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8일 (토)
(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교회문헌ㅣ메시지

2017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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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17-04-21 ㅣ No.835

2017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서울대교구 

춘천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대구대교구

부산교구

청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온 세상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우리는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특별히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남북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의 평화가 충만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이자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는 중심 내용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이며, 모든 두려움과 불확실함, 모든 의혹과 인간적인 계산을 날려주는 강력한 바람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2006.10.19.) 주님의 부활로 우리 모두의 마음에 절망이 아닌 희망의 불씨가 피어나 온 세상에 가득 퍼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특히 올해 예수 부활 대축일은 세월호 참사 3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모든 분들과 유가족들에게 끝없는 위로와 기도를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미수습자들도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도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 더 이상 무죄한 이들의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국민 모두가 생명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고, 이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빈 무덤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요한 20,1 참조) 무덤이 비어있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을 들은 두 제자는 예수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과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실제로 보았습니다.(요한 20,3-6) 주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어둠이 빛을, 불의가 정의를, 미움과 증오가 사랑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세상에 증거하셨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께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칭송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예수님의 임종을 지켰고, 슬픔 속에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이로써 그녀는 그리스도 부활의 첫 목격자이자 첫 증언자가 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녀가 예수 부활을 알렸기에 두려움에 떨던 주님의 제자들이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희망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혼란과 불안을 간직한 채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헌정 사상 처음인 현직 대통령의 파면은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깊은 슬픔과 함께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게 했습니다. 이 어려운 난국에서도 온 국민이 인내와 슬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변화의 시작에서 우리나라는 새로운 봉사자를 뽑는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선거와 그 결과가 국민의 화합과 일치를 이루고 참다운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대선은 어느 때보다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공동선과 정의를 실천하며 우리나라의 통합과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봉사자를 선출해야 합니다. 국민으로부터 선택받은 새로운 지도자가 갈등과 분열을 뒤로하고 화해와 일치를 통해서 화합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혼자 변화를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과 함께 국민으로 하여금 변화를 이루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우리나라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좋은 지도자를 보내주시길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이며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즉 부활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에페 4,24 참조) 낳고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인류를 낳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끝내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가져오며 그 변화의 종착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주님의 제자들처럼 부활 신앙을 간직하고 새롭게 변화되어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나부터 새롭게 변화되면 부활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지금 우리 교회가 실천하고 있는 신앙 운동인 ‘답게 살겠습니다’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삶과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형성되실 때까지 그분을 닮고자 노력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주님께서는 부활을 증언하며 어둠을 물리치고 다양하며 선하고 긍정적인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려는 우리 모두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하실 것입니다.(마태 28,20 참조)

 

다시 한번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을 맞아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께 주님의 빛과 생명과 평화가 한반도에 가득하도록 전구 해주시길 청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춘천교구]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 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둡고 불안했던 우리의 삶 속에 희망이 다시 비춰집니다. 그 희망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마태 20, 28) 오신 예수님의 영광스런 부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이 희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쁨의 보증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희망을 낳고, 희망은 기쁨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희망과 기쁨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힘겨움 속에서도, 삶의 노고와 실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건네시는 희망과 기쁨의 선물이 여러분 삶 속에 가득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사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는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 속에서 미움과 분노로 아파하였습니다. 희망보다는 절망 속에서 힘들어 하였고, 기쁨 보다는 슬픔 속에서 눈물 흘렸습니다. 진실된 대화 속에서 함께 바른 것을 찾기 보다는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며 등을 돌리는 모습을 서로에게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분열과 갈등의 시간 속에 아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분열과 갈등을 이겨내야 합니다. 새로운 부활의 희망과 기쁨을 간직한 우리 신앙인들은 용서와 화해를 세상 속에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하게”(에페 4,1)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평화”(콜로 3, 15)를 세상 속에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평화의 사도로서 우리는 많은 혼란과 분열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 안에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화해와 일치의 삶을 먼저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얼마 후면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통해 나라의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를 일치와 번영으로 이끌 올바르고 좋은 지도자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끝내고 화해와 용서를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안정된 질서와 올바름이 살아있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신앙인들도 기도와 참된 신앙인다운 삶으로 다같이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희망과 기쁨의 길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어두움을 벗어버리고 참된 빛을 향해 다함께 걸어갑시다. 그런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주오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 19)

 

2017년 부활절에

 천주교 춘천 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

 

 

  

[대전교구]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사랑하는대전교구자매, 형제 여러분!

 

그 어느 해보다 깊은 절망과 희망의 교차짐에 서서 부활선포와 축하인사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하느님이 없는 세대, 예수님의 부활 선포에 가 볍게 고개를 돌리는 세상입니다. 누구를 탓할 수 없습니다. 점점 극악하고 잔인한 양상을 보이는 살인사건들이 보도됩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무자비한 테러는 종교의 의미를 스스로 무너뜨립니다.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 거부하는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야만적인목소리가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세상입니다. 젊은이들의 소박한 내일이 절박한 위기에 처한 시대입니다. 노동을 통해 존엄성을 실현하며 건강한 내일을 준비하려는 꿈마저 사치로 느끼는 그들의 눈에 두려움이 가 득함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적 번영을 달성한 21세기 자회상입니다. 포용과 배려, 공존의 윤리는 무한경쟁과 살기僚洙0어린 생존법칙, 자폐적인 불감증에 그 자리를 내어줍니다. 절망의 시대입니다. 그 어디에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이러한 시대의 어둠에서 우리는 또한 희망을 봅니다. 엄청난 노력으로 교사가 된 20대의 젊은이가 불과 몇 살 어린 제자들을 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구명조끼를 양보한 숭고한 죽음에서 희망의 빛을 봅니다. 생명의 위기마저 느꼈을 압력을 견디며 사실을 증언하고 정의를 지켜낸 이들의 용기와 화재 현장에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끝까지 뛰어다녔던 분들의 희생에서 인간과 세상의 희망을 봅니다. 이기심과 생존의 본능조차 꺾을 수 없는 사랑과 정의의 힘이 희망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부재가 자연스럽게 받이들여지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선포는 이처럼 희망을 증거하는겁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악으로 가득찬 시대에 사랑과 정의를 실천 하는 일은 세상의 조롱과 비난, 협박을 받는 자리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관심과 폭력성의 노도에 맞서, 양심과 사랑을 증언할 때 발생하는 마찰이 빚어내는 빛과 소리가 세상의 눈과 귀를 하느님께 돌려놓습니다. 우리의 증거가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 안에 심어 놓은 양심과 선성을 일깨우고 그들이 참 인간과 하느님을 찾아 나서게 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며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께서 이기심과 안주의 유혹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 구원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부활로 초대 하십니다. 우리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이 드러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궁극적인 희망이며 유일한 구원자로 선포됩니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께서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힘을 주시기에, 우리는 그 손을 잡고 기쁜 마음으로 견디며 세상 구원에 동참합니다. 

 

2017년 의 부활에는 그 어느 해보다 큰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회개와 사죄로 변화된 우리 사회에서 슬픔이 희망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오늘, 최소한의 준법과 양심만으로도 살릴 수 있었던 귀중한 생명이 가장 귀중한 시간을 놓친 당국과 선원들에 의해 스러져 갔습니다. 그 죽음 앞에 온 국민은 슬픔과 분노에 머물지 않고, 사회의 불의를 방관한 우리들의 죄를 사죄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변화의 촛불을 밝혔습니다. 교회도 빛과 소금, 예언자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했는지를 치열 하게 반성 하며 그들과 함께 울고, 국민과 함께 촛불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으로 드러난 세상의 악이 우리의 사죄와 사회의 근본적 변화로 이어질 때 스러져 간 죽음이 부활합니다.

 

성경은 두려움에 갇힌 제자들의 부활체험이 부활신앙의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정의와 사랑을 위해 십자가 길을 걷는 삶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부활 체험과 변화된 삶이 신의 죽음을 선포 하는 세상에 하느님 체험과 부활체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으로 세상올 바라봅시다.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에도 함께 하시길 빕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17년 4월 16일 부활대축일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유홍식 라자로

 

 

  

[인천교구]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쁜 사건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모든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신앙을 체험하였고, 이를 증언하였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이들은 “주님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셨다”(루카 24,34 참조)라고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증언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공동번역』, 1코린 15,14)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면서, 부활의 기쁨과 중요성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성서와 성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은 우선 베드로와 열두 사도였으나, 그들뿐이 아니었다. 바오로는 야고보와 모든 사도 외에도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42항)라고 예수님 부활을 알리며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부활은 그 부활을 체험한 증인들로부터 계속해서 전해져왔고, 우리도 신앙 선조들의 증언을 통해 그 부활의 은총과 기쁨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고를 넘어선 초월적인 사건이기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예수님 부활을 의심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기에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부터 가르쳐 온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도다.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도다.’(비잔틴 전례, 부활 대축일 마침기도)라는 신앙의 진리를 하나의 아름다운 시(詩)로만 이해할 뿐, 진정한 신앙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믿기를 포기하거나, 우리 믿음 안에서 예수님 부활만은 저버리고 신앙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과 늘 함께 하였던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고 성서는 전해줍니다(마태 16.21-23; 17,22-23; 20,17-19). 이는 사도들에게 당신의 부활에 대해 깊이 있게 가르쳐주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이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모습 앞에서도 제자들은 부활이 불가능한 것으로 느낄 정도였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까지 “더러는 의심을 품었다.”(마태 28,17)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려는 가장 큰 사랑의 드러남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인간 구원을 약속하신 하느님 말씀의 실현이자 성취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시는 동안에 하셨던 말씀의 실현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일 때, 예수님 부활은 인간이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사건으로 각자 자신의 신앙 안에 싹트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충만함을 느끼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죽음에 실망한 제자들은 체념하듯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는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 부활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빵을 나눌 때”(루카 24,30 참조)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즉 성체성사 안에서 그들은 눈이 열려 부활에 대하여 확신에 찬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한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요한 21,1-14). 제자들은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할 때,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게 됩니다. 성서는 말씀에 대한 믿음과 성체의 식탁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고 증언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에서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그 사랑의 힘으로 부활하셨기에,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도 그 부활을 알고 믿게 되고 증언하게 됨을 성서는 알려줍니다. 이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이 성체성사의 모습처럼,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해 나아갈 때, ‘나’ 만이 아닌 모든 이들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삶으로 점철되어 갈 때, 우리는 부활한 주님을 알아가며 믿을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2017년 부활을 맞이하며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3년 전 오늘을 기억합니다.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던 청소년들이 차디찬 물속에서 생명을 잃은 슬픈 사건을 기억합니다. 아직도 그 진실이 묻혀 있음이 우리를 더욱 더 슬프게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그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진실의 은폐는 죽음이고, 진실의 드러남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017년 부활 대축에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말씀에서 사랑을! 성사에서 은총을!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 가정에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1. 부활 ? 하느님의 사랑과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버려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섭리하신 ‘최고의 사랑’입니다. 한처음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여정 안에서 당신의 지고한 사랑으로 인간을 빚어내셨습니다(창세 1,26; 2,7 참조).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며 번성하게 하셨습니다(창세 1,28-30 참조). 피조물은 완전하신 하느님의 품위에 걸맞은 최상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탐욕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인간은 죄와 죽음의 세력 아래서 종살이하는 비천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로마 7,24 참조).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죄의 종살이에서 아파하며 신음하는 인간의 절규를 모르는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손상된 인간의 품위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탈출 3,7-9 참조). 결국,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들어온 죄를 없애버림으로써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 본래의 품위를 회복시켜 주기로 작정 하셨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10항 참조) 그런데 인간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 어떤 피조물의 희생으로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느님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시어 죄의 세력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직접 인간이 되시어 그 죽음을 쳐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비로소 인간을 구원하시고 손상된 창조질서를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에페 2,1-10; 히브 5,1-10 참조).

마침내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이었고 최상의 선택이었습니다.

 

2. 죽음 ? 이기적인 인간의 사랑과 선택

하지만 아직 주님의 부활에서 오는 빛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죽음의 어둠에 잠겨있는 인간은 여전히 삶을 근심하고 걱정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버리는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마태 8,24; 14,30 참조).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역설적이게도 ‘생(生)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납니다(루카 12,16-21 참조). 인간은 더 오래 살고 싶어 하고, 더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서슴없이 이웃의 당연한 몫을 빼앗으며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을 선택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세상의 질서는 이러한 생(生)에 대한 집착과 끝없는 욕망 앞에서 더욱 공고(鞏固)해집니다. 비록 자신보다 더 강한 자 앞에서 비참하게 굴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나보다 약한 자를 지배하고 억누르면서 더 나은 처지를 도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오늘날 현실은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약자의 희생을 대가로 얻어지는 이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강자에게 집중되면서 끝없는 희생을 양산합니다. 이러한 희생은 죽음의 문화를 확산시켜 온 세상을 깊은 어둠에 잠기게 합니다. 이로 인해 가치 질서가 혼란해지고 선과 악이 뒤섞여버린 오늘날에는 각 개인은 물론 집단적으로도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타인의 이익은 생각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이미 참된 형제애의 광장이되지 못하고 있고, 이기적으로 증대된 인간의 힘은 인류 자체의 멸망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사목헌장』 37항 참조)

 

3. 새 생명 ? 이타적인 사랑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도 바오로는 주저하지 않고 외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콜로 3,1).

하느님께서는 이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에 새 생명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이는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그 사랑의 힘으로 다시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악마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장 참조).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갈라 3,26 참조) 우리들이 선택해야 하는 삶의 기준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기적인 욕망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더럽고 추잡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철저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흘러나오는 생명과 사랑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선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4. 생명 사랑과 인간 존중

지금 온 국민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혼란과 외교적 어려움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국민 모두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더 좋은 세상이 펼쳐지기를 염원하고 있기에 우리의 선택은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국민의 행복을 책임질 대선후보들이 사람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또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을 선택하셨듯이, 각 정당의 대선후보들이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마음과 의지가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하느님보다 더 우선되는 가치와 척도는 없기 때문입니다.

 

5. 특별한 기도와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인 오늘은 수학여행을 떠났던 가녀린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시대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만 3년이 되는 날입니다. 다행히 며칠 전 세월호가 긴 침묵의 시간을 깨고 무사히 인양되어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동안 세월호는 9명의 미수습자와 함께 어두운 바닷속에 가라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이 하루속히 가족들 품 안에 안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세월호 참사로 인해 아직 규명되어야 할 많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참사로 인해 평생 상처를 지니고 살아야 할 희생자의 가족들, 생존자들과 그 가족들, 구조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분들과 가족들, 3년의 세월을 함께 견디고 아파하며 수고한 모든 사람들, 이들은 모두 우리 사회가 기억하고 위로하며 그 상처를 보듬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그리고 이 참사의 진실이 밝히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어 우리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과 온 세상에 희망의 불을 지펴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시며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2017년 4월 16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2017 교구장 부활절 메세지 

 

 ┼ 찬미 예수님,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 축일을 여러분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지난 사순절을 열심히 지낸 만큼 기쁨이 더 클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목표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서 예수님의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은 기억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만난 제자들의 기쁨이 2000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사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그 점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 코린 15, 13-14).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희망은 ‘장차 있을 우리들의 부활’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아주 오래전에 빛을 만드시고, 해와 달과 별들로 우주를 채우시고, 마침내 지구를 만들어 사람을 살게 하신 섭리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수백억년의 세월을 넘어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처럼 영원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처음부터 지녀왔던 꿈이었습니다. 인류는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은 꿈’을 지녀왔습니다. 그 때문에 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정성껏 무덤에 모셨습니다.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그러한 꿈을 하느님이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은 우리의 희망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저자들과 함께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세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이 희망과 기쁨은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어려움들과 어둠이 맴돌고 있습니다. 정치적 음모와 경제적 이기심과 사회적 분열이 휘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이 희망과 기쁨을 앗아가지 못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기쁨과 평화를 기도합니다.

 

2017년 부활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지 않으면”

(요한 12,24)

 

 부활의 기쁨이 온 세상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기를 바라며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은 죽음의 두려움과 죄의 어두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희망을 안겨주는 기쁜 날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되었던 죽음은 삶이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믿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이들에게 신앙의 기초이며, 희망의 근거입니다. 부활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두려움이나 절망과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부활의 신비이며 진리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때로는 희생이고, 때로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는 것이고, 때로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를 외면한 채 부활의 영광만을 찾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촛불과 태극기가 하나 되는 부활의 은총을 구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세상은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펼쳐지는 무대입니다. 죄악과 어두움이 있는가 하면 절망과 고통의 십자가가 있고 이를 극복하려고 애쓰는 노력들도 있습니다. 이런 세상 안에서 교회가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믿음과 부활의 신앙을 증거해야 하며,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마태 5,13) 할 소명 역시 잊지 않아야 합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우리 사회에는 엄청난 두 가지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부활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고, 두 가지 사건 안에 우리나라의 새로운 부활을 바라는 간절함이 담겨있기에 오늘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는 국정농단 사태로 나라가 온통 부서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급기야는 대통령이 파면되는 상황을 맞이한 사건입니다. 신성한 국가의 중요한 일들이 몇몇 사람들의 농단에 의해서 더렵혀졌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엄청난 비리들은 우리나라가 성숙한 법치국가요 민주주의 사회로 성장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의 존재를 실감케 해주었습니다.

 

지난해 10월 말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국민을 귀하게 생각하며 마음에 품고 지내지 못하는 대통령에 대한 슬픔과, 영혼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던 무책임한 관료들에 대한 노여움을 보여주었고, 진정한 민주주의와 참된 지도자가 태어나기를 간절히 보여준 소중한 행렬이었습니다.

 

또 한편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서 있었던 태극기의 물결도 기억해야 합니다. 태극기를 흔든 분들 가운데에는 어려운 시대를 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어 낸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을 이겨냈고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뼈저리게 체험한 분들이기에 진심에서 우러나와 나라를 걱정하며 또 다른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평화롭고 참다운 민주주의가 세워지는 나라로 나아가기 위해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참된 평화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하나 되려는 마음들이 모아져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선물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하나 되려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실현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평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부활의 거룩한 밤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돌들을 치우며 부활을 맞이합시다.

 

또 한 가지 사건은 바다에 침몰했던 세월호가 이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3년 전 성삼일이 시작되는 날 침몰했던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모든 악습과 병폐를 안고 바닷 속에 가라앉았다가, 이제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채 헝클어지고 할퀴어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많이 탓해 왔듯이 대한민국호를 상징하는 세월호는 수많은 비리, 잘못된 관행 그리고 무책임함 같은 이 사회의 총체적인 잘못들이 침몰시킨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눈물로 애원하며 진실을 밝히려는 유가족들과 국민, 그들의 진정한 마음을 외면했던 사람들…. 침몰한 후 부활을 향해 가는 사순절 막바지에 나타난 세월호는 우리에게 부활의 참된 의미를 묵상하게 해줍니다.

 

부활은 우리가 진실과 정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지 않으면’(요한 12,24) 안 되는 우리의 결심과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직 우리 사회는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들이 많이 있고, 세월호를 침몰시켰던 우리 사회의 더러운 돌들이 남아 있습니다. 무덤에 있던 돌들을 치우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 사회의 많은 죄악의 돌들을 함께 치워나가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죄악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우리가 이 시대의 죄악과 어두움을 몰아내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부활의 빛으로 비추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향해 떠나’(마태 28,10)갔듯이, 이제 우리는 우리의 갈릴래아,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메말라 있는 갈릴래아로 떠나도록 합시다.

 

2017년 부활 대축일,

교구장 이 기 헌 베드로 주교

 

 

  

[대구대교구]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의 부활을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며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시어 고통과 죽음의 절망 속에 있는 우리들을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분의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 났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의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막을 내렸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로 우리는 구원되었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안하냐?”

 

부활 성야 미사 때 마태오가 전하는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나타나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보잘 것 없고 나약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슬픔에 찬 그들에게 다가가시어 평화의 안부를 물으십니다.

 

최근 우리의 삶은 참으로 평안하지 못합니다. 지난 몇 달 간 촛불과 태극기로 뒤덮인 광장에서 힘겹게 민주주의를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결국 최순실 국정농단 등으로 인해 탄핵되고 구속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수사 중이거나 재판 중에 있습니다. 정치가 이러하니 경제 상황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핵문제는 풀릴 기미가 없고, 주변국과의 관계는 더욱 첨예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도 희망원 사태를 계기로 성찰과 쇄신으로 나아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월호가 바다 속에 가라앉은 지 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3백여 명의 희생자를 낸 엄청난 재난이었지만 아직도 미수습자가 있고, 정확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봄은 왔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뚫고 여린 새 생명이 싹을 틔웠습니다.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도 바다 위로 들어 올려져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온갖 부정과 비리는 밝혀지고 나라가 안정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도 성령의 도움으로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쇄신을 향한 노력을 해 나갈 것입니다.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희망이요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두의 삶이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왔습니다. 우리의 온갖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은 희망입니다. 우리도 과거의 잘못과 낡은 악습과 어두운 절망은 모두 무덤 속에 묻어 두고 희망 가득한 새 삶으로 부활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것이고,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 환 길(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절을 맞이하여 모든 분들께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빌고 싶습니다. 

 

부활절과 생명이라는 말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흔히들 부활이라는 말을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훨씬 더 깊고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바오로 사도가 말한 ‘우리 모두는 변화할 것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으로 종말을 맞는 허무한 인생인 것 같지만 실상은 생명으로 변화하는 의미 있는 길을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의 중요한 메시지는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사랑의 길이 새로운 생명의 차원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생명의 기운을 돋우는 것은 ‘사랑의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바야흐로 이번 봄은 정치의 계절입니다. 대통령을 뽑는 일로 대한민국 공동체는 분주합니다. 부디 우리의 공동체가 새로운 생명력을 꽃 피우는데 ‘권력의 힘’만을 생각지 않고, 섬기고 희생하는 ‘사랑의 힘’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을 통한 충만한 생명의 봄을 기원합니다.

 

천주교부산교구장 황 철 수 바오로 주교

 

 

  

[청주교구]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2. 오늘 복음인 요한 복음은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았던(요한 19,25 참조)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어디에 묻는지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다음날은 안식일이었기에 무덤에 갈 수 없었던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이른 아침 서둘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던 것입니다(요한 20,1 참조). 놀란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사실 앞에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누군가가 꺼내 갔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간 뒤에도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증언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찾아갔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였습니다.

 

3. 아직도 어두운 새벽,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가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아니라 치워져 있는 무덤 입구의 큰 돌과 빈 무덤이었습니다. 무덤 입구의 치워진 큰 돌과 빈 무덤! 그 자체가 바로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검으로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시어 세상으로 나가셨기에, 무덤을 막았던 돌은 치워졌고 무덤은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었던 그 돌은 치워졌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마침내 영원한 생명과 세상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4. 최근 한국사회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에 대한 파문 결정 이후, 불신과 반목, 비방과 대립의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탄핵을 찬성하는 국민과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은 대화와 화합을 도모하기는커녕 상대방에 대한 극한 말도 서슴지 않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혼란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캄캄한 무덤에 누워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돌이 치워진 무덤 밖으로 나오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 역시 캄캄한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집과 독선의 무덤에서, 비방과 대립의 무덤에서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고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불의와 억압의 무덤에서, 불평등과 불공정의 무덤에서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평화를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합니다. 이 평화는 불의에 타협하여 잠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거짓 평화가 아닙니다. 더구나 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치적 타협이나 적당한 갈등 무마는 더더욱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어느 누구도 소외됨 없이 모든 이가 자신의 존엄성과 권리를 차별 없이 존중받으며, 사랑과 정의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비난과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화와 화합, 정의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 내야 합니다.

 

5. 또한 예수 부활 대축일인 오늘은 참으로 고귀한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침몰 대형 참사가 일어난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에게 경제 중심의 사고와 이윤만을 추구하는 탐욕의 위험 사회에서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는지 다시금 생각하며 올바른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진정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선거에는 온 세상과 바꿀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인간생명을 존중하는 정치인,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정치인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6. 무덤을 막았던 돌은 치워졌고, 우리의 구원이요 희망이신 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우리 부활의 보증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큰 기쁨이며 희망입니다. 부활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17년 4월 16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우리 모두 간절히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우리 교구 형제 자매 여러분

 사방에 꽃이 피는 새 봄과 함께 부활대축일을 맞이합니다.

한 분 한 분의 마음속에도, 각 가정의 식탁에도

 우리 예수님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빕니다.

 

주님 수난의 뜻을 새기고 동참해보려 시작된 이번 사순절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시리고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매화는 엄동에 피어 추위에 떨고, 어미는 어려서 되어 설움에 우네.”

소설 ‘일지매’의 서곡처럼 지체 높은 판서의 씨를 가진 계집종이 엄동새벽에 쫓겨나고 태어난 아기는 청계천 차가운 물속에 버려졌던 이 기막힌 사연이 마치 오늘날 가난하고 지치고 병들고 거리에 내던져진 사람들의 비참한 마음과 하나도 다름없이 느껴지니 이를 어찌 해야 합니까. 더욱이나 그 차가운 물속에 떠내려가다 건져진 태아의 운명보다 더 기막히게 영 잠겨 숨 막혀 죽어버린 세월호의 어린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처지가 어찌 저것과 다르다 하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우리는 부끄럽게도 또 한분의 대통령을 보냈습니다.

나라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대통령이었다 하더라도 이 비정상적인 나라를 자랑스럽다 할 수 없기에 우리 모두 부끄러울 뿐입니다.

 

통일을 대박이라 여기는 분들께 아주 조심스럽게 누구를 위한 대박인지 물어봅니다. 통일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북한 동포들은 우리 남한 기업의 매우 값싼 노동자신세가 될 뿐 얼싸안을 수 있는 한 나라 백성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통일은 오히려 촛불과 태극기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곳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태극기와 촛불이 서로 악의에 찬 거친 주장을 잠시라도 멈추고 우리가 왜 촛불을 밝히고 우리가 왜 태극기를 치켜들고 있는지, 뭐가 그리 미워서 남북 군사 대치보다 더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지 그 근원으로 돌아가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를 보고 양쪽 다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말없이 지켜보는 많은 국민과 함께 정말 조심스럽게 묻고 싶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나이 드신 그 많은 분들이 거리에 나와 저렇게 외치고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건 아마도 젊은 세대가 어르신들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께서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만큼 먹고 살게 한 우리의 노력을, 젊은이들이 한 마디로 ‘해먹은 사람들’로만 치부해 버린다는 괘씸한 마음을 갖고 계신겁니다.

그렇다고 어르신들께서 젊은이들을 대결해야할 대상으로만 보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르신답지 않은 태도일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당신들이 가르치고 키워내야 할 나라의 미래를 위한 자식들이지 남이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바르게 가르치고 보여줄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우리들의 왜곡된 삶의 태도이겠지요.

 

촛불을 든 분들, 아니 그 집회를 주도하는 분들께도 정의와 진실을 향한 ‘방법의 진정성’을 한번은 되돌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분노는 결코 정의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분노는 결집시키는 힘은 있을망정 결국 다시 분노로 이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한국의 찢어진 현실보다 더 험악했던 저 이스라엘의 막바지 시기에도 예수님은 다른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으니, 당신을 박해하는 사람에게까지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며 아버지의 뜻인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국민의 한 사람이니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어느 한 쪽에 합세해서 끝까지 투쟁하며 각자의 주장으로 끝장을 봐야하겠습니까. 아니면 빌라도처럼 나하고 관계없는 일이라고 불똥튀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먼 발치에 서서 관망하고 있어야 합니까. 이 모두 신앙인으로서 바른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여기에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인간이 가져야 하는 참된 자세가 조심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답이 없는 이 현실, 십자가외에는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앞에서 이제 우리는 신앙인답게 그 답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묻고 청해야합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립시다.

우리의 이 현실을 우리 손으로는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솔직히 아룁시다. 그러면 반드시 하느님의 영이시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답을 주실 것입니다. 이 답이야말로 우리의 편협하고 온전치 못한 바람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삶에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하느님의 바람(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라 믿고 또 믿을 뿐입니다.

이제 그렇게 간절한 기도 안에서 얻게 된 믿음의 내용정도만큼 각자 정직하게 실천하는 길, 그 길 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죽음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시고, 오직 사랑으로 죽음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의 삶을 부끄럽지 않게 잘 지켜 이 세상 주위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사랑의 인간으로 살아갑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마산교구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안동교구]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 

 

 <참으로 어리석은 어떤 사람이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이 트기 전에 마을에 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해야, 오늘은 떠오를 생각일랑 하지 마라. 지평선에 나타나기만 해봐라. 너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하늘의 구름이 붉게 타오르면서 사방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자연은 깨어 생명으로 돌아왔고, 새들은 새날을 맞으며 여기저기에서 지저귀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실망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 문과 창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햇살이 들어오는 구멍은 모두 막아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어둠 속에 주저앉아 되풀이해서 말합니다. “캄캄하다. 완전히 캄캄하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태양은 오늘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태양을 이겼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무덤을 돌로 막고 군인들에게 엄하게 지키도록 명한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과 아주 흡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떠오르는 태양을 막지 못했듯이 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밖에 있는 어떤 이의 힘이 아니라 무덤에 묻히신 그분의 힘으로 일어나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의 이러한 어리석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방해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죽음의 세력들에 의해 오늘도 반복되고 있지는 않는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온갖 어둠을 몰아내시고 죽음을 이긴 구원과 사랑의 승리자로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들을 밀쳐내셨듯이 새로운 생명의 길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를 물리치시고 부활의 새 아침을 여셨습니다.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하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듯했던 처참하고 절망적이고 어두웠던 그곳에서 찬란한 광채의 부활한 생명이 움터 나오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주님 부활의 힘은 이렇게 놀랍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님 부활의 힘에 대해 하시는 다음 말씀을 함께 마음에 새겨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또다시 곳곳에 부활의 싹이 돋아납니다. 이는 막을 수 없는 힘입니다. 가끔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고질적인 불의와 사악함과 무관심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어떤 것이 생명의 싹을 틔우고 언젠가는 열매 맺는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폐허가 되어 버린 땅 위에 끈질기고도 강인한 생명이 솟아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선이 다시 꽃피고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날마다 아름다움이 새로 생겨나고 역사의 풍파를 거치며 변모됩니다. 가치들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인간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늘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부활의 힘이고 모든 복음 선포자는 그 힘의 도구입니다.”(「복음의 기쁨」 276항)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리석은 사람이 떠오르는 해가 집안을 비추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 버렸듯이, 우리가 부활하신 그분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일은 적어도 없어야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회개를 통해 죄에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 위해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신 말씀대로 우리 각자가 함께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자’는 제안을 이렇게 드리고 싶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 …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아십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아십니다. 오늘날 흔히 사람은 내면에 있는 것, 자기 정신과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모릅니다. 흔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기 삶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1978. 10. 22,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즉위식 강론에서)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이지만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는 날이기도 합니다. 3년 전 오늘, 침몰하는 세월호와 함께 304명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당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이 죄 없는 학생들이라는 사실이 더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유가족들은 아직도 그날의 슬픔과 고통을 잊지 못하며 아파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정말로 가슴 아픈 재앙입니다. 그 책임에서도 우리 모두가 자유롭지 못한 국가적인 범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재앙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함께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분명하게 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생명을 함부로 대하거나 생명을 죽이기까지 하는 죽음의 문화와 세력이 함께 타협하고 공모하는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적인 차원에서든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함께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함께 기도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대의 메시지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부활의 힘을 믿는 우리들이 먼저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생명을 살리는’ 부활의 삶에 동참하면서 부활의 선포자가 되어 부활의 가치를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이요 생명이신”(요한 11,25)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 

 

2017년 4월 16일 예수 부활 대축일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루카 24,36 참조)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이미 비치고 있습니다.”(1요한 2,8)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온누리에 가득차고, 그 생명의 빛이 이 땅의 어둡고 고단한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의 징표인 평화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이 평화의 인사는 당신의 말씀을 믿지 못한 제자들의 불신과 절망을 믿음과 희망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스승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던 제자들의 마음에 기쁨의 불꽃이 새롭게 타오르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온갖 두려움을 떨쳐 내고 세상 사람들을 위한 구원과 희망의 증인으로 사는 길을 평화로부터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루카 24,36-49 참조). 평화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엄하고 소중한 존재로 바라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더 아름답게 변모시킬 수 있는 희망의 원천이기에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징표인 평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요한 23세 교황 회칙 <지상의 평화> 반포 50주년 연설에서 “평화 건설에 기초가 되는 것은 인간, 사회, 그리고 권위의 기원이 하느님께 있으며, 이 거룩한 기원 때문에 개인, 가정, 다양한 사회 그룹, 국가는 정의와 연대의 관계를 실현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부패하고 사유화된 국가권력을 거슬러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하여 일어난 시민들의 촛불은 평화의 징표였습니다. 우리 시민들은 비폭력의 촛불 집회를 통해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평화의 연대가 오만한 정치권력과 부패한 경제권력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온 세상에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평화야말로 보다 더 나은 인간 공동체, 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진정한 보증이요 징표임을 새롭게 확신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더욱 폭넓은 평화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평화 없이는 개인의 평화가 없고 또한 개인의 평화 없이는 공동체의 평화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 3년째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가족을 잃고 하늘까지 닿는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기억합니다. 아직 찾지 못한 가족들을 절박하게 기다리는 분들의 마르지 않는 눈물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아까운 생명을 죽음에 빠뜨린 참사의 진상이 의문의 여지없이 규명되어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의 슬픔과 연대 없이, 참사의 진상규명 없이, 우리 사회에 온전한 평화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 평화는 무엇보다도 시급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순담화 말씀대로, ‘타인을 선물로 바라보는 마음’이 바로 평화입니다. 타인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매우 소중한 보화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아 주시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곧 평화입니다(2016년 사순담화 참조).

 

그리고 남북관계의 오랜 갈등과 대립 역시 평화의 정신 없이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남북 간의 평화협정은 남북 간의 군사적?정치적 갈등과 적대적인 대립을 해소하고, 자주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남북 간의 평화협정을 위해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민간인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평화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의 국제관계는 더없이 위태롭습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만도 아니요, 적대세력 간의 균형 유지만도 아니며, 전제적 지배의 결과도 아니기”(사목헌장, 78항)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아니라 힘의 논리, 군사적 대결의 논리에 따른 균형으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언급되고 있고, 이러한 시도가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기여한 바가 없고 또 기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존엄을 존중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성실한 실천이 평화 건설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사목헌장, 78항)는 평화의 정신은 특별히 사드 배치와 관련된 주변 강대국과의 국제 관계에서 더욱 긴요하게 여겨집니다. 

 

 

새로운 나라를 위한 바탕인 평화

 

 

우리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촛불의 위대한 힘이 평화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처럼, 촛불 민심이 추구하는 새로운 나라는 우리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확고한 평화의 증인이 될 때, 비로소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는 5월 9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는 새로운 나라를 위한 열망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민주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사목헌장, 75항 참조). 우리나라 헌법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와 정신에 따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며, 헌법에 표현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고, 국토의 균형 발전과 모든 지역의 인재들이 차별 없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인사탕평책을 시행하며,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공존을 보다 적극적으로 증진시키는 국정 철학과 비전을 가진 그런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평화증진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길인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평화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로부터 비롯되어,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생애 동안 그런 평화를 추구하셨고, 자신 안에서 온전히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아니라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또 부자가 아니라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모습으로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셨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프란치스코 교황, 2017.3.12.)이며, 이 십자가로서 부활을 이루셨고, 평화의 길을 완수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평화의 길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평화의 길을 함께 걸을 때, 우리 각자는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이 또한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부활 대축일은 바로 하느님의 질서가 새롭게 이 땅에 선포되는 날입니다. 하느님은 그분을 해방시키시고,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낡은 세상은 끝나고, 새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마련한 위대한 이 파스카의 역사, 증오와 분열과 온갖 갈등에서 사랑과 화해 그리고 일치와 평화로 부활하는 파스카의 역사를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는 날이 되기를 빕니다. 

 

오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빛과 평화가 온 누리의 모든 이들과 우리 겨레, 특별히 희망을 잃고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골고루 비치기를 거듭 기도합니다. 알렐루야!

 

2017년 4월 16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

 

 

  

[전주교구]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이사 43,19) 

 

  1. 봄이 왔습니다. 냇가에 버들강아지가 돋아났습니다. 여기저기 꽃도 피었습니다. 얼었던 시냇물도 반짝이며 흐릅니다. 죽음의 계절, 혹독한 추위에 얼었던 땅이 녹고 모든 것이 되살아나는 대자연은 그대로가 죽음을 이긴 부활의 노래입니다. 열 번, 백 법을 보아도 감동은 늘 처음처럼 생생하고 신비롭습니다. 네 계절이 뚜렷하고, 특히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부활대축일을 맞는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 새삼 감격스럽고 감사합니다.

 

대한민국도 봄을 맞이했습니다. 모두가 어둡고 춥고 얼어붙었던 밤이 거의 새어, 밝고 따뜻하고 모든 것이 되살아나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에 새 희망이 싹트고, 따뜻한 기운이 온 국민의 마음과 마음 사이를 이어주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화려한 장미뿐 아니라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보아야만 눈에 띠는 작은 꽃, 낙락장송 뿐 아니라, 거기 기생해서 살아가는 작은 덩굴, 이 모든 것들이 서로 돕고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가듯이,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같지 않은 사람들이 어울려, 서로를 보충하고, 그 다름에 감사하며 함께 춤추는 세상을 그립니다.

 

그라나 두렵기도 합니다. 꿈은 그냥 꿈일 뿐, 현실에서는 빛보다는 어둠이, 따뜻함보다는 추위가, 화합보다는 다툼이 먼저 눈에 띠고 피부에 와 닿기 때문입니다. 꿈은 어린이들에게나 있는 것, 어른이 되면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고, 그 앞에서 꿈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모든 희망을 쓸어가는 현실 중에서도 가장 확실하고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인간이 언젠가는 죽는 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어린 시절은 끝난다" 이것이 현실임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인류 역사 최대의 건축물인 피라미드를 쌓은 파라오도, 중국 최초의 황제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진시황도 한낱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 불과합니다.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강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워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어떤 개인적 신념이 건전한 상식과 이성을 벗어나고, 그것이 종교의 색깔마저 띨 때, 얼마나 심하게 길을 잃을 수 있는지도 분명히 보았습니다. 새가 두 날개로 날듯이, 종교도 이성과 사랑이라는 두 날개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에만 개인과 공동체를 건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지도요 사랑은 힘입니다. 이성은 핸들이며 사랑은 동력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신 ‘말씀’ 곧 이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바로 앞두셨을 때, ‘사랑’ 곧 힘이신 성령을 약속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2.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 입양되고, 돈이 없어서 대학을 반년 만에 중퇴한 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은, 2005년 6월 12일 한 대학의 졸업식에 초대되어,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디기 직전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제가 17살이 되었을 때, 대략 이런 식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삶의 마지막 날처럼 살면, 어느 날엔가는 그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 때 이후 지난 33년 동안 저의 정신 속에 늘 살아 있었습니다. 저는 자고 나서 세수하고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계획했던 일을 그대로 밀고 갈 것인가?” 여러 날 계속해서 ‘아니다!’라는 답이 나오면, 나는 계획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제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저를 실질적으로 도와준 제일 훌륭한 길잡이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거는 기대, 온갖 자만심. 여러 종류의 당혹감 혹은 실패 등, 거의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 참으로 본질적인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생각에 덫처럼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알몸입니다. 마음속 깊이에서 나오는 소리를 따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죽어야만 거기 갈 수 있다면, 죽기는 싫어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가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것을 피해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음은 생명이 만들어낸 최고의 단일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을 변화시키는 촉매입니다. 죽음은 묵은 것을 치우고 새것이 들어설 여지를 만듭니다. 지금은 새것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은 서서히 늙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이 세상에서 치워질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사노라고 여러분 자신의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배고픈 사람으로 머무십시오. 끝까지 바보로 남아 있으십시오.”

 

3.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입니다. 렌즈가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불이 타오르게 하듯이, 죽음에 대한 의식은 사람의 능력을 ‘지금 여기’로 모아 놀라운 일을 하게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매일 죽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정신과 힘을 그 하루에 온전히 쏟아 부을 수가 있었고, 그 결과의 하나가 ‘아이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바깥> 삶의 방식을 바꿔놓은 이 놀라운 기계의 발명자로서보다, <안>에서 그를 지켜준 정신을 보여준 이 연설 때문에, 인류의 기억 속에 더 오래 살아 있을 것입니다.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

 

 

  

[제주교구]

‘이리 나와라!’ 

 

 ‘이리 나와라!’

 

금년의 봄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희망찬 봄입니다. 3년 동안 어두운 바다 밑바닥에 파묻혀 있던 세월호가 떠올랐고, 304명의 귀중한 생명을 수장해버린 우리 사회의 그릇된 구조와 관행과 악을 옹호하고 지키던 제왕적 권력이 허물어진 봄입니다. 생명의 봄 4월에 우리 모두는 새로운 시대의 막이 오르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며, 또한 피로 멍든 많은 가슴들은 차갑게 얼어붙어 땅 속에 갇혀있던 쌓이고 쌓인 한들이 따뜻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하늘 높이 승천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봄에 세월호 희생자들만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으로 갑자기 비통하게 사로잡혀간 많은 사람들이 기억납니다. 무더기로 해고된 KTX 계약직 여승무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 무효소송에 승소를 해서 보상금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2015년 대법원이 계약직 해고는 위법이 아니라고 최종 판결하였고, 이 판결로 인해 받았던 보상금도 도로 반환해야 했던 한 여승무원은 결국 자기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전철역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13년부터 해마다 열차에 치이는 사고로 네 명이나 죽어갔습니다. 철도에서, 제철소에서, 우리 산업 모든 분야에서 위험한 노동환경과 과도한 업무로 수많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희생되었습니다.

 

2014년 12월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때 문건 유출 혐의를 받던 최경락 경위가 엄청난 외부의 압박을 받고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그 시절 민정비서실의 책임자였던 김영한 민정수석이 청와대 내부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사직하였고, 반년 동안 술로 고통을 달래다가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2015년 4월 경제사범으로 조사 받던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자신이 돈을 건넨 지난 정권의 유력 인사들의 리스트를 호주머니에 넣고 북한산에 올라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그 리스트의 진실은 결국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 시위 때 전남 보성에서 상경하여 시위를 하다가 물대포를 정면으로 맞고 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칠순 노인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가 뇌출혈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10개월이 지난 2016년 9월25일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렇듯 원인도 밝혀지지 않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사죄도 없고 보상도 없는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들이 줄지어 이어졌습니다. 이런 죽음의 주인공들은 도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을까요? 누가 그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냥 잊혀져버리고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세상의 부조리가 그렇게 끝나도 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골짜기에 쌓여있는 바싹 마른 뼈 조각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 5-6)

 

이제 비로소 봄다운 봄이 왔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이렇게 따뜻한 봄이 오리라고 예상도 못 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봄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을 당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며 무덤에 묻힌 모든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과 비분에 위로와 환희의 목소리를 들려주실 것입니다. 마음이 북받치신 예수님이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듯이 이들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리 나와라!’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축복이 모든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2017년 주님 부활대축일에

 제주교구 감목

강 우 일 

 

 

  

[군종교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친애하는 교구민 여러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 특별히 평화의 은혜 충만히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1

 

사랑하고 존경하던 스승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처형되시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주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림으로써 사랑과 존경의 마지막 표현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살아계실 때만이 아니고 죽으신 후에도 변함없이 주님께 충실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무덤에서 엄청난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 라는 천사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라서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잠시 후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으로써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만나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부터 교회 전례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기억하는 전례와 관련하여 “기념일”에서 “축일”로 격상시키기로 결정한 것도 이 성녀의 삶이 우리 신앙에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복음의 중심으로 그리고 우리 믿음의 원천으로 보시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1코린 15,3-6) 그러면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팔삭둥이 같은”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바대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박해에 앞장섰던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능하고 학식이 풍부하고 열성에 넘쳤던 바오로를 사도들의 설교나 가르침으로는 개종시키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신 듯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커스로 향하고 있는 그에게 나타나시어 하늘에서 직접 부르시는 기적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를 개종의 길, 회개의 길로 이끄신 것 같습니다. 이 변화의 체험을 한 바오로 사도는 주님 부활 신앙의 위대한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도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라고 외치듯 선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으면서 “예수님, 당신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오 사람이시며 우리 구원자이심을 증명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도록 합시다.

 

 

2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고통에서 영광으로”라는 변화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여러 종류의 고통을 당합니다. 육신의 병이 주는 고통, 마음의 병이 주는 고통, 가족이 주는 고통, 사회가 주는 고통, 국가가 주는 고통, 세계가 주는 고통 등 많은 종류의 고통을 겪습니다. 고통은 밖에서 주로 오지만 내 안에서도 올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치유를 청하고, 주님께서 자비로이 치유해주시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저는 얼마 전 광주대교구가 고흥군과 함께 만든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이라는 영화 시사회에 초대 받아 참석했습니다. 이 영화가 곧 개봉되면 우리 신자들이 많이 관람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영화 감상이 하나의 훌륭한 피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전남 소록도에서 40년 넘게 한센병 환자들과 그 자녀들을 돌보다가 2005년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두 간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분은 이젠 우리 관심에서 멀어진 한센병으로 고통 받던 많은 환자와 그 자녀들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특징인 “섬김”의 자세로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아침마다 우유를 준비하여 모든 환자와 그 자녀들에게 갖다 주고, 전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보호 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환자들의 상처를 만지고 치료해주었으며, 때로는 몇 시간씩 걸리는 치료도 기쁘게 해 주었고, 늘 환자들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이분들의 간호활동과 애덕활동은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이 겪던 육신의 고통만이 아니고 마음의 고통까지도 치유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봉사가 이제 더는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고, 2005년 11월 폐가 될까 싶어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은 채, 광주 대주교님께만 말씀드리고 조용히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조차하기 싫을 정도의 정신적, 육신적 고통을 당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제자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 지극히 사랑하고 신뢰했던 제자인 베드로의 떠나감과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함, 불의한 심판, 침 뱉음과 채찍질과 조롱을 당하심, 머리에 가시나무관을 쓰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심, 무거운 십자가를 지심, 십자가에 못 박히심, 돌아가시기 전까지 세 시간 동안 못 박힌 상태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심 등 참으로 혹독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류를 죄에서 구하시기 위해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임을 아시고, 이 고통을 받아드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마침내 부활의 영광으로 바뀌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변화인지요!

 

 

3

 

친애하는 교구민 여러분,

우리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미 찬송 드리면서 “하느님,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하심을 굳게 믿나이다.”라고 마음속에서 큰 소리로 고백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묵상하면서, 이 세상의 어떤 고통도 받아들이고 견디며, 고통 안에 숨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면서, 고통 후에 찾아오는 영광의 희망을 지니도록 합시다. 한 고통이 지나면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오고, 어떤 고통은 오랜 기간 심지어는 일생 동안 지속하는 것을 경험하지만, 미래에 올 영광, 특히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영광에 대한 희망 안에서 고통을 인내하고 고통에서 배우도록 합시다. “고통은 잠시이고 영광은 영원합니다.”라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말을 마음에 간직하도록 합시다.

 

2017년 예수 부활 대축일

 천주교 군중교구장 유 수 일 F.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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