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생활교리: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하신 하느님? |
---|
[생활교리]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하신 하느님?
믿는 이들은 어떤 이유로 간절한 바람과 지향을 모아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는가?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즐겨 들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탈출 3,9), 무엇보다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268)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 아니시라면, 어찌 그분을 믿고, 어찌 그분께 무엇을 바라고 청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전능’은 독단적이고 무소불위한 권력으로 억압하거나 지배하는 힘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도신경에서 하느님의 속성 가운데 유일하게 언급되는 ‘전능’은, 반드시 사랑과 자비, 자유와 같은 다른 속성과 함께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교리서』 271).
그렇다면 하느님의 전능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 자체이시며(1요한 4,16),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는]”(요한 3,16) 하느님 아버지로서 드러나는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교리서』 268)이다. 유비적으로 표현하자면, 산모와 갓난아기 중 단 한 사람의 생명만 살릴 수 있다면, 산모는 아기의 생명을 선택할 것이다. 이는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기를 향한 깊고 충만한 사랑 때문이다.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혹여 어머니가 “자기의 젖먹이”, “자기가 낳은 아이”(공동번역 이사 49,15)를 잊는다 해도,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가 늙고 백발이 되어도, 당신께서 우리를 만드셨기에 끝까지 지켜주시고, 돌보시며, 구해주신다(이사 46,4).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느님’이란 신앙 고백은, 우리를 위해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으며]”(욥 42,2), “뜻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시는]”(시편 115,3) 하느님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한 확신에 찬 고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여정 안에서,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의 ‘전능’은 때로 우리의 현실 안에서는 ‘무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뜻밖의 시련이나 고통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의문을 품는다.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스럽고 비참한 상황을 허락하셨는가? 왜 무고한 이들이 전쟁과 같은 참혹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어야만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전한 답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을 “오직 신앙만으로”(『교리서』 273)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신앙의 본보기였던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인물들은, 생전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히브 11장). 이는 그들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한 신학자는 하느님을 “‘구조’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로널드 롤하이저)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모든 어려움에서 언제나 즉각적으로 구조해 주시지는 않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끝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푸시킨), 사랑으로 전능을 일으키시는 하느님께 이렇게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욥 42,2).
[2025년 8월 17일(다해) 연중 제20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0 3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