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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신학ㅣ교부학

[교회] 어떤, 교회: 교회 언어에 관한 몇 가지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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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3-22 ㅣ No.806

[어떤, 교회] 교회 언어에 관한 몇 가지 의문

 

 

자매 형제 여러분

 

저는 미사 때 “형제, 자매 여러분”을 “자매, 형제 여러분”으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중학교 2학년 여자 아이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미사 때 자매, 형제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하세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자매, 형제라고 하는 게 이상해?” 학생이 대답했지요. “그렇게 말하는 걸 처음 들어봐서 이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요.”

 

“이미 여고/남고, 여의사/남의사 등으로 차별적인 분류를 하고 있는 사회구조에서는 어떤 명칭이든 차별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회적으로 남녀 평등, 여남 평등이 이루어졌다면 ‘부모’라고 하든, ‘모부’라고 하든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김슬옹,「차별의 말 대신 배려의 말로!」)

 

형제 자매나 자매 형제나 다를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다르거나 특별하게 들린다면,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있는지 그 모습을 성찰해 봐야 하겠죠.

 

 

동정녀

 

성인들의 기념일 미사에는 동정 순교자 기념일이 있습니다. 남자 성인들 중에는 동정남 기념일이 없고 그런 말을 붙이지 않지만, 여자 성인들의 많은 경우에는 ‘동정’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에 관한 모습 중에 ‘평생 동정’이 강조될 때도 많죠.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 여성사」에서 12세기 무렵, 자연법에 근거해 교회법은 여성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확증했고, 교회내 여성 실존의 이상은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금욕의 삶을 사는 수녀로 제시했다는 걸 짚어냅니다. 이런 맥락에서 ‘순종’을 미덕으로 한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숭배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중세 말쯤에는 또 다른 극단으로 마녀에 관한 망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인들과 성모님에게서 ‘동정’의 모습을 넘어 무엇을 더 바라보고 본받아야 할지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교회 안에서 강조하는 성모 마리아 모델은 여성의 수동성과 순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신학자들은 가부장적 교회가 강요하는 마리아상을 거부하고, “세상을 품어 안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성”을 더 부각시키고, 마리아에게서는 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 루카 1,46-55)을 통해 자율적으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응답한 “예언자적 여성”, 남성 지배에 예속되지 않은 “독립적 인격체로서의 여성상”을 그려내고 있다.(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교회의 남성주도권에 이용되는 마리아 신심」)

 

 

교종과 교황

 

저는 미사 중 감사기도 부분에서 “교황 프란치스코” 대신 “교종 프란치스코”로 바꿔 말합니다. 교황과 교종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제가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교회론 수업을 들을 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을 깊이 다뤄 온 비탈리 교수님 강의가 기억에 남습니다. 비탈리 교수님은 교도권과 관련해, 신약성서와 초기 교회가 교회 안의 직무를 지칭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말로 ‘봉사직무’(ministerium)를 사용했지만, 16세기 개신교의 분열을 겪고 가톨릭교회는 ‘교도권’(magisterium)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고 강조했습니다. 봉사직무는 섬기는 작은 사람(mini)의 직무를 드러내지만, 교도권은 가르치는 권한을 지닌 큰 사람(magis)의 직무를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은 교회와 세상에 대해 ‘권한’을 행사하는 권력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반면 교종은 교회와 세상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의 위치성이라고 볼 수 있죠.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을 따르는 교회의 지도자는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이밖에도 교회에서 사용되는 말에는 외국말이 번역된 것과 신학적인 내용이 녹아 있는 말이 많습니다. 언어는 서로 간의 관계와 역사 및 문화적인 맥락, 시대의 어떤 조건이나 편견이 녹아들어 있는데, 우리는 그 말들을 습관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사용합니다. 겹겹이 싸여진 언어가 벗겨지고 부서질 때, 우리가 교회를 좀 더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월간빛, 2024년 3월호,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성김대건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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