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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9) 참 좋은 것을 바라보는 순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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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9) 참 좋은 것을 바라보는 순례
순례의 또 하나의 목적은 잘 바라보기 위해 떠나는 여정입니다. 단순히 어떤 것을 보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좋음’을 제대로 보기 위해 떠나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눈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끊임없이 추함을 가려내려 합니다. 좋음을 바라보고 좋음을 행하기 위해서 언제나 나쁨만을 바라보며 나누고 구별하고 비판합니다. 사랑을 원하면서 끊임없이 보기 싫고 미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언제나 미와 추, 성과 속, 선과 악을 가르며 구별과 가름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잘 바라보기 위해서 떠나는 순례는 좋음을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주위를, 이웃을, 그리고 나를 제대로 보고, 그 안에서 좋음을 바라보기 위한 여정이 되어야 합니다.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기적은 제대로 보기 위한 순례의 여정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묵상하게 합니다.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마르 8,22-26)
가장 먼저 우리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눈먼 이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이끌려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자신이 예수님께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청을 드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보고 있지만, 보이지만 보지 못하고 있는 삶을 스스로가 인정할 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는 순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가까이 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손을 잡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침을 발라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과의 특별하고 개별적인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시간 안에서,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온기 속에서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한 번의 고침으로, 일회성의 어루만짐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지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보이지만 예수님과 멀어져 있었기에, 그리고 예수님의 시선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같은 것을 보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가 욕심으로 오만으로 탐욕으로 물들어져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순례의 여정은 예수님과 함께, 같은 시선으로, 같은 마음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그렇게 바라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눈이 보이지 않는 이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한 번 더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바라봄의 여정을 더 자세히 새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6-52)
바르티매오라는 거지도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 치유를 받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치유와 다른 점은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류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소리칩니다. 또한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일어나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그는 예수님께 청을 드릴 때 “다시” 볼 수 있게 해주라고 청을 드립니다. 예전에는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거라.”라고 명하시지만 그는 예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길을 나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바르티매오가 같이 걸어간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며, 수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입니다(마르 11,1-15,41 참조).
하느님의 시선으로, 예수님의 시선으로 좋음을 본다는 것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고통 안에서도 사랑과 용서의 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슬픔과 아픔의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비의 선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더러움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고통 안에서도 은총을, 나쁨 안에서도 좋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도구입니다. 두렵고 꺼려지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은총과 구원과 부활을 바라봅니다.
바라보는 순례의 여정은 그렇게 감추어져 있고 숨겨진 하느님의 선물을 찾아내는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처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다시 제대로 본다면 그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보고 있다고 자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섣불리 판단하고 비판하면서 미워하고 심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한 꾸준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분의 시선으로, 그분의 마음으로 지금의 이 상황과 사람들을 바라보려 고민하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그럼 용서와 자비의 마음,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그 순례를 떠나십시오. 그리고 나를, 가족을, 이웃을,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9월호, 최종훈 토마스 신부(가톨릭목포성지 담당, 광주 Se. 담당사제)] 0 14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