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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다시 보는 생명윤리: 인공 임신 중절(낙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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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생명윤리] 인공 임신 중절(낙태)
지난 2019년 4월,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가 인공 임신 중절, 즉 낙태를 형사상 범죄로 규정하는 것을 위헌이라고 판결하고, 국회가 2020년 10월 임신 14주까지 특별한 조건 없이 낙태를 허용하면서 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에 따라 장애나 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 24주차에도 사실상 낙태 자유화가 되었습니다. 2020년 한 해,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인공 임신 중절 실태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3만 2천여 건의 낙태 시술을 한 만 15세부터 49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 중, 20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미혼인 경우가 50.8%에 해당합니다. 지난해 3월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의 낙태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으로서 엄연히 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할 태아가 지닌 생명 가치가 훼손되어 가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활동가들은 여성의 ‘자기 몸 결정권’을 주장하며,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할 권리’와 ‘출산 시기와 자녀 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반면, 교회는 기본적으로 인공 임신 중절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인간 품위를 저하시키는 모든 것에 대하여 인간을 수호할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에 관하여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인공유산 반대 선언문 1항 참조). 임신을 통해 “어머니”가 된 여성들의 자기 몸 결정권 행사로 그 뱃속의 자녀가 죽어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상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된 교회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자녀들의 귀한 생명을 해치거나 그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간절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는 순간부터 그 귀한 생명은 시작 됩니다. 그때부터는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가지는 새로운 한 사람의 생명입니다. 수정된 배아라고 해서, 아직은 사람의 꼴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한다면, 시간이 흘러 세포 분열을 통해 그 꼴을 갖춘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인공유산 반대 선언문 12항 참조).
잉태의 열매를 제거하려는 결정이 순전히 낙태 지지자들의 주장처럼 이기적이거나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더 중요한 가치들, 곧 산모 자신의 건강이나 다른 가족들의 생활 수준의 하락을 막기 위해서 내려질 때, 대개 그것은 어머니에게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결정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는 태어날 아기가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유들이나 이와 유사한 이유들이 무고한 인간을 고의로 죽이는 행위를 결코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생명의 복음 58항 참조).
물론 그러한 결정을 내린 어머니에게 교회는 단죄와 파문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그 엄청난 잘못에,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을 그 상처에 실망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겸손과 신뢰로 자신을 참회에 내맡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참회 앞에 선 그 어머니를 용서하시며, 화해의 성사 안에서 당신의 평화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생명의 복음 99항 참조). 그리고 “어머니”인 교회가 그 상처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보듬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5년 2월 16일(다해) 연중 제6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원재 마르코 신부(교구 가정사목국)] 0 2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