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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억의 자리, 주한 교황대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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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고 헤아리고] 기억의 자리, 주한 교황대사관
2013년 춘계 정기총회에서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 대한 시복 추진 안건 제목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로 확정했다(주교 2명, 몬시뇰 1명, 신부 47명, 수녀 7명, 신학생 3명, 평신도 21명). 연구소는 2019년 2월 26~28일까지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와 함께 3일 동안 서울대교구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현장조사의 목적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분들의 탄생지, 활동지, 순교지, 묘소 등을 방문하여 시복 시성 전에 ‘공적 경배’가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때 첫 방문지가 ‘하느님의 종’ 패트릭 번(James Patrick Byrne, 方溢恩, 1888~1950) 주교의 사택이자 사무공간이었던 주한 교황대사관이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 출신 번 주교는 1947년 7월 17일 초대 한국 교황청 순시사(Apostolic Visitor)로 임명되어 10월 9일에 김포공항으로 입국했다. 그러나 사절관이 마련되지 않아 근 1년 동안 명동 주교관에 기거하면서 일을 처리했다. 노기남 주교는 사절관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노 주교의 「수첩」을 보면 “1947년 11월 26일 매우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사절관을 물색하기 위해 오후 3시 사직정 가옥을 사절과 함께 방문했다.”고 하고, 이듬해 2월 27일에는 “방 주교와 같이 박기효 집 가보고 사진 박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노기남 주교는 이때 집을 찾아 서울을 돌아다니면서 “일제 시대에 친일파와 일본인 고관들이 얼마나 좋은 집에서 살았는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고 했다(『당신의 뜻대로』, 1978). 두 주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2-2(자하문로26길 19)번지 일본인 기업가의 집을 교황 사절관으로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10월 1일, 번 주교는 살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집의 수리만 간단히 하고 짐을 옮겼다.
번 주교는 사절관으로 들어간 다음 해인 1949년 4월 7일에 초대 한국 교황 사절(delegatus apostolicus)로 임명되었고, 6월 14일에 명동 대성당에서 착좌식을 가졌다. 그러나 사절관으로 들어간 지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38선이 무너졌고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후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어 6월 27일에는 남대문으로 나가 피난가는 사제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6월 29일에는 부드 신부와 둘만 남게 된다.
“사절관에 남은 번 주교와 비서 부드 신부는 수요일 아침 일찍 사절관 앞을 지나는 소리를 들었다. 총성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번 주교는 집주인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있음을 인민군들이 알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 두라고 했다. (그들에 의해) 저녁이 되기 전 옮길 수 있는 모든 것은 집 밖으로 들려 나갔다. 다음 날 아침을 먹으려고 보니 집 안에는 그들이 겨우 한 번 마실 수 있을 정도의 커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번 주교는 쓴 웃음을 지으며 오늘 6월 29일이 메리놀회 창립 기념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시복 자료집 제1집, 2018, 138쪽)
사절관의 성물은 이미 근처 세종로 본당 주임 이선용 신부를 불러 실어 가게 했다. 번 주교는 사절관이 텅 비어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었기에 부드 신부와 함께 예전에 머물던 노기남 주교의 명동 사제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거기서 지내다가 7월 11일 저녁 무렵 사제관에 들이닥친 인민군에게 끌려갔다.
번 주교는 그해 11월 25일 중강진 하창리에서 병사하였고 돌아오지 못했다. 1962년 제5대 ‘교황 사절’로 부임한 안토니오 쥬디체 대주교는 사절에서 ‘초대 교황 공사’가 되었고 공사에서 ‘초대 교황 대사’가 되었다. 이에 따라 건물의 명칭도 ‘사절관’에서 ‘공사관’으로 그리고 ‘대사관’으로 바뀌었다. 안토니오 쥬디체 대주교 공사 시절, 번 주교가 살던 일본식 집을 헐고 성 베네딕도회의 알빈 슈미트 신부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2층 건물을 1965년 12월에 완공했다.
이후 60년간 한국교회사와 한국외교사와 연관된 많은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968년 세계 최연소 김수환 추기경 서임 소식도 교황대사관에 제일 먼저 전해졌다. 이제는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103위 시성식과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 때, 지난 4월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124위 시복식 때 이곳에 머물렀다.
최근 교황대사관 건물이 낡고 불편해져 재건축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빈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2점은 이미 옮겨졌다고 했다. 헐리기 전 마지막을 기록하려고 교황대사관을 찾았다가 경당 제대 뒷벽 속에 가려져 있던 앙드레 부통 신부의 벽화를 봤다. 벽체를 헐다가 발견했다는데 크기는 2미터 정도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들고 있는 도상이었다. 현재까지 서울에서 발견된,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벽화로, 벽화에 남은 부통 신부의 서명은 “1974년 5월 16일”이다. 그 벽화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출퇴근 길에 공사 중인 교황대사관을 볼 때마다 이런저런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키케로는 “장소에 내재되어 있는 기억의 힘은 위대하다.”고 말했다. 역사적인 현장에서 받게 되는 인상들은 누군가를 통해 듣거나 책을 통해 받게 되는 것보다 더 생생하고 깊이 각인된다. 문화유산은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때 맥락을 잃지 않으며 다음 세대로 넘어가 문화적 저장고가 된다. 올해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241주년이고 2031년은 서울대교구 설정 200주년이다. 교회의 재산은 이제 민족의 자산이고 세계인의 자산이다.
[교회와 역사, 2025년 9월호,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 0 2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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