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자료
2025-07-27.....연중 제17주일 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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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 (다해) 창세기 18,20-32 콜로사이 2,12-14 루카 11,1-13 2025. 7. 27. 주제 :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대하기 오늘은 교회에서 ‘노인의 날’로 기억하는 날입니다. 2020년쯤부터 몇년간 유행했던, 코로나 바이러스 질병시대를 지내면서 우리의 삶에 큰 흔적을 남긴 노인들을 예우하자고 프란체스코 교황님께서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의 축일에 가까운 주일로 정하신 날입니다. 노인과 어른을 기억하자고 우리가 표현하면, 실제로 우리의 삶에는 어떤 일이 드러나겠습니까? 사람의 기억은 자기의 삶에 특별한 흔적을 남깁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하는 기억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도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하는 기억이 현실로 드러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삶의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고, 내가 전에 한 생각이 무엇인지 드러낼 일입니다. 오늘 연중 제17주일은 사람이 하느님의 앞에 나서는 올바른 자세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오늘 창세기 독서의 말씀에서 들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얼마나 착하게 살아야 할까요? 내가 세상의 삶에서 만드는 좋은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는 모습이 되도록 살아야 할까요?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이라고 표현하자면, 다 안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니,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 사람이겠는지 잘 살피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에 등장한 고대의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는 이스라엘에 있는 죽음의 바다 곁, 사해의 남쪽 부분에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누구도 현실로 확인한 바는 없다고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하느님께서 하신 심판의 결과로 아무런 생명도 살지 못하는 사해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관해서 아는 것은 오늘 독서로 읽은 창세기의 말씀이 전하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사람이 살던 한 도시가 하느님의 앞에서 자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살게 하는 데는 쉰(50)명의 의인이 필요할까요?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대화하는 표현을 통해서, 의인의 숫자를 마흔다섯(45)명, 마흔(40)명, 또 서른(30)명, 스무(20)명, 열(10)명까지 줄여가면서,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획과 심판을 다르게 바꾸어 도시를 살아남게 하려고 애썼지만, 문제는 하느님의 심판과 판단이 아니라 세상에 살던 의인의 숫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우리가 사는 면목동지역은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큰 지역이라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살고 있던 의인이 열 명이 되지 않았기에 사해의 한 부분이 되고 하느님의 심판을 만났습니다만, 그때로부터 4000년쯤 시간이 흐른 현실에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이곳에 사는 의인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이 아직은 유지되는 것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를 판단한 하느님의 기준이었던 열(10)명보다는 많다고 할까요? 우리는 세상에 하느님의 너그러움과 자비가 드러나도록 실제로 어떻게 사는 사람이겠습니까? 오늘 들은 루카복음은 제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기를 청하면서 기도를 알려달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알려주신 기도를 얼마나 잘 알아듣고 내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을 향해서 내리실 수도 있는 무서운 심판만 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알아듣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말씀하셨고, 그다음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기도의 정신에 얼마나 충실하게 일치하여 사는지를 질문하셨습니다. 기도하되, 끊임없이 또 지치지 말고 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내 기도를 들어줄 대상의 사정은 생각하지 말고 그가 귀찮게 여길 수도 있을 만큼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한두 번쯤 하고 쉽사리 물러설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 하는 행동이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한두 번쯤 하고 뒤로 물러서도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다가서는 올바른 방법이며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기도한다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일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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