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일 (목)
(백) 수호천사 기념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하느님의 종 심능석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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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0-01 ㅣ No.2437

[순교자 성월 특집 IV] 하느님의 종 심능석(스테파노)

 

 

심능석(스테파노, 1819~1868)은 횡성 출신으로 1838년에 경기도 광주에 사는 박성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샤스탕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1845년에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의실(山義室)로, 1862년에 평창군 방림면 계촌3리 계촌(굴아우, 계골)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그는 페레올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고, 칼래 신부, 도리 신부, 베르뇌 주교 등을

만나 고해성사를 받았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다시 계촌으로 돌아왔습니다. 계촌에는 하느님의 종 유 베드로(1847~1869)가 박해를 피해 잠시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종 이유일(안토니오)이 계촌으로 피신해 왔습니다.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 활동했던 이유일(안토니오)은 서울에 살면서 하느님의 종 홍봉주(토마스)와 하느님의 종 김민호(토마스) 등과 교류하였고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지도층 신자들은 두만강 근처에 자주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를 방어할 책략을 마련하여 흥선 대원군에게 건의하였습니다. 즉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나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견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원군이 처음의 약속과 달리 박해를 일으키자 체포령이 내려진 그는 심능석의 집으로 피신한 것입니다. 심능석은 그를 따뜻이 맞아들였습니다. 그러던 중 1868년 5월 5일(양 6월 24일) 이웃과 함께 모임을 갖고 있을 때, 밀고자를 앞세운 서울의 포교들이 들이닥쳐 먼저 이유일(안토니오)을 체포하고, 그와 함께 있던 집주인 심능석(스테파노)도 체포하였습니다. 심능석은 이때 포교들 앞으로 나서서 “우리는 결박하지 않아도 도망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집에 가서 남에게 진 빚을 갚고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한 뒤에 재산을 적몰하십시오.”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포교들의 허락을 얻어 모든 일을 처리한 뒤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는 동안, 그는 “이리저리 피신해 다녔으므로 아는 교우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한 명의 교우도 밀고하지 않았습니다. 또 배교하라는 명령에는 “어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체포된 이유일이 하루는 바깥으로 나가더니 감투를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들어와 하는 모양이 심히 수상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이런 좋은 때를 만나 기회를 놓치려고 저런 모양을 하느냐?”라고 힘써 권면하니, 즉시 나약해진 그가 이 말을 듣고 회개하여 순교의 원의를 다잡았습니다. 이후 옥으로 끌려가 지내고 있을 때, 하루는 옥지기가 그에게 다가와서 “너는 오늘 밤에 죽게 될 것이니 옷을 바꾸어 입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그는 죽음을 초월한 태도를 보이며 희희낙락 웃음으로 활발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5월 11일(양 6월 30일) 이후에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49세였습니다.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더 나은 신앙 생활을 위해, 또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녔던 순교자들, 특히 피신해 온 하느님의 종 이유일(안토니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준 순교자 심능석 스테파노의 희생과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였으면 합니다.

 

[2025년 9월 28일(다해)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단양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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