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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1) 한국 순교자 24위 시복, 총 103위 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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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1) 한국 순교자 24위 시복, 총 103위 복자 벅찬 감격 속 24위 복자 선포… 순교 영성, 한국교회 빛이 되다
“우리나라의 순교자 24위를 한국교회 전체의 가경자로 선언하는 시복식이 6일 오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전 세계로부터 약 5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이번 시복식에는 7명의 추기경을 비롯해 25명의 대주교 및 주교들과 500명이 넘는 한국 신자들, 그리고 약 2500명의 프랑스 신자들이 참석했다. 시복식이 끝나자 순교자를 찬양하는 성가가 찬란하고 장엄하게 장식된 대성전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대미사를 주례했다.” (가톨릭시보 1968년 10월 13일자 1면 중에서)
새 복자 24위 탄생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은 온통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이날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24명의 한국 순교자가 복자품에 오른 감격스러운 날이고, 시복 경축 대미사를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우리말 기도와 성가로 우리나라 주교가 주례하는 감동을 만끽한 날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날 시복식에는 500여 명의 한국 신자들이 참석, 24명의 신앙 선조들이 복자로 선포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복식에서는 시복 선언에 이어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선창으로 ‘테 데움’(Te Deum)이 울려 퍼졌고, 24위 복자들의 초상화가 대성당 정면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복자로 선포된 24위는 1866년부터 6년 동안 조선 전역을 휩쓸었던 병인박해로 순교한 1만여 명 가운데 선발된 이들로, 프랑스인 선교사 7명과 한국인 평신도 17명입니다.
당시 시복 미사를 집전한 김 추기경은 그날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날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시복 미사 집전의 영광이 내게 주어졌다. 선조들이 복자품에 오르는 감격스런 장면을 지켜보는 신자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했다. 유럽에 사는 교포 신자들까지 합쳐 한국인 500여 명이 모인 그날은 바티칸 전체가 한국의 날이었다.”(「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78쪽)
24위 시복식의 의미
이날 시복식은 한국교회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수많은 박해를 겪었으며, 특히 신유박해(1801년)·기해박해(1839년)·병오박해(1846년)·병인박해(1866년) 등 4대 박해는 참으로 혹독한 수난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병인박해는 8000명에서 1만 명에 이르는 순교자를 낳은,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참혹한 박해였습니다.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79위는 이미 1925년에 시복돼 이날 시복식으로 한국교회의 복자는 모두 103위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모두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79위 시복식은 파리 외방 전교회 주도로 일제 강점기에 거행된 까닭에, 한국 순교자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순교자’로 알려졌습니다. 시복식에 참석한 한국인도 단 3명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 그리고 전후의 혼란 속에서 순교자와 복자에 대한 공경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청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교회는 순교자 현양과 순교 영성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쏟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가 혹독한 박해와 순교자의 피와 땀 위에 세워졌음을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상 순교 영성 연구와 현양 운동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붙은 순교자 현양 운동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듯, 한국교회 안에서는 시복식을 전후해 순교자 현양 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가톨릭시보는 시복식을 앞두고 10월 6일자에 특집면을 4면 증면해, 시복식과 한국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상세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진리 위해 쓰러진 피꽃 영광의 열매 맺다’라는 벅찬 감격을 담은 제목 아래 시복식의 일정과 의미를 전한 기사가 1면에 실렸습니다. 전면에는 24위 복자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게재됐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써서 가톨릭시보에 전달한 ‘진리불변 충절상청’(眞理不變 忠節常靑)이라는 휘호도 함께 실렸습니다.
같은 날짜 신문 3면에는 시복되는 24위의 간략한 생애가, 4면에는 ‘순교정신 현양사업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열린 좌담회의 내용이 실렸습니다. 5면에는 병인박해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시복에서 누락된 순교자들, 순교자 후손과의 만남이 보도됐고, 6면에는 순교의 현대적 의미와 기념 문예공모전 당선작이 소개됐습니다. 그 외에도 24위 시복의 감격을 담은 다양한 기획 기사들이 지면을 채웠습니다.
시복식의 감격은 10월 내내 이어졌습니다. 한국병인순교자시복경축집행위원회는 ▲ 순교자료전시회(절두산 양화진성당(현 절두산 순교성지) ▲ 경축대미사(남산 야외음악당) ▲ 예술제(국립극장) ▲ 강연회(신문회관) ▲ 시복일 기념미사 ▲ 백일장과 사생대회 등을 통해 24위 시복을 경축하고 순교자 현양운동을 확산시켰습니다. 시복식은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경사였습니다. TBC TV는 5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10월 13일 남산 야외음악당 경축대미사를 2시간 동안 중계해, 온 국민이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24위 시복식이 거행된 날 오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와 새 복자들에게 경배한 뒤, 연설을 통해 “24위의 한국 순교자는 영웅적인 정신과 굳건한 신앙의 귀감”이라며 “서구 신자들은 한국 순교사를 연구하여 훌륭한 표양을 본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뒤 처음으로 이뤄진 시복의 결실이었던 24위 시복은 한국교회 순교 영성을 일깨우고, 한국이 순교자의 땅임을 온 세상에 선포한 소중하고 뜻깊은 사건이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9월 21일, 박영호 기자] 0 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