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3일 (금)
(녹)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금쪽같은 내 신앙117: 어른이 된다는 것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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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0-02 ㅣ No.2203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117) 어른이 된다는 것 (상)


나를 죽이고 새 삶을 사는 여정

 

 

‘어쩌다 어른’이란 말이 있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는 뜻도 있지만, 준비되지 못한 채 어른으로 살아가게 되는 안타까움을 일컫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바리용 신부님은, 여자는 ‘덩치 큰 소녀’가 아니며, 소녀가 성숙한 여자가 되는 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으로, 소녀의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생활성서사, 60쪽 참조) 어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세월이 흐른다고, 나이를 먹는다고 그냥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치기 어린 어린이의 상태에서 죽어야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거쳐야 한다.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생명나무’라고도 불린다. 진정으로 죽을 때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에 구리 뱀 이야기를 듣는다.(민수 21,4-9 참조)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 백성이 조급해진 나머지 모세에게 불평을 터뜨린다. 주님께서 불 뱀들을 보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게 된다. 모세가 백성을 위해 기도하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명하신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놓았고, 불 뱀에 물렸을 때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되살아나게 되었다.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탈출하여 자유의 땅으로 걷는 여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이집트에 남아 있었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을! ‘불 뱀’은 길을 걷기를 포기하는 나, 조급해하며 주님의 동행을 의심하는 나를 죽이는 역할을 한다. ‘구리 뱀’이란 불 뱀에 물린 나를 내치지 않고 애원하는 나를 다시 받아주는 하느님의 너그러움과 자비를 의미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애원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시 길을 열어주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걸은 여정은 바로 우리 각자가 걷는 인생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과거에 죽고 새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부여받았다. 그렇지만 신앙의 여정은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그래서 매번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도 삶에서 닥치는 시련과 역경 속에서 갈등하고 번민하고 괴로워하며, 하느님의 현존과 동행을 의심하기도 한다. 이집트(과거)로 돌아갈까 생각도 들지만, 상처도 입고 멍도 들었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 애원을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시며, 상처를 낫게 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신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금씩 나를 죽이고 버리며 벗어버리는 경험을 한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말이다. 신앙은 마술처럼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완전한 답을 주지 않는다. 반대로 계속 길을 걸으며, 조금씩 자기를 내려놓고 비우고 벗어버리는 연습을 하도록 한다. 그래서 쉽지 않은 길이며, 동시에 기쁨과 환희가 고통을 잊게 하는 길이다. 마치 태어난 아기를 보는 기쁨이 산모의 산고를 잊게 하듯 말이다.

 

인생은 학교다. 벗고,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을 배우는 학교다. 그리고 연약한 나, 상처 입은 나를 끝없이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배우는 학교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은 이상적인 길이 아닌 현실적인 길임을 인정하자. 우리가 사는 삶이 정답이지,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길을 계속해서 잘 걸을 수 있도록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벗어버리는 연습을 오늘도 게을리하지 말자.

 

[가톨릭평화신문, 2025년 9월 28일, 한민택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겸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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