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와 마음읽기: 현세에서의 보상(보상의 역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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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와 마음읽기] 현세에서의 보상(보상의 역설)
다음 세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영국이 인도를 통치할 때 맹독성 코브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코브라를 잡아 오는 사람을 보상했다. 그로 인해 인명 피해는 줄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잡아 오는 코브라의 숫자는 오히려 늘어났다. 조사 결과, 코브라를 사육하여 보상받는 사람들이 생긴 탓이었다. 결국 코브라에 대한 보상은 폐지되고 사람들이 키우던 코브라를 풀어주어 야생 코브라의 수는 처음보다 더 늘어났다. 두 번째 사례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할 때, 하노이 시내 쥐의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 쥐의 꼬리를 가져오면 보상해주었다. 많은 이들이 쥐 꼬리를 가져왔고 쥐가 줄어드는 듯했으나, 얼마 후 꼬리 없는 쥐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쥐를 번식시켜 더 많은 보상을 받고자 쥐의 꼬리만 자르고 놓아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국 관리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아편 생산 억제를 위해 농부들에게 심어진 양귀비를 파괴하는 대가로 땅의 면적에 비례하여 보상했다. 그러자 농부들 사이에서 최대한 많은 양귀비를 심으려는 열풍이 일어났고, 심지어 일부 농부들은 작물을 파괴하기 전에 수액을 수확해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 세 사례의 공통점은 바로 ‘보상의 역효과’이다.
미국 로체스터대학 교수인 ‘에드워드 데시’는 1960년대 말 대학생을 상대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이른바 ‘큐브 실험’이다. 그는 먼저 실험 대상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개인적으로 30분간 큐브를 맞추게 하였다. 이때 한쪽 집단은 블록을 완성할 때마다 1달러씩 주고, 다른 쪽에는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30분이 지난 후, 8분 정도 실험실에 혼자 남겨두면서 그동안 큐브 놀이를 얼마나 하는지 보았다. 물론 실험실 탁자 위에는 그들이 좋아할 만한 잡지를 두고 그들이 큐브 놀이를 할 수도, 잡지를 볼 수도 있게 하였다. 이는 만약 혼자 있는 시간에도 큐브를 한다면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내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아무 보상 없이 퍼즐을 즐긴 집단의 학생들이 훨씬 오랜 시간 큐브에 흥미를 보였고 몰입도도 높았다.
“실체가 있는 보상은 어떤 형태이든 내적 동기를 낮춘다”
‘보상의 역설(Paradox of Reward)’이란 개념이 있다. 이는 ‘외부 보상이 오히려 내면적 동기를 저해하여 성과를 감소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보상’은 ‘사람에게 특정 행동을 유도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물질이나 칭찬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외부에서 보상이 주어지면 자기 행동이 외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게 되어, 보상에 의존하는 비율은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내적 동기는 약해진다. ‘내적 동기’란 ‘행동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나 만족감 때문에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외부 보상은 장기적으로 볼 때 행동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거나, 보상받기 위해 편법을 쓰게 하는 등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돈이나 상장 등 외부 보상이 주어지기 시작하면 그 아이는 그리기를 보상받기 위한 행동으로 인식하게 되어, 그리는 즐거움을 빼앗길 수도 있다. 에드워드 데시는 1999년 보상의 효과에 관한 128개 논문을 분석한 뒤 “실체가 있는 보상은 어떤 형태이든 내적 동기를 낮춘다”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공무원인 B자매는 이웃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어머니가 대세를 받고 돌아가시자, 천주교식 장례를 처음 경험하며 죽음 뒤의 일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세례받았다. 그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내세를 준비하려는 열망으로 레지오 단원이 되었는데, 5년 정도 지난 요즘은 겨우 단원 생활을 하는 기분이 들어 입단 초기의 열정이 그립다고 한다.
“엄마 장례식에서 본 연령회원들의 정성은 저에게 정말 내세가 있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세상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단원이 된 후 기도에도 정성을 다하고 주회합도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연말에 개근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단원에게 주회 출석은 당연한 일인데 상을 받다니요. 레지오 단원들이 보상이 있어야만 착한 일을 하는 어린이는 아니잖아요. 게다가 상을 받으려고 주회 시간을 자주 바꾸고, 출석에 대해 따지는 일부 단원들의 모습에 실망이 컸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레지오 수준이 이 정도인가 하는 회의도 들었고요. 그때 그 느낌이 쉽게 지워지지 않네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 의식이어야
‘우리가 하는 일은 언제나 신앙적인 동기가 바탕이 되어야’(교본 315쪽)함은 두말할 것 없다. 그리고 ‘힘겨운 노력에 대하여 단원들이 받게 될 보상은, 마침내 그들이 하느님과 화합한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나는 것’(교본 360쪽)이니 우리가 받을 보상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속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이미 이 세상에서 백배나 갚아 주신다’(교본 159쪽)라고 하니,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보상은 주님의 선물일 수 있다. 하지만 보상이 주어지는 조건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소위 말하는 ‘당근과 채찍’의 당근에 중독된 현상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여러 연구에서 말하듯 그것은 일에 대한 재미나 열정을 갖기 힘들게 한다. 바로 내적 동기와 자발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섣부른 보상은 하수(下手)에 불과하고 사람들에게 일의 의미를 잃게 만들 뿐이다. 또한 보상에서 제외되는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더 소극적으로 되는 경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금전, 명예, 칭찬 등 다양한 형태의 보상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 의식이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어떤’ 동기에서 입단하여 ‘왜’ 단원 생활을 하고자 하는지 스스로 살펴보며 단원 생활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단원으로 봉사하는 동안은 사고나 병이 생기지 않을 거라 기대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자신의 선행에 대하여 하늘에서 보상받기보다는 현세에서의 보상을 더 바라고 있’(교본 439쪽)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레지오 활동에 열정적인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없을지도 모른다. 단원 생활을 오래 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가?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성모님의 군사로 걸맞은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린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
‘이 크신 하느님의 사업에 우리가 협력할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교본 360쪽)
[성모님의 군단, 2025년 8월호, 신경숙 데레사(독서치료전문가)] 0 1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