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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11: 사랑과 사랑하다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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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11) ‘사랑’과 ‘사랑하다’의 관계
교리서 제16과 “일관된 증여가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1항), “행복은 사랑 안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2항), “사람은 신적 증여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가시적 세상에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 안에 선물의 내적 차원을 가지고 (…) 그의 하느님과 닮은 고유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3항)는 사랑의 신학적 논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명사로 한처음의 ‘숨’, 세례 때의 성령,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내재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원천이며 근원적인 이 사랑을 철학에서는 에로스로 표현한다. 교회 문헌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항)이라 에로스를 말한다. 인간 몸은 육체이고 영혼이다. 육체가 영혼을 지니고, 영혼이 육체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긴 세월 이 둘을 분리했고, 사랑 또한 에로스와 아가페로 나누어 서로 만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사랑인 듯 말했다.
그러나 에로스는 인간 육체에 그 뿌리를 둔 성적 충동 그 이상이며, 인간이 자신의 삶에 열정적으로 집중하게 하고, 욕망과 희열, 감사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주는 선물이요, 생기를 주는 힘이다. “사랑은 영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이다.(「신학대전」 I-9) ‘몸 신학’은 에로스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또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설명한 놀라운 가르침이다.
관능적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는 긴 세월 교회 안에서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 놀라운 사랑의 얼굴을 찾았다. 많은 성인성녀들은 자신의 사랑을 에로스라 고백했고, 또 어떤 성인은 자신의 에로스는 예수 그리스도라 했다. 하느님은 성을 인격과 결합시켰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형태를 말하셨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로스를 덜 열정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인격적이게 만들어 그 정상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에로스가 지닌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 창조주께 있음을 받아들일 때, 모든 은총의 원천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에로스와 은총이 동반 관계에 있음을 알고 욕망들을 정화하여 타자에게 향하게 된다. 이때 ‘사랑’은 나의 지향과 선택에 의해 행위로 재창조되는 ‘사랑하다’가 된다. “성은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육체성이 지닌 신비한 힘, 그 이상의 것입니다.”(2항) 어느 성소의 길이든, 에로스적 갈망 안에서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행위는 구원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재하던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백성이 사랑을 잠시 잊은 것이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떼를 쓰고, 찬미가에서 그 사랑을 노래한다. 묵시록에서는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2,4)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처음 받은 그 사랑을 버리고 사랑을 다르게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를 이루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여기에 머문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구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의 답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신학대전」, Ⅱ-Ⅱ, q.23)이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열매는 행복이다.
[가톨릭신문, 2025년 3월 23일,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0 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