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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한국교회의 시복시성, 순교자에서 증거자 시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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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고 헤아리고] 한국교회의 시복시성, 순교자에서 증거자 시대로
지난 1월호 「교회는 왜 시복시성을 하는가」라는 글의 끝자락에서 소개한 대로, 한국천주교회 시복시성의 역사는 당연히 순교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이 땅의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기에 순교 영성은 한국교회 영성의 기초이고 토대이다. 일만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들 어느 한 분도 예외없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신앙의 후손들이 갖는 한결같은 마음이지만 철저한 역사적 고증이 필요한 시복시성의 그릇에 그 모두를 담기는 현실적 어려움이 따랐다. 79위와 24위 복자를 합한 103위 성인의 탄생 이후 아쉬움에 124위 복자를 모시게 되었고, 그래도 아쉬워 추가로 133위 ‘하느님의 종’을 모시기에 이르러 현재 교황청 심사가 진행 중이다. 순교의 역사는 조선 왕조 치하만이 아니었다.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 북한 공산당에 의해 역시 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순교했다. 이들 가운데 철저히 고증이 가능한 분들을 선별하여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북한 덕원수도원의 후신)의 38위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추진한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가 교황청에서 시복 심사 중이다. 아마도 이로써 한국천주교 역사의 집단적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은 마무리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부터 한국교회 시복시성의 역사는 순교자에서 증거자 시대로의 전환을 맞는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첫 증거자 시복 추진은 이미 2002년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안건으로 시작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2016년 증거자 성덕 심사를 통과하여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고, 현재 기적 심사를 남겨놓고 있다. 그후 이어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례가 최양업 신부의 증거자 추진 20여 년 후인 2023년부터 서울대교구에서 추진하고 있는 초대 조선 대목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와 11대 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안건이다. 그 외 개별적으로 한국순교복자가족수도회에서 창설자 방유룡 레오 신부 시복을 준비 중이고, 기타 기관과 단체에서도 나름의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증거자에 대한 성덕 심사 내용은 ‘하느님의 종’의 생애와 덕행과 명성이다. 생애는 평생의 삶을 관통하는 순수함과 고결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덕행은 향주삼덕(믿음, 희망, 사랑)과 사추덕(지혜, 정의, 용기, 절제), 복음적 권고(가난, 순명, 정결), 겸손 등 기타 덕행에 대해서 영웅적 수준에서의 실천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성은 이러한 성덕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하느님의 종’이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선종 때에 확연히 드러났고, 나아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시복 심사(재판)는 교구 단계에서 진행되는 예비 심사(예심)와 교황청 단계에서 진행되는 (본)심사로 구분된다. 교구 예심에서는 위에 언급한 ‘하느님의 종’의 생애와 덕행과 명성과 관련된 다양한 문헌 증거와 증인 증거를 재판 형식의 심문 절차를 통해 수집하게 된다. 이 모든 재판 기록은 교황청 시성부로 보내져서 정식 심사 자료 작성에 활용된다. 마침내 이 성덕 심사 자료에 대한 시성부 역사위원회, 신학위원회, 추기경과 주교 위원회의 3단계 심사를 통해 ‘하느님의 종’의 영웅적 덕행에 대한 윤리적 확실성이 인정되면 교황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여 승인받음으로써 가경자로 선포된다. 순교자의 경우는 순교 심사를 통과하면 바로 복자로 선포되지만, 증거자의 경우에는 기적 심사를 추가로 통과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증거자 시복 대상인 최양업 신부, 브뤼기에르 주교,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할 때 이 영웅적 인물들은 과연 시대가 낳은 인물인가 아니면 그 개인의 탁월한 덕행으로 시대를 풍미하게 된 것인가 하는 공상을 하게 된다. 아무튼 그 시대에 꼭 맞는 맞춤형 인물을 하느님이 보내주신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에 가닿는다. 한국교회의 베드로와 바오로로 일컬어지는 성 김대건과 가경자 최양업, 김대건은 순교로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최양업은 김대건의 남은 고난의 잔을 채우는 심정으로 살아낸 증거로 한국교회의 기초를 세운 두 분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거부한 조선 선교를 어떻게 자원(自願)할 수 있었는지, 나아가 마치 예언자 모세처럼 조선 입국의 불확실성까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후임자들을 준비시켜, 마침내 그들을 통해 조선 입국에 이르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우리나라가 사회적으로 칠흑같이 어둡던 시기에 빛을 비추는 시대의 예언자였고,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시기에 그 정신과 실천을 몸소 가르치고 보여준 시대의 사목자였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시대에 이러한 영웅들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 생각할수록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증거자의 시복시성은 이처럼, 시대의 정신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신앙인으로서의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도록 이끄는 길잡이와 같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 시대에, 우리 가운데에, 이러한 놀라운 영웅들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깊히 감사드리며, 우리 자신도 비록 소박하지만 우리 시대의 작은 영웅으로서 살아가는 용기와 은총을 청하게 된다.
[교회와 역사, 2025년 2월호, 박선용 요셉 신부(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부위원장)] 0 1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