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5일 (화)
(자) 성주간 화요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단체: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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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4-09 ㅣ No.1848

[한국 교회의 단체 · 11]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한국 문화의 복음화와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평신도 연구 단체

 

 

탄생배경과 창립

교회사적 맥락에서의 의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가톨릭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환점으로서, 교회가 사목 방향을 재정립하며 현대 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긴 교회의 역사 안에서 이 공의회의 의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이해되고 있고, 현재로서도 분명한 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평신도 역할을 재조명했다는 점이다.

 

‘평신도’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피라미드식 위계질서 속에서 하급 계층으로 여겨지며 상대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기에, 이 단어를 대체하자는 제안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의 위상이 크게 변화했기에 이런 제안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보편교회의 변화는 한국천주교회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2년 교계(敎階)제도가 자리 잡은 한국천주교회는 공의회의 정신을 수용하며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이에 따라 평신도 사도직이 활성화되었다. 또한,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 등 한국 사회의 변화에도 기여하며 국민에게 신뢰를 얻고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시기를 갖게 된다.

 

이런 흐름 안에서 한국천주교회가 맞이한 1984년 천주교 신앙 전래 200주년 기념행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한으로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이 행사는 한국천주교회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쇄신을 염원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탄생한 단체이다. 1984년 1월 5일, 현석호(요한, 1907~1988)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들이 ‘한국 교회의 현재와 장래 문제’에 관한 의견을 교환, 수렴하기 위해 매월 월례회를 갖고 교구청에 교회의 당면 문제점에 대해 건의하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그해가 갑자(甲子)년이었기에 ‘갑자회’로 이름을 붙였으며 같은 해 4월 11일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을 만나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고, 이후 김옥균(바오로) 주교 등 서울대교구 지도층을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를 건의하였다.1) 1984년 이루어진 교황 방한과 관련해서도 여러 의견을 개진한 갑자회는 이듬해인 1985년 1월, (한국 천주교 신앙 전래) 200주년 이후 평신도의 역할을 탐색하는 피정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양한모(아우구스티노) 선생은 교황방한 당시 ‘문화인과의 만남’에 있었던 강연 후 속편으로 ‘문화의 복음화’라는 강연에서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였다.2) 참석자들은 ‘문화의 복음화’를 통해 한국 가톨릭 신앙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고 의견을 모았고, 이를 주도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단체 설립의 필요성을 제안하였다. 그 결과, 현석호 회장이 주관해 온 「가톨릭교리연구소」의 기구를 개편, 강화하여 「한국가톨릭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향후 교리 교육과 한국 문화의 복음화를 추진하기로 의결하였다.3)

 

1985년 7월 20일 현석호 회장 등이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하여 이에 대한 동의를 얻고 동해 8월 1일 「한국가톨릭문화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나 같은 명칭의 연구소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의 이름인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이하 한가문연)으로 개칭하였다.4)

 

 

현재 활동

현재 세상과 교회의 상황에 대한 응답

 

한가문연의 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뉘는데, 전반기는 1985년에서 1998년까지, 후반기는 1998년부터 현재까지로 볼 수 있다.5) 전반기 동안, 연구원은 학술 심포지엄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전통문화와 가톨릭 신앙의 접점을 찾는 연구가 주요 과제였다. 이를 위해 초창기 3년은 「가톨릭신문」과 협력하여 발표 내용을 신문에도 자세히 실어 교회 안에서 논의를 활성화하려 노력하였다.6)

 

심포지엄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천주교와 유교의 관계를 다룬 주제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천주교와 불교에 대한 논의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한국 역사를 볼 때, 유교와 불교가 가장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기에 전통문화와 가톨릭 신앙의 소통 가능성을 찾는 적절한 노력의 일환이라 평가된다. 이와 더불어 도교, 민간신앙, 동학 등에 대한 발표도 이어졌다.7)

 

또한 평신도 사도직의 실천적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세미나와 주보 기고 글을 통해 일반 신자들이 사회문제를 가톨릭적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세미나는 1988년부터 시작하여 2000년까지 총 18회 개최하였는데, 교회의 사회 참여, 노동문제, 법의 의미, 생명 의료 문제,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 과학 속 신앙, 남북 관계에 대한 이해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8) 1985년 명동대성당의 요청으로 시작된 주보 기고 글은 1996년과 1997년에 단행본 『빈 들판』, 『삶과 신앙』으로 출간하였다.

 

후반기의 시작은 1998년이다. 이 해에 창립부터 관여해 온 김태봉(바오로) 이사장이 물러나고 양승규(시몬) 원장이 원장 겸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2000년 양승규 이사장이 국가기구의 책임자가 되어 이사장직을 떠나면서 일종의 과도기를 거치게 된다.9) 이 시기를 지나며 임원진의 세대교체와 더불어 연구원의 방향성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된다. 그 결과 2009년 김민수(이냐시오) 신부를 새 원장으로 선임하면서 활동이 다시 활발해지는 계기를 맞이한다. 김민수 신부는 문화 복음화와 관련된 연구와 출간을 통해 교회 안에서 문화전문가로 알려졌기에 ‘문화의 복음화’라는 한가문연의 설립 취지에 적임자로 여기고 선임한 것이다.10)

 

후반기 활동은 그동안 주로 한국의 전통 사상에 대한 연구를 했던 것과 달리, 현대 사회에서의 가톨릭 영성, 생태적 책임, 디지털 문명에 대한 신학적 접근으로 주제를 확장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학술 발표회 형식의 심포지엄 대신 발제자가 발표를 하고 청중들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콜로키움 형식을 도입한 것도 전반기와는 다른 변화이고, 연 2회에 개최하여 신앙과 영성에 목마른 신자들에게 큰 울림을 전해 주었다.11)

 

나아가 후반기 활동의 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독서 사목을 위한 다양한 활동과 ‘가톨릭 문화 아카데미’의 운영이다.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면서 정보가 넘치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책과 텍스트의 중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기에, 한가문연은 독서 사목을 통해 신자들의 영적 성장과 지적 성찰을 돕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독서포럼을 통해 방법론을 계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와 공동으로 두 번의 심포지엄을 열었다.12) 또한 ‘가톨릭 문화 아카데미’를 통해 SNS(social networking service) 시대의 독서사목 방안과 전문적인 내용을 쉽게 풀어 전하는 소책자 시리즈를 발간하였다. 그 결과물이 『디지털 영성』과 『디지털 시대의 문화복음화와 문화사목』이다. 이런 학술 활동 외에도 한가문연은 각 본당의 요청에 따라 견진성사 교리, 사순 · 대림 특강 그리고 봉사자 교육 프로그램을 계발하여 신자 재교육에 기여했다.

 

한가문연이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설립 초기부터 재정 확보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기에 외부 지원을 받는 방안 등을 추진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2008년 9월 정기회의에서 후원회 결성을 결정하고, 후원회원 모집을 시작하였다.

 

 

앞으로 전망

하느님의 뜻을 따라 나아갈 방향

 

1985년 설립취지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문화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케 하는 원동력이다. 현대 교회는 각 사회가 지닌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가치를 존중하면서 여러 문화와 접촉할 것을 권장한다. 이는 문화를 통해 교회가 인간과 만날 수 있고,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즉 세상 어느 곳에서나 파견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복음화를 이룩하고, 문화 발전에서 인간 옹호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와 문화가 다 같이 풍요롭게 되는 길이며, 교회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방법인 것이다.13)

 

2025년 올해 연구원은 설립 40주년을 맞았다.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하여 긴 세월 운영하면서, 많은 활동과 연구물을 생성하고 배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사이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가문연은 설립취지문에 밝힌 ‘문화의 복음화’를 소명으로 여기고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 6월에는 ‘왜 다시 문화의 복음화인가?’라는 제목의 세미나로 출발하며, ‘문화의 복음화’를 위한 연속 기획 세미나를 다시 시작함을 알렸다. 기사에 따르면 한가문연은 “‘문화의 복음화’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고민해 보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그에 맞춰 교회의 참된 사명을 충실히 다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노력을 다시 새롭게 하려 한다.14)

 

‘문화의 복음화’는 삶의 전 분야와 관련된 것이기에 한가문연의 관심은 설립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확대되어, 현재는 영 〮 유아 교육 분과, 스마트 쉼 문화 운동본부, 청년 해외봉사단을 유관 단체로 두면서 다양한 삶과 관련된 주제를 연구하며, 연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또한 『세상 속의 아버지 집』, 『팬더믹과 한국가톨릭교회』 등 다양한 책도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다.15)

 

이처럼 한길을 계속 걷는 한가문연이 교회와 세상의 가교(架橋)로서, ‘문화의 복음화’라는 설립 취지에 따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실천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선배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열망과 헌신이 활짝 꽃피기를 기대해 본다.

 

………………………………………………………………………………………………

 

1)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30년사』(이하 30년사), 15쪽. 이 자료는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이 만든 ‘다음 까페’(https://cafe.daum.net/cakc)의 게시판 중 「한가문연 세미나」 에서 볼 수 있다.

 

2) 같은 책, 15~16쪽 참조

3) 같은 책, 18~19쪽 참조

 

4) 한가문연의 설립 발기인 및 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현석호(가톨릭 교리연구소 이사장), 원장 김태봉(전 연세대 교수), 감사 양한모(크리스찬사상연구소장), 간사 김말룡(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장). 이사 장진(서강대 교수), 한용희(숙명여대 교수), 구중서(수원대 교수), 류근일(조선일보 논설위원), 안병영(연세대 교수), 김어상(서강대 교수), 노길명(고려대 교수), 조광(고려대 교수), 양승규(서울대 교수).『30년사』, 20쪽.

 

5) 한가문연 홈페이지는 시기를 1세대, 2세대로 구분하면서 변화 시점을 2008년으로 잡고 있다. 이는 구성원의 변화를 중심으로 나눈 것이지만 활동의 변화와도 연관성이 있다. 다만, 『30년사』에서는 1998년을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전반기를 이끌었던 현석호 이사장은 1988년 선종하였고, 1998년 김태봉 이사장이 사임했을 뿐 아니라 한가문연을 여러 모로 지원한 김수환 추기경도 서울대교구장에서 사임하였기에 한 시기가 마무리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 글은 『30년사』의 구분에 따랐다.

* 한가문연 홈페이지 주소: https://www.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com

 

6) 「가톨릭신문」, 제1493호(발행일 1986.2.16) 1면부터 시작하여, 제1504호(발행일 1986.5.4) 8면, 제1528호(발행일 1986.10.26) 7면, 제1576호(발행일 1987.10.18) 1면까지 3차례의 심포지엄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는 기사가 연재되었다.

 

7) 『30년사』, 24쪽 표 참조.

 

8) 「가톨릭신문」, 제16023호(발행일 1988.4.24) 2면 기사를 보면, 1차 세미나를 개최한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이후 세미나에 대해서는 『30년사』, 27~28쪽 [표] 참조.

 

9) 양승규 이사장은 당시 새로 설치된 국가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원장직도 2002년 구중서(베네딕도) 교수에게 넘겼다. 『30년사』, 35쪽.

 

10) 『30년사』, 37~38쪽 참조

11) 『30년사』, 27~28쪽 [표] 참조

 

12) 2010년 심포지엄은 ‘책 읽는 교회, 성숙한 신앙’, 2011년 심포지엄은 ‘가톨릭 양서를 어떻게 읽고 알릴 것인가’를 주제로 진행하였다.

 

13) 전문은 다음 까페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소개 게시판에 실려있다(https://cafe.daum.net/cakc/QtsH/1).

14) 「가톨릭신문」, 제3400호(발행일 2024.7.7), 6면.

15) 발행책자들에 대해서는 한가문연 홈페이지의 ‘발행책자’ 코너 참조.

 

[교회와 역사, 2025년 2월호, 현재우 에드몬드(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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