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ㅣ사상
철학상담7: 영성의 철학적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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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7) ‘영성’의 철학적 의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영이 깃든 특별한 존재
철학상담에서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영성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개념인데 특히 서구 그리스도교의 영향 아래에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을 의미해왔다.
라틴어 ‘spiritualitas’의 현대어 번역인 영성은 본래 어휘적으로 숨·호흡·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프네우마(πνεύμα)에 뿌리를 둔 형용사 프네우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ός, 신령한)에 어원을 두고 있다. 구약 성경(창조 이야기)과 고대 로마 신화(히기누스의 쿠라 이야기)를 보면 인간은 흙으로부터 나와 신의 숨결(영)을 받고 생명을 얻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영이 깃든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영성은 다양한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영성은 초월과 내재를 포괄하는 중층적인 의미를 지닌 심오한 개념으로서, 특히 철학에서 깊은 통찰이 요구되는 인간 본성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다. 영성은 그 어원에서 짐작하듯 기본적으로 인간 고유의 생명 원리를 뜻한다. 인간 본성으로서 영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에 근거한다. 인간의 생명은 단순한 유기체적 활동을 넘어 정신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때 그 핵심적 원리가 이성에 따른 로고스의 원리요, 나아가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를 좇는 초월의 원리다. 여기서 인간 정신의 고유한 기능과 원리로서 감성-생명, 이성-로고스, 영성-초월의 특성이 드러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묻는 존재다. 물음은 정신의 본질에 속한다. 인간 정신의 고유한 특성은 인간이 본능에 따르지 않고 자연과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사물을 대상화하고, 이를 통해 자기를 의식할 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런 인간의 정신적 행위를 사유요, 인식이라 부른다.
물음은 앎을 추구한다. 물음을 통해 앎의 대상이 되는 것 일체를 ‘존재’라 부르며, 물음은 궁극적으로 존재 물음이다. 매우 바쁘거나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정신이 없다’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이 말에는 삶의 궁극적 의미인 존재 물음을 회피할 만큼 영성이 결핍되어 있음이 함축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 너무 함몰되어 철학적 물음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위기가 닥쳐올 때는 다시금 진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지게 된다.
물음을 촉발하는 것은 외부 자극으로 작동되는 우리의 감성이다. 일상의 익숙함과 편함이 낯섦과 불편함으로 바뀔 때, 구체적으로 고통과 상처, 좌절과 두려움으로 내몰린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 이유와 해결을 찾아 진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감성에서 촉발된 물음은 아직 그 의미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주제화되고 있지 않기에 이해를 위해 감성보다 이성의 도움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불안한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피동적인 감성이 아닌 능동적인 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 모든 것이 이성만으로 합리적으로 설명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데 있다. 엄연한 현실인 삶과 존재의 심연·불확실성·부조리 속에서 우리는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성의 합리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숭고한 절대적 가치와 의미를 향해 부단히 초월하고자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영성의 힘이라 하겠다.
[가톨릭평화신문, 2025년 2월 16일, 박병준 신부(예수회, 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0 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