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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상징 속 성인 읽기: 사도들의 상징 (6) 성 바르나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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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속 성인 읽기] 사도들의 상징 (6) 성 바르나바
튜더 장미 외: 성 바르나바 사도
본래 예수님께서 손수 뽑으신 12명의 사도에 포함된 제자는 아니었으나, 사도들에게 바르나바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요셉(사도 14,14 참조)은 일찍부터 사도로 인정되었다. 이제부터 바르나바라는 이름으로 불릴 그는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해 있을 때 자신의 밭을 팔아서 생긴 돈을 공동체에 기부했다(사도 4,37 참조). 그리고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예루살렘에서 살던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했다. 그 뒤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살피도록 파견된 바르나바는 함께 일하고자 타르수스에 있던 사울을 안티오키아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았으며, 안티오키아 교회 신자들이 모은 성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서 그 지역의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데 쓰도록 전달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으로 바르나바는 사울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선교 여행을 하며 많은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마음으로는 여전히 유다교의 관습과 의식을 고집하던 이들에 맞서 이방인 개종자들이 이질감이나 부담감 없이 적응하며 지낼 수 있도록 보살폈다.
이즈음, 곧 첫 번째 선교 여행 중이던 때부터 바르나바의 동반자인 사울은 바오로라는 로마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사도 13,9 참조). 그리고 성경에서 두 사람이 거론될 때면 ‘바르나바와 바오로’라는 표현 대신에 ‘바오로와 바르나바’라고 선후가 바뀐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바르나바의 이름이 바오로보다 먼저 불렸던 것은 아마도 바르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와 더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르나바가 사도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사도 14장 14절 참조).
첫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두 사람은 이방인을 대하는 교회의 입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리고 격론 끝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할례받은 이들, 곧 유다인을 대상으로 활동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할례받지 않은 이들, 곧 이방인을 대상으로 활동하기로 했다(갈라 2,9 참조). 그리하여 이방인들은 유다인의 관습에 얽매이는 일 없이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바오로는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바르나바에게 이번에도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그런데 바르나바는 사촌인 마르코도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마르코가 이전 선교 여행 때 임의로 그들을 떠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합류를 반대했다. 이로 인한 의견 충돌이 심해졌고, 끝내는 갈라져서 바르나바는 마르코와 함께, 그리고 바오로는 실라스와 함께 각기 다른 선교지로 떠났다(사도 15,36-41 참조).
이후 바르나바의 활동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몇몇 기록을 미루어서 추정해 볼 수 있는바, 가령 바오로가 서기 56년 또는 57년경에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바르나바도 바오로 자신처럼 스스로 생계를 꾸렸다는 내용이 나온다(1코린 9,5-6 참조). 이 구절로 미루어 볼 때, 그때까지는 바르나바가 살아서 사도로 활동했고, 또한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여전히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난 서기 61~63년에는 바오로가 로마에서 갇혀 있었는데, 이때는 마르코가 바오로와 함께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콜로 4,10 참조). 이는 바르나바가 더는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교회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바르나바가 복음을 전하던 시리아와 살라미스에서 한 무리의 유다인들이 몰려와서 한 회당에서 논쟁을 벌이던 바르나바를 끌어내어 돌로 쳐서 죽였고, 그 시신을 마르코가 수습하여 남모르게 매장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바르나바는 밧줄에 목이 묶인 채로 끌려가서 화형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키프로스의 교회사에는 5세기에 당시 키프로스의 대주교이던 안테미오스의 꿈에 바르나바가 나타나서 자신의 무덤 위치를 알려 주었고, 그리하여 이튿날 무덤에 가서 가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안은 모습으로 안장되어 있던 유해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안티오키아, 밀라노, 스페인 테네리페섬 등 여러 도시와 지역의 수호성인으로, 우박을 동반한 폭풍우 같은 악천후를 막아 주고 그 피해로부터 보호해 주는 성인으로, 평화를 이룩하고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기관이나 사람들을 위한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한편, 성 바르나바 사도는 15세기 말에 시작된 영국의 투더 왕조 때 특별한 방식으로 기억되었다. 영국에서 두 가문이 30년 넘게 왕권을 두고 다투었는데(장미전쟁), 이 전쟁은 두 가문이 결합한 튜더 왕조의 탄생으로 마무리되었다. 새롭게 출범한 튜더 왕조는 싸우던 두 가문의 상징, 곧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와 요크 가문의 흰 장미를 결합하여 튜더 장미라는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의 축일이 되면 튜더 장미를 비롯한 온갖 꽃으로 교회를 장식하고 성대하게 이날을 기념했다. 아마도 바르나바 사도가 바오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함으로써 초기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인물이라는 점이 연결고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바르나바 사도를 나타내는 문장은 튜더 장미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표상들, 곧 바오로 사도와 함께 여러 차례 선교 여행을 했음을 나타내는 순례자용 지팡이,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설교했음을 나타내는 책(마태오 복음서), 돌에 맞아서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반영한 돌, 평화를 가져왔음을 나타내는 올리브 가지가 또한 성 바르나바 사도를 상징한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9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0 1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