 바르게 될까” 작품에 드러난 희망

 

 

- 국립어린이 청소년 도서관 안에 있는 마해송 문고 전시 공간. 맨 위에 작가의 사진이 있고 맨 아래에는 동화책 「떡배 단배」 「토끼와 원숭이」가 보인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마해송이 입교 후 발표한 장편 「앙그리께」와 「모래알고금」에서는 작가의 사상이 가톨릭교회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반공주의, 독재 정권 비판 등 작가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대사회적인 입장과 일치한다. 

 

1955~1956년 연재 후 1959년 가톨릭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된 「앙그리께」는 반공주의에 바탕해 6·25 전쟁 체험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정치상황이나, 종군문인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그의 이력에 비추어 생각할 때 반공주의는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동화에서 공산군은 인민재판으로 민간인을 죽이거나 각종 동원과 보급으로 민간인을 약탈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반공주의는 때로 가톨릭 신앙이나 가톨릭교회와 연관되어 표현된다. 작품에서 종종 공산군은 “마귀” 혹은 “악마”로 지칭된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존재와 성격이 규정되고 단죄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독실한 신자인 ‘뒷집 할머니’는 ‘마산 할머니’에게 자신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성당에서 종소리가 날 때마다 이 세상 어느 땅 어느 나라에서 살건 믿는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한마음으로 똑같은 축문을 올리는 거랍니다. 우리들, 이 한국 땅에서 공산 오랑캐에게 시달려서 갖은 고생을 겪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도 세계 각국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머리 숙이고 똑같은 기도를 천주께 올리고 있답니다.”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에 1957~1961년 연재된 「모래알고금」 연작에는 이러한 반공주의가 교회의 입장에서 보다 명확하게 그려진다. 이 동화는 ‘고금’이란 이름의 모래알이 사람들의 옷자락에 이러저리 옮아 다니며 자기가 보고 들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을 지닌다. 어느 날 ‘고금’은 주교의 수단 자락에 붙게 되어 주교의 유럽 교회 방문을 보고 전한다. 주교가 각국 교회를 방문하는 과정과 교황을 알현하는 모습을 소개한다.  

 

이어 주교는 파티마를 찾는데, 여기서 작가는 여러 차례에 걸친 성모 발현 과정을 매우 상세히 묘사하며 성모의 메시지를 인용한다. 

 

“사람들이 나의 원을 들어준다면 러시아는 회개하고 전 세계에 평화가 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나의 원을 듣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그의 죄악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 전쟁을 일으키고 착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많은 나라들이 망하고 세상은 암담할 것이다. 그러나 끝내는 나의 성심은 이기고야 말 것이다” 

 

「앙그리께」의 반공주의는 「모래알고금」에서 파티마 성모의 메시지가 인용되면서 더욱 분명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띤다.    

 

한편 「모래알고금」 연작 3부에서는 독재 정권 비판이 작품 전면에 매우 강하게 표현되는데 이 또한 가톨릭과 관련되어서다. 구두닦이와 식모 일을 하는 어린 아이들은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며 고달프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부정부패를 일삼는 대통령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을 지켜주는 하느님이 있기에 대통령의 그늘을 물리치고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소아마비를 앓는 태규의 엄마는 태규의 소아마비가 독재정권 아래 호의호식하는 태규 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하며 속죄와 구원을 위해 가톨릭에 입교하기로 결심한다. 이 작품은 태규가 자기와 놀던 비둘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적이고 상징적인 진술로 마무리된다. 이때 비둘기는 정치적으로 평화의 상징인 동시에 신앙적으로 성령의 표징이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사회 정의를 회복되는 일을 가톨릭 신앙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태규는 비둘기가 와야 병이 낫는다든지 병이 나아야 비둘기가 온다는 말인지 중얼거린 것입니다. 어머니는 비둘기가 와야만 병이 낫는다는 뜻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세(영세-필자 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죄를 씻고 세를 받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어머니는 딴생각을 하며 태규의 말이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태규 아버지가 벼슬자리를 그만두고 지은 죄를 씻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태규 아버지가 그 자리를 내놓을 것 같지는 않으니 차라리 늙고 병든 대통령이 거꾸러지면 이것도 저것도 모두 시원하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해송 동화에 나타난 반공주의와 독재 정권 비판은 1950,6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일치한다. 노기남 대주교의 친미, 반공적인 입장은 잘 알려진 바 있다. 한편 이승만 정권과 잠시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가톨릭교회는 그 어떤 집단보다 강력하게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기도 했다. 즉 마해송 동화에 나타난 도저한 독재 비판은 그의 전 생애와 작품 전반에 나타난 사회 비판 정신과 아울러 그가 한국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평신도로서의 삶의 영역에서 수용하고 이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 개인의 사상임과 동시에 가톨릭 신앙과의 관계를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경향신문의 정간과 복간에 따라 작품이 변화한 양상은 신앙의 영향을 반증한다. 경향신문이 독재 정권 비판으로 1959년 4월 30일 정간된 뒤 1960년 4·19를 지나 4월 28일 복간되자마자 「모래알고금」의 연재도 재개된다. 연재가 재개되는 지점은 「모래알고금」 연작 2부의 중후반부인데 이 지점부터 독재 비판의 목소리가 선명해지고 작품의 주제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연작 1부에서 신앙은 사회 정의와 관계없는 개인 차원의 선함으로 강조됐지만 연작 3부에서는 신앙이 사회 정의에 대한 희망이나 의지와 겹쳐 나타난다. 경향신문 정간과 4·19를 거치면서 마해송의 신앙이 당시 교회의 대사회적인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가운데 보다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됐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7일, 김유진(아동문학평론가)]



3,60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