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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15: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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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15)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파리지앵의 영적 쉼터,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 프랑스 파리 6구의 생제르맹데프레 성당. 6세기 지은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당으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11세기부터 증개축을 계속하다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수도원 건물 중 성당만 남았다. shutterstock
파리 6구의 영적 쉼터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우리나라 여행객이 가장 많이 검색한 유럽 여행지 1위는 파리입니다. 에펠탑·샹젤리제 거리·몽마르트르 언덕⋯. 무엇보다 5년간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난해 12월 재개관한 노트르담 주교좌 대성당은 가고 싶은 유럽 명소 1순위일 테죠. 그런데 가톨릭 순례지로서 파리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안타깝게도 프랑스 혁명 때 너무나 많은 수도원과 성당이 파괴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성당들은 대개 기념비적 건축물로만 소개되기에, 파리는 성모 발현지 순례 일정표에서 쉬어가는 기착지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파리에는 바쁜 삶 속에 영적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일상의 섬이 있습니다. 카페·갤러리·부티크가 많아 파리지앵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센강 남쪽 기슭의 파리 6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6구의 생제르맹데프레 지구에는 파리 시민의 오랜 순례 장소이자 가톨릭 신앙의 중심지인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성당이 있습니다. 생제르맹데프레대로 교차로에 우뚝 서 있지만 스쳐 지나갈 때가 많지요.
- 11세기 재건된 성 제르맹이 처음 묻힌 생심포리앙 소성당(좌)과 르네 데카르트 무덤 소성당(우). 생트제느비에브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매장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 중 수도원이 파괴되어 1819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필자 제공
- 생제르맹데프레 성당 본당(좌), 가대석과 내진 부분(우). 1794년에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수 톤의 화약이 폭발하여 크게 손상됐다. 1821~1854년 신고전주의 건축가 에티엔 이폴리트 고드와 빅토르 발타르가 지금 모습으로 복원했다. 필자 제공
성 십자가와 성 빈첸시오 성유물 모셨던 성당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은 543년 프랑크 왕국을 창건한 클로비스 1세의 셋째 아들인 킬데베르투스가 설립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입니다. 킬데베르투스는 서고트족을 상대로 원정 중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204년 그곳에서 순교한 성 빈첸시오의 튜니카 조각을 선물 받아 파리로 가져옵니다.
왕은 당시 유럽에 전해진 성십자가 조각과 성 빈첸시오의 성유물을 모시고자 542~548년 시테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을 짓도록 합니다. 로마 시대에 이시스 사원이 있던 곳이었지요. 558년 파리 주교인 성 게르마누스, 즉 성 제르맹이 수도원 축복식을 거행했는데, 처음에는 생트크루아에생뱅상 수도원이라 불렸습니다.
킬데베르투스는 이곳 성당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그 뒤로 수도원은 632년 다고베르 1세가 파리 북쪽 교외에 생드니 수도원을 세우기 전까지 메로베우스 왕가의 무덤 역할을 하며 지역의 새 중심지로 발전합니다. 수도원의 아빠스는 1670년 무렵까지 주변 지역에 대한 영적·세속적 관할권을 모두 행사했습니다. 지금의 디드로 동상과 생제르맹데프레 성당 사이에 뻗은 생제르맹대로에 서서 보면 수도원 중심으로 센강 좌안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데프레’라는 수식어는 수도원이 도시 밖 들판에 있었음을 나타내는데요, 당시 파리 도시가 지금에 비하면 무척 작았던 거지요.
755년 생심포리앙 소성당에 매장했던 게르마누스 주교의 유해를 성당 주제단 뒤편으로 이장했는데, 이때부터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성 게르마누스는 오툉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아빠스였는데, 형제들의 반발을 살 만큼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한없이 베풀었다고 합니다. 주교가 돼서도 수도자로서 미덕과 금욕을 실천했고, 이교도 관습을 없애고 왕가의 갈등을 중재해 평화를 이루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중세 파리 시민들은 전염병이나 전쟁 등 위기가 닥칠 때면 성인의 성유물을 모시고 거리를 돌았습니다.
- 13세기 건축된 동정녀 소성당의 흔적(좌)과 가대석의 성모자상(우). 1999년에 발굴된 성모자상으로 중세 파리지앵의 성모 신심을 엿볼 수 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모자상과 느낌이 비슷한데, 미완성 상태임에도 매우 세련된 표정과 우아한 자세를 보여준다. 필자 제공
-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도면과 스케치(1725년). 상아색 부분인 성당만 현재 남아 있다. 보라색 부분은 동정녀 소성당으로 붕괴가 우려돼 19세기 초 쌍둥이 탑과 함께 철거됐다. 필자 제공
개혁운동 주도했던 생모르 베네딕도 연합회의 모원(母院)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성당 외관은 다소 칙칙하고 밋밋합니다. 지금과 달리 중세 초 수도원 지붕은 금박이어서 ‘생뱅상르도레’라고도 불렸는데, 그 때문인지 9세기 바이킹의 주 표적이 되어 두 번이나 약탈당하고 불탔습니다. 본당·외벽과 아케이드·종탑 등은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된 것으로 묵중한 서쪽 탑은 에펠탑에서도 보이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종탑입니다.
성당 안은 북적이는 대로변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화려한 천장, 성당 벽을 가득 채운 프레스코화, 디테일이 살아있는 기둥과 조각상,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드리운 햇살 속에 잠시 묵상에 잠기면 참 아름다운 주님의 집이구나 느낄 겁니다.
하지만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이 정적인 장소만은 아니었습니다. 1618년 창립된 프랑스 생모르 베네딕도 연합회의 모원으로서 개혁운동을 주도했으며, 프랑스 혁명 전까지 생빅토르 수도원·생트제느비에브 수도원과 함께 신학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당시 200여 수도원이 연합회에 가입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전례와 기도생활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베네딕도 규칙을 엄격히 따르면서도 당대 신학과 학문의 발전을 적극 수용했고, 교부학·성경 번역과 해석 등 가톨릭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에 적대적인 민중들에 의해 1792년 9월 세브뢰 총아빠스가 피살됐고, 1818년에는 연합회도 해체됩니다.
프랑스 혁명 중 다른 종교 시설처럼 이곳 수도원 건물도 파괴되고, 성당은 소금 공장으로 바뀌었습니다. 500년 넘게 파리 시민들이 애원을 털어놓던 동정녀 소성당은 프랑스 혁명 중 곡물 위원회 사무실로 쓰다가 1802년 철거당합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이 오늘날 정치·경제·사회의 토대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습니다만, 당시 프랑스 가톨릭에는 재앙이었지요.
<순례 팁>
※ 파리 6구 지하철 생제르맹데프레역(M4)에서 올라오면 교차로에 성당이 바로 보인다.
※ 성당 무료 가이드 : 매월 첫 토요일과 셋째 일요일 14:30(파이프오르간 아래 집결, 7·8월 제외). 2~3차례 저녁 미사 후 음악회가 열린다. 사르트르·보부아르·헤밍웨이 등이 자주 찾던 카페 ‘레듀마고’ ‘카페드플로르’가 지척에 있다.
※ 생제르맹 성당 미사 : 주일과 대축일 11:00·19:00, 평일 : 07:00(화~금)·12:15·19:00(월~토).
[가톨릭평화신문, 2025년 2월 16일, 차윤석 베네딕토(전문 번역가)] 0 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