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
---|
[허영엽 신부의 ‘나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학창 시절에 영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1943)를 보고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새롭다. 헤밍웨이 원작의 이 영화는 스페인 내전이 그 배경이다. 독재자 프랑코의 통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마리아와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로베르토는 게릴라전에 함께하며 둘만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로베르토는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다가 적의 포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다. 사랑하는 여인 마리아와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은 퇴각로에서 적의 접근을 막게 된다. 마리아를 간신히 떠나보낸 뒤 로베르토가 혼자 중얼거린다.
“당신이 가면 바로 내가 가는 거야. 당신이 나.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는 거야”
로베르토의 독백 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종이 울리며 영화는 엔딩을 맞는다. 사랑하는 연인 마리아의 안전을 위해 자신은 죽음을 선택한 로베르토의 희생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목숨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이다.
수많은 문학 작품과 노래, 영화, 연극에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인생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사실 이런 질문에 한두 마디의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생각과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이지만 정작 그 의미는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생에서 사랑을 뺀다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고 삭막해질 것이다. 사랑의 진실을 호소한 시나 노래는 시대나 국적을 초월하여 언제나 감동을 준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리고 그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란다. 철학자 루소는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인생에는 사랑이 있기에 기쁨이 있고, 향기가 있고, 보람이 있고, 행복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의 모습은 현실에서 얻기 어렵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자신을 더 사랑하려고 할 때가 많은 것이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다”
2001년 9월 11일,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된 여객기 중 2대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이른바 쌍둥이 빌딩과 충돌했다. 비행기에 탑승했던 사람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위급한 상황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그들이 죽어가며 남긴 메시지는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있는 성경에서 사랑의 정의는 간결하고 분명하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라 정의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성경은 복음(福音), 곧 기쁜 소식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 안의 하느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생각한다. 나도 가끔 나 자신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못하는데 부족한 나를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고 더구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해주신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담겨있기에 기쁜 소식임이 틀림없다.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사랑의 절정이며 핵심은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다”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즐거워지고 행복을 느낀다. 사랑하면 나타나는 과학적 변화를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의 마음은 행복과 기쁨으로 꽉 차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스라엘 민족을 만민 중에서 선택하시는 데서 잘 드러났다(신명 10,15). 또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역사 안으로 개입하시지만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보편적인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즉 교회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다(요한 3,16-17).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 하느님과 이웃 사랑은 사랑의 정점이다. 또한 이웃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것으로 나타난다. 이웃 형제애의 실천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겉으로 드러나며 증거가 된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며 자녀들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아주 특별한 선물, 즉 하느님의 사랑을 주신다. 선물이란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 거저 주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하거나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현대의 유명한 영성가 헨리 나웬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여라. 하느님은 네게 아름다운 육신과 영혼을 주셨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며 모든 인간과의 사랑을 넘어서는 태초의 사랑을 주셨다. 네 영혼 속에는 너만이 지닌 아름답고 사랑받는 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 너는 네가 받는 사랑을 의심하지도 거부하지도 말아야 하며 자신의 좋은 점만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도 너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태초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영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네가 받고 있는 진실한 사랑을 포기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의 태초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이끌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 하루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또 그 사랑의 보답으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성모님의 군단, 2025년 8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0 8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