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일 (목)
(백) 수호천사 기념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성극ㅣ영화ㅣ예술

희망 영화관: 땅에 쓰는 시(다큐멘터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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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0-01 ㅣ No.168

[희년 특집] 희망 영화관 : 땅에 쓰는 시(다큐멘터리, 2024)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선자령에 오른 것은 지난여름 작은 내 마음의 어떤 비움이 비로소 가능해졌을 때 맑고 선한 얼굴로 내 마음에 다녀가신 그분 자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가까스로 땀에 젖은 몸을 수습하고 허기를 달래려 준비해 간 도시락 덮개를 열어 옆 풀섶에 놓아두려는 무렵 발견한 것은 강원도 고산지대의 여름 야생화인 제비동자꽃이었습니다. 제비의 꼬리 깃처럼 매끈하게 갈라진 붉은 꽃잎이 특징인 제비동자꽃은 희귀 야생화여서 허기도 잊은 채 한참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제 시야에 들어온 제비동자꽃 군락의 야생화 밭은 마치 대지의 흙이 땅에 써내려간 시처럼 아름답고 고결하며 동시에,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풍경을 선물해 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가난한 사람이었던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루카복음에서 ‘간절히 바라는’ 대목은 15장 16절에 그 유명한 두 아들의 비유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모두 ‘간절히 바라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성경에서 ‘간절히’라는 단어는 우리의 온 정신과 영혼이 어느 한 방향으로 깊은 몰입을 가져올 때 발생하는 어떤 현재를 극복하려는 거룩한 전 과정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선자령 산마루에서 만난 대지가 흙 위에 쓴 시처럼 여름 야생화의 제비동자꽃 그 아름다움을 땅 위에 당신의 피조물 안에서 그분 스스로를 현현할 때 하느님께서 피조물에 당신 기운을 집중하셨듯이 말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는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도시인들을 위해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자연관을 고스란히 담은 ‘차경(借景;경치를 빌린다)’의 개념을 들여와 우리 눈 앞에서 대자연의 신비 안에 깃든 하느님 자취를 느끼게 해주는 한국식 정원의 정수를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꾸어야 할 정원은 우리가 실기해 잃어버린 낙원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간절함을 상기하게 해주는 좋은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우리나라 1세대 조경사로서, 이 조경사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옛 선현의 정신을 자신의 정원 가꾸기의 철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곧, “검소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 덕 말입니다. 백제의 미라고도 알려진 바로 이 절제의 균형은 앞서 언급한 ‘간절함’으로 가능합니다. 우리 정신이, 우리 마음이, 그리고 우리 온 영혼이 한 방향으로 몰입되어 그 방향이 하느님께로 마침내 정향될 때 생기는 정제된 정신의 간절함은 우리 마음의 대지 위에 마침내 땅 위에 쓴 시처럼 꽃을 피워낼 텐데 그 마음의 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가 간절히 바랐던 ‘구원’입니다. 선자령 제비동자꽃을 보고 내려오는 순간, 파울 첼란의 시가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빛이 있었다

그것은 구원.

- 파울 첼란 <언제가> 중 -

 

[2025년 9월 28일(다해)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서울주보 6면, 김상용 도미니코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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