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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7: 개성공단 방문과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운동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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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7: 개성공단 방문과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운동의 의미
• 일시 : 2024년 6월 27일 (목) 오후 2시 • 장소 : 혜화동 주교관
조한건 신부 : 민족화해위원회 설립 당시 교회 안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대한 생각, 열정, 신자들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염수정 추기경 : 1995년 3월 1일 민족화해위원회가 설립될 당시 교회와 우리 한국 사회가 사실은 남북 간의 화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어려운 정도의 경직된 분위기였죠.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1948년 남북 별개의 정부 수립 이후 분단은 고착되어 갔고 더구나 6 ·25 전쟁으로 극심한 분단의 상처를 입게 되었으며, 이제는 분단의 벽은 DMZ(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를 통해서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왕래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불신과 공격의 행태는 여러 사건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분단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염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 징표로 나타난 것이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으로 1972년에 시작되었으나 미미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는 ‘한국천주교 설립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1984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을 준비하면서 교회 내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제일 큰 고통인 남북 분단의 현실 앞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식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북 간에 가장 현실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아픔이 이산가족을 찾고, 만나는 것을 인지하고 사회 여러 기관에 촉구하게 되었죠.
그동안 교회는 침묵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당시에 이동호(플라치도)1) 아빠스께서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해방 이후 6 ·25 전쟁과 분단된 상황에서 우선 시작한 것이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 - 침묵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선교 활동할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죠. 북한은 1989년 평양에서 「제3세계 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며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려 했고, 북한에 장마로 인해서 수많은 아사자가 생기고(1995년)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 무언가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음적으로 해야 할 게 뭔지 반성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흩어진 이산가족의 만남과 굶어 죽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양식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교황님이 1984년에 한국천주교 200주년 행사를 하고,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하면서, 우리가 북한 동포에 대해서 정말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반성도 많이 있었죠. 남북의 교류를 위하여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장익(십자가의 요한)2) 신부님과 정의철(다마소)3) 신부를 북한에 파견하기도 했었죠. 1989년에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을 초대한다는 것이었는데, 실상은 무위로 끝났습니다. 평양교구장 서리인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최창무(안드레아)4) 보좌주교에게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도록 하셨습니다.
「민족화해위원회」 용어 자체가 큰 변화였다고 생각해요. 1995년 3월 1일, 「민족화해위원회」를 발족하면서 제일 처음에 해야 할 것은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도운동을 하는데, 우리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신자들과 함께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북한의 조선가톨릭협회 장재언(사무엘)5과 연결이 되어 우리가 서로 같이 매주 화요일 날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하자고 했습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공동으로 바치자고 해서 그렇게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시대가 바뀌고, 또 북한도 실제로 도움을 요청하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북한을 돕는 데에 통일기금으로 본당 예산의 3%를 우리가 적립하자고 하셔서 북한에 대한 기도만이 아니라 실제로 구체적으로 사랑과 나눔을 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폭발적으로 분위기가 고조됐다고 생각합니다.
조한건 신부 : 2014년 5월 21일 추기경님께서 개성공단 방문하시면서 한국교회의 추기경으로는 처음 북녘땅을 밟게 되셨습니다. 개성공단 방문의 계기와 의미는 무엇이었나요?
염수정 추기경 : 남북 간에 교류가 제대로 안 되던 상태였고, 천만 이산가족에 대한 아픔이 있는 가운데 개성공단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나눔을 하고, 공동으로 협력해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안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관심이 많았고, 개성공단에 한번 방문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앞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공동체의 모습을 실현하고 있는, 가장 첫 번째 장소가 개성공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노동력이라는 하나의 굉장히 중요한 매개체와 더불어 생산을 이룸으로써 사람의 삶이 그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어떤 이유를 떠나서건,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정말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개성공단 입주 임가공 업체들 가운데에서 신자들을 중심으로 ‘로사리오회’라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 사람들이 그 안에서 기도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데 북한 땅 안에서 공식적인 기도의 공동체가 형성되어서 움직였다는 것은 굉장히 역사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로사리오회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언제라도 방문하면 만났고, 그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 지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로사리오회에서 제가 방문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정세덕 신부가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들을 통해서 저의 방북을 타진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거기는 우리 의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히 의사를 타진하고 준비를 해서 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사실 타협하다가 와해 되었다가, 우리 정부에서도 허락했다가 불허했다가 하는 여러 가지 과정을 겪었습니다. 로사리오회를 통해서 계속 끊임없이 기도했었고. 또 나름대로 실무적으로도 굉장히 노력을 많이 기울였어요. 저는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기다려보자, 기다려보자, 될 것이다.’라고 로사리오회에 이야기하였고, 마침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추기경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너무 몰랐습니다. 제가 자유롭게 로사리오회의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던 공장에 가서 북한의 근로자들을 만나기로 사전 협의가 되어 있었는데, 북한에서 갑자기 막기 시작한 거예요. 사실 북한에 가서 우리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하고 오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 미사는 드리지 못했지만, 같이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던 것이고, 공식적으로는 교구장으로서 북한 땅을 직접 밟고, 또 북한 사람들을 공장에 가서 만났으니까요.
북한 사람들을 만난 소회를 말하자면, 새벽에 명동에서 떠났거든요. 그래서 남북 연락 사무소 통과하기 전에, 철조망 문에서 기도하면서 기다렸다가 갔는데, 거리가 한 60km밖에 안 될 것 같아요. 시간으로 봐선 한 시간도 못 돼서 거기 도착한 거죠. 그런데 이 짧은 길을 몇 십 년을 거쳐서 들어가게 됐다는 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 들어가서 실제로 그분들이 일하는 데를 들어가 봤어요. 여러 곳을 들어가 봤는데, 신자들이 운영하는 그쪽에 가면 무언지 모르게 분위기가 좀 훈훈하고 따뜻했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사람들이 안 보는 것 같아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따뜻한 것이 느껴져서, 남북이 이렇게 같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계획들이 아주 거창하더라고요. 계획으로는 천만 평인데, 일부인 백만 평도 못 되는 곳에서 개성공단이 열기 시작했습니다. 가서는 남북 사무소도 보고, 병원 진료소도 돌아보면서 관계자들하고 점심을 같이 먹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뜻을 가진 선의의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하면 이 모든 것을 이겨 딛고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박근혜 정부였는데, 독일에서 드레스덴 선언을 한 거예요. 북한에서는 그건 흡수통일이라 생각하고서 ‘드레스덴 선언(Dresden Declaration)’6)을 반대한 거죠. 그 내용을 보면 3대 대북 제안을 하는데, 그 내용은 인도적 문제의 우선적인 해결,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 또 영유아 및 산모 지원, 모자 패키지 ‘천일 동안에(1,000days)’ 사업, 민생 인프라 구축, 복합 농업, 농촌 단지를 조성하고, 민생 인프라 구축과 지하자원 개발, 남북 협력사업을 추진하고. 동질성 회복, 역사 연구와 보전, 문화 〮 예술, 스포츠 교류, 비무장지대 DMZ에 세계평화공원 조성 등이었는데, 그냥 폐쇄돼버린 거죠. 그러니까 처음엔 좋은 싹이 이렇게 올라왔는데, 그냥 뭉그러진 거예요. 그래서 참 마음이 아팠었습니다.
조한건 신부 : 개성공단 방문 당일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십시오.
염수정 추기경 : 북한 측에서 추기경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그래서 북한 측에서 허락해 놓고는, 당일에 추기경이 방북한다는 소문을 우리 정부에서 언론에 흘려서, 기자가 280여 명이 몰려든 거예요. 그래서 명동에서 시작돼서 실황 중계를 하다시피 해서 개성공단 출입국 관리소를 넘어서는데, 이렇게 많은 수의 기자가 난리를 피우니까, 북한 사람들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에 교황님 방북이 계획 중에 있다는 추측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개성공단 방문을 두고 ‘사전 작업하러 가느냐?’는 그런 질문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고 진짜 조용히 가서 보기를 원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했죠. 이게 참 인내가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북측이든 남측이든 우리 교회의 움직임을 자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양측 모두 1년 동안 저의 개성공단 방문이 ‘어떻게 자기네들한테 유리하게 작용할까’를 자꾸 재봤어요. 그래서 시간이 거의 1년이 걸렸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지만, ‘저는 신자들을 보러 간다’, 그리고 ‘북한 땅을 밟아서 그곳에 하느님의 손길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두 가지 의지를 계속 표명하였고, 그것이 실제화되어 개성 방문이 이뤄진 것입니다.
조한건 신부 : 개성공단 폐쇄 이후에도 추기경님이 미사 집전하시는 등, ‘로사리오회’ 모임이 남아 있었습니다. ‘로사리오회’에서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교구 차원의 지원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염수정 추기경 : 직접 만나서 그런 얘기를 많이 했죠. 권한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지켜주고, 키워주고 보호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보자면 개성공단에 사업을 투자한 겁니다. 근데 일거리가 없어지고 또, 개성공단이 폐쇄되어버린 겁니다. 그 보상을 받아야 했는데, 아마 정부에서도 늦게나마 보상을 해주었을 거예요. 하지만 자기가 거기서 노력하고 투자하고 하는 것에 대해서 거의 반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또 그 안에는 아시다시피 영세한 작은 기업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분들이 나름대로는 개성공단이라는 특수한 위치 안에서 많은 일을 했고 또, 많은 이득도 얻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돌아서 나올 때는 거의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나오고, 보험에서 약정된 것 정도만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실에 굉장히 가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제가 각계에 보상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정부에 있는 사람들 만날 때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정치계 사람들은 나름대로 생각이 달라서 아쉬운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서로 간에 협약을 맺으면 그것이 지켜져야 하는데, 그냥 정치적인 이유로 돌변해 버리는 것이 참 마음 아픈 거예요. 그리고 (개성공단에 진출한) 중소기업을 통해서 여러 가지 제조 기술이 숙달되면, 그 산업이 또 발전되어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건데, 이런 것들이 계획만 거창했고 그냥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걸 보니까 그 비오 12세 교황님이 2차 대전 때 하신 ‘평화로 없어질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전쟁으로는 모든 것이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남는 게 없는 거예요. 그게 너무 맘이 아팠습니다.
조한건 신부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시면서, 참석한 신자들의 어떤 염원과 열의는 어떠했나요.
염수정 추기경 : 저는 민화위를 중심으로 끈질기게 계속 기도했다는 것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미사’를 통해서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했지만. 또 ‘평화를 위한 기도’나 ‘칠락 묵주의 기도’를 했고, 이를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운동을 한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정말 살아있고 또, 기도하는 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이 역사를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남길 수 있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본당이 처음에는 54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따져보니까 세 개가 더 있더라고요. 그래서 57개 본당 중에 하나씩을 갖기로 했는데, 저는 이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이기 때문에 평양교구 서리이기도 하고, 황해도 지역은 서울대교구이기 때문에 평양에 있는 관후리 성당과 황해도 매화동 성당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본당이란 개념 때문에 기도의 대상이 천주교 신자만 해당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고 본당이면 그 지역의 신자는 물론이고, 신자 외에 어려움을 겪거나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본당 중에 하나를 정해 기도를 하는 것은, 해당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고, 살과 피를 가진 분으로 이렇게 육화하셨는데, 본당도 이렇게 구체화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본당에 있는 모든 사람 위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자는 뜻으로 시작했습니다.
지역사회 공동체 안에서 본당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본당은 지역사회 안에서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이 함께 모인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신자들이 교회밖으로 나간 뒤에도 그 지역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삶을 영위했고 문화적인 생활을 영위했고, 교육 받았고, 경제생활을 했던 그런 지역사회 공동체를 주목하시면서 본당을 살리는 일이 결국 북한 사회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서울대교구 민화위가 진짜로 주목하고 힘쓰고 애쓰고, 우리 교구 자체가 살아나게 해야 할 길, 북한선교를 위해서 살려야 할 길은 북한 본당을 살리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북녘의 본당들은 공산화가 되기 전에서부터 있었던 거니까요. 그곳의 선교사들은 19세기 말, 1890년 무렵부터 활동했던 거죠. 이렇게 역사가 있고, 삶이 있는 곳이 바로 본당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 기도 운동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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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동호 아빠스(李東鎬, Abbot Placidus Lee Dong-ho, 1935~2006), 한국 가톨릭 교회의 제3대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장 겸 덕원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 1971년 4월 15일 비교적 젊은 36살에 왜관수도원 제3대 아빠스로 선출돼 한국인 최초의 아빠스가 되었다.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62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에서 활동하는, 외국에서 설립된 수도회들 중 첫 방인(邦人) 장상으로, 수도회 내적으로는 한국인이 국제적 공동체에서 동등하게 대접받게 되는 계기가 됐음을 의미했다.
2) 장익(張益, 십자가의요한, 1933~2020) 주교, 제4대 함흥교구장 서리, 6대 천주교 춘천교구장. 1987년 6월 교황청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장익 신부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도움으로 북한의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 당시 북한도 여기에 호응하여 1987년 10월 성당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당국의 허락 아래 선교 구역인 장충동에 성당 터를 마련한 뒤 1988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동년 10월 9일 ‘장충성당’(건평 151평)을 완공했고, 10월 12일 여기에서 첫 기도 모임을 가졌다.
3) 정의철(鄭義哲, 다마소) 신부, 서울대교구 사제, ‘교황청립 로마 한인 신학원’ 원장 역임. 1988년10월 30일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장익 신부와 함께 장충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에 앞서 북한 신자들은 1988년 6월 30일 ‘조선천주교인협회’(1998년‘조선가톨릭협회’로 개칭됨)를 결성하였고, 주일마다 신자 회장 박경수(바오로)의 주관 아래 장충성당에서 공소 예절을 봉헌하기 시작하였다.
4) 최창무(崔昌武, 1936~) 대주교. 천주교 광주대교구 제8대 교구장 역임.
5) 북한의 종교인, 정치인. 1942년 함경북도 출생,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활동 초기, ‘장재철’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1989년 1월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장으로 등장, 조선종교인협회 부회장을 겸하였으며, 다른 여러 직위를 거쳐 1994년 7월 ‘조선종교인협회’ 회장으로 승진했다. 1999년 6월 ‘천주교인협회’가 ‘조선카톨릭교협회’로 개편되면서 초대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즈음부터 ‘장재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 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거쳐, 건강상의 사유로 은퇴하였다. 2013년 3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출 이후 이를 축하하는 전문을 보냈다.
6)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인 박근혜가 발표한 대북 3대 제안. 2014년 3월 28일 독일 드레스덴 공과대학교에서「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대북 원칙이다. 주요 내용은 “(1) 남북한 주민들의 문제부터 해결해 가야한다.(Agenda for Humanity) (2) 남북한 공동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를 함께 구축해 나가야한다.(Agenda for Co-prosperity) (3) 남북 주민간 동질성 회복에 나서야 한다.(Agenda for Integration) : 첫 번째는 남북 주민의 인도적 문제 우선 해결, 두 번째는 남북 공동 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 구축, 세 번째는 남북 주민 간 동질성 회복, 또한 3대 제안을 실현하기 위한‘남북교류협력사무소’설치를 제안”이다.
[교회와 역사, 2025년 3월호, 구술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전 서울대교구장), 정리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0 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