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9일 (목)
(자) 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백]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성경자료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원조의 잘못과 하느님의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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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03 ㅣ No.4841

[하느님, 뭐라꼬예?] 원조(元祖)의 잘못과 하느님의 자비

 

 

선하신 하느님의 선악과(善惡果)

 

창세기 2장과 3장은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들을 살게 하셨는데, 그들이 죄를 지어 그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저자는 하느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심과,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며 인간에게 적합한 법을 주셨으나 인간이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창세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지극히 친숙한 언어로 하느님을 묘사합니다. 즉 하느님은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위로 몸을 굽히시며 옹기장이처럼 일을 하십니다. 또 하느님은 인간의 고독을 걱정하시고, 동산을 거니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2,16)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넘쳐나는 아량을 보이셨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그루의 나무는 인간이 손대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시며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창세기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끔찍한 말씀까지 덧붙여 말씀하셨다고 소개합니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3,17)

 

 

선과 악을 안다 = 하느님처럼 안다

 

여기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셈족의 표현’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자신에게 합당한 지식을 넘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이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초인간적인 지식을 얻게 되는 것, 곧 하느님처럼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의 표현 그대로 정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창세기 저자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을 드려야 할 인간이 그분이 주신 법에 어긋난 삶을 살았다는 것’, 즉 ‘인간은 하느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지 않고 그분께 거역하며 악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저자는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과 고통과 죽음’을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거역에서 나오는 죄과’로 이해하였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어떠합니까? 계속되는 성경은 ‘항구하게 이어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2,18) 선악과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하느님께서는 온갖 짐승과 하늘의 새와 들짐승들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자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어주셨습니다. 과연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의 배려로 서로에게 알맞은 협조자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는 결국 남자와 동등한 여자의 지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자신을 위한 협조자로 바라보는 시각, 바로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각 아닙니까!

 

창세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나와 친근한 하느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보면서, 우리 자신 안에 벌어진 하느님과의 관계의 역사를 돌아보게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좋은 것들을 많이 주셨습니까? 나는 그 하느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고 있습니까? 나의 양심 안에서 들려오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매순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노력하며 살아갑시다!

 

 

인간의 죄악과 하느님의 구원의지

 

창세기 2장과 3장의 이야기를 계속 봅시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세상을 인간에게 맡겨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인간은 배은망덕한 행동을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에서부터 멀어져서 죄를 범하고, 그렇게 생겨난 죄는 더욱 커져 나갑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저자는 앞으로 펼쳐지게 될 이야기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 앞에서의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죄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관점에서 소개되는 이야기가 창세기 7장 이후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저자가 고대세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홍수설화의 무대를 창세기의 배경으로 설정하되, 그 설화를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라는 새로운 의미로 해석함은 물론이지요. 즉 인간은 하느님과의 경계선을 무시하고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오만함으로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확대되어 가는 인간의 죄악에 대해 하느님의 벌하심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복음: 창세기 3장 15절

 

창세기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버린 인간에게 희망을 던져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뱀에게 하신 말씀, 곧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하신 이 말씀을 성서학자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복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3,15)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란 개신교와 천주교 모두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고, 그래서 이를 ‘첫복음’ 혹은 ‘원복음(原福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인간들이 하느님을 배반하였을 때부터 하느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첫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과로 인한 하느님의 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불행의 시간부터 ‘구세주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구원에 대한 기대를 인간 안에 싹트게 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첫인간의 죄: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 (창세기 3장)

 

첫인간이 저지른 죄는 한마디로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께 불순종하는 이러한 죄’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죄’이기도 합니다. 즉 태초에 있었던 죄는 ‘태초 당시에 있었던 죄’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 저자가 첫인간이 범한 태초의 죄를 소개하면서 그 죄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사람들의 죄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도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는데 정말이냐?”(3,1) 뱀은 음흉하게 하느님을 불합리한 명을 하시는 분으로 제시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그분을 거역하도록 유혹합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3,2-3) 여자는 ‘만지지도 마라’는 말을 덧붙여 하느님을 더 가혹한 분으로 바꾸고 과장합니다. 넘치도록 풍성하신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외면하고 오로지 금지된 한 가지 것에만 집중하는 여자의 생각은 점점 더 비뚤어져 마침내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남자와 함께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렇게 태초 인간의 범죄 이야기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자신의 신분을 거부한 피조물 인간의 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피조물 이상의 것이 되고자 함으로써 하느님까지 거부해버린 인간의 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는지요? 레지오 단원 여러분!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 앞에 등을 돌리는 죄를 얼마나 자주 짓고 있습니까? 창세기를 묵상하며 내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크신 하느님의 사랑에 맞갖은 응답을 드리며 살기를 다짐합시다! 성모 마리아의 자애에 연약한 우리를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카인의 범죄(창세기 4장)

 

아담과 하와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형인 카인은 자라서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고, 동생인 아벨은 자라서 양치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주님께 두 형제가 제물을 바쳤는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만 반기셨고 이에 카인은 몹시 화를 내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그러셨을까요? 이스라엘 조상들이 원래 유목민이었으니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정확한 답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본문이 들려주는 주님의 말씀에서 아벨의 잘못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카인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아담과 하와처럼 카인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잘못을 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카인은 자신을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된 피조물로 보려하지 않았으며, 하느님께서 자신의 하느님으로 계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카인은 맏아들이 동생들보다 우선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인간적 기준을 하느님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형이 동생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간의 법칙을 무시하고 동생을 죽이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은 동생을 가엾게 여기지 않았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기는커녕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살던 땅을 동생의 피로 물들인 카인은 ‘이제 그곳에서 더 이상 수확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형벌이 자신에게 너무 과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보호해 주시고, 그를 해치는 자는 누구에게나 보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죄인인 카인에게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하느님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의 처지를 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 인간이 하느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을 집착하여 그분의 처신을 거부할 때는 죄로 이어지게 됨을 말해줍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생겨나는 질투와 그로 인한 크고 작은 잘못들은 어떠한가요? 카인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한 가지 일에 집착하여 살인으로 그 질투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나를 화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질투심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그러한 마음의 원인은 대게 남이 아니라 내 자신의 부족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크신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 자신의 부족함까지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됩시다! 죄의 뿌리가 되는 질투심을 극복합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2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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