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5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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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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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2-12 ㅣ No.1317

[조찬 세미나]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안녕하십니까? 박준양 세례자요한 신부입니다.

 

오늘 강의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2007년에 발표하신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라는 회칙에 대한 내용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 “누가 눈에 보이는 것을 희망합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제목을 붙이셨는데 이 내용을 여러분께 조금 소개해 드리면서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좋은 메시지들을 함께 묵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회칙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반부는 여러 가지 희망에 관한 메시지들, 후반부는 구원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내용,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심판이라든지 천국, 연옥 이런 구원의 문제를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세미나에서는 주로 전반부에 있는 희망적인 메시지들에 관해서 묵상하고 시간이 남으면 후반부의 내용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2항하고 3항에서 첫 번째, ‘신앙은 희망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교의 소식은 정보 전달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행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포머티브(informative)와 퍼포머티브(performative)라는 개념을 구분할 수가 있는데 인간이 말하는 두 가지 카테고리가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정보를 지시하는 인포머티브한 언어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정보화 시대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죠. 그러니까 이 정보 중심의 언어가 너무도 많이 사회와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정보가 곧 돈이고 권력이며 힘인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언어에는 실행적이며, 수행적 의미의 퍼포머티브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변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그 사람의 책임이지만 이 퍼포머티브, 즉 수행적인 말씀은 의미를 통교하기 때문에 그 말씀 자체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선종하실 때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본인이 행복하다는 정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하느님 안에서 느끼는 그 어떤 평화로움을 우리 모두에게 전달해 주고 싶은 그런 의미 통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 세대에서 이런 어떤 의미 통교의 체험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이런 의미 통교적인 언어는 사라지고 정보 지시적인 언어가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저도 1년 전, 17년간의 신학교 교수 생활을 정리하고 이쪽 명동 가톨릭회관에 있는 레지오마리애 세나뚜스 본부로 왔는데 최근에 들어오는 신학생들도 사정은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가정에서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겠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은 바로 우리가 접하는 복음, 다시 말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꼭 언어로 표현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침묵의 언어, 그러니까 꼭 버벌(Verbal) 하지 않고 논버벌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사람의 눈짓과 느낌과 동작으로 표현되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율법학자들과 바이사이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막 죽이라고 할 때 말없이 땅바닥에 뭔가를 쓰시면서 우리에게 주셨던 어떤 커뮤니케이션 같은 걸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알고 지내던 수녀님께서 췌장암에 걸리셨는데 암 말기라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계신 상태였습니다. 이분은 병원에서 간호사로 계셨던 수녀님인데 연세가 좀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다른 수녀님과 함께 병문안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함께 갔던 수녀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병상에 누워 계신 간호사 수녀님 옆에 앉아서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손을 잡은 상태로 한참 침묵이 흐르는 걸 옆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간호사 수녀님께서 눈물을 쏟으시면서 어떤 평화로움을 느끼시는 걸 봤어요. 결국은 간호사 수녀님 본인 스스로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하면서 얼마나 많이 죽어가는 환자들, 말기 암 환자들을 보았겠습니까? 거기에서 본인이 얼마나 많은 위로를 주려고 했고, “죽음이 끝이 아니에요. 끝에는 뭔가 희망이 있어요. 고통이 있지만 참아내세요.” 이런 말들을 많이 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이제 본인이 환자가 돼서 누워 있으니깐 그렇게 주는 말들이 전부 다 살아있는 자들의 사치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죽어가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 간호사 수녀님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계신다고 많은 사람이 와서 또 그런 말들을 했을 텐데 이분께서는 그걸 너무 잘 알고 계신 거죠. 본인도 그렇게 했었고 그러나 입장이 바뀌어서 본인이 지금 누워 있을 때 ‘저것은 내 고통을 정말 모르는, 내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산 자들이 하는 건강한 자들의 사치다.’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같이 갔던 수녀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한마디도 안 하시고 손을 잡고 있는 그 침묵 속에서 ‘얼마나 힘들고 아프세요.’라는 그 공감의 메시지가 전해졌던 것 같아요.

 

그 공감이 그 간호사 수녀님에게 어떤 치유적인 감동을 주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고해성사라는 것은 그걸 들으면서 공감하는 것이고, 치유는 공감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4복음서 특히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치유 기적을 행하실 때 항상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라는 표현인데, 신약성경 그리스도 원문에 나오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ζομαι)’라고 하는 동사는 우리가 미사 때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그 표현입니다. 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스플랑크논(σπλάγχνον)이라고 하는 의대 교과서에도 나옵니다. 사실은 인간의 내부 장기를 가리키는 해부학적인 용어인데 사실은 우리의 말 안에서도 인간이 내부 장기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라든지, 이순신 장군이 남겼던 유명한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느냐,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 애간장이 녹는다. 그러니까 이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이나 마귀 들린 사람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가지실 때 그것이 그냥 불쌍하다는 값싼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의 고통을 예수님 스스로 창자가 파열되는 내장이 끊어지는 고통으로 공감하시면서 그 공감 때문에 치유를 해주신 것이지 본인의 어떤 신적 권능을 뽐내거나 자랑하거나 그래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론적인 치유는 바로 공감 어린 자비의 치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언어로 표현되든, 침묵의 언어이든 바로 이런 공감을 통한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그런 실행적인 언어, 의미 통교적인 언어가 되겠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이사야 예언서 55장에서 ‘주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히브리 말로 ‘다바르’라고 하는데 그 다바르라고 하는 것은 이사야 예언서에서 “인간의 말은 쓸데없이 나가지만 주님, 나의 말은 그렇지 않다. 나의 말은 비와 눈이 와서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그래서 땅에서 새로운 씨앗이 자라나게 하는 것처럼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헛되이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이 사명을 이루고서야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라고 하는 그러니까 뭔가를 반드시 수행하는 말씀, 실행하는 말씀 이게 다바르 전통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에 나오는 로고스 전통과 연결해서 해석하면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말씀 자체이다라고 생각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인간의 말에 대한 성찰을 저 스스로 많이 해봅니다. 내가 좋은 의미로 약속했지만,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성 때문에 어떤 때는 잊어먹기도 하고 어떤 때는 힘에 부쳐서 안 되기도 하는데, 주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말을 통한 구원적인 행위 바로 ‘의미 통교를 통해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이 행동이야말로 우리에게 참으로 희망을 주는 것이다.’라는 것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굉장히 이렇게 짧은 문장 안에 함축하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2번 10항에서 12항에 나오는 내용이죠.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바랍니까? 영원히 사는 것은 은총이라기보다는 저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죽음을 최대한 늦추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끝없이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루하고 결국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사실 이 회칙의 전반부는 인간 삶의 정말 아주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인간이 추구하는 불사불멸성(immortality)의 문제를 다루고 계신 거죠. 이 불사불멸성은 정말 모든 인류의 염원이기도 하고 특히 권력자들의 염원이었죠. 이 세상을 정복하고 난 다음에 이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때 그다음에 영원한 생명을 찾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가 중국 진시황제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6개 나라를 통일하고 진나라의 첫 황제가 되면서 도량형도 통일하고 화폐도 통일하고 굉장히 많은 치적을 남기면서 50대 초반에 황제로 등극하였지만, 정말 좋은 마음으로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살았으면 건강하게 한 20~30년은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습니다. 천하 통일이라는 목표가 있을 때는 그것을 향해 전진해 왔는데, 지상에서의 어떤 목표를 이루고 나니 이제 그다음부터는 공허감에 시달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했던 ‘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이 소유 양식이 있고 존재 양식이 있는데 소유함으로써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이죠. 행복하지가 않다는 겁니다. 하나를 소유하면 더 이상을 소유하고 싶은데 진시황제는 지상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나니 그다음부터 완전히 멘붕 상태,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우리에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삶의 양식으로 변화될 때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쨌든 진시황제가 그러한 불안감과 공허감에 시달렸을 때 이것을 또 기가 막히게 파고 들어가는 간신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서복 혹은 서불이라고 하는 신하가 “폐하 저기 책에 보면 장생불로 초라는 게 있는데 남쪽의 어느 바닷가 섬에 가면 그게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세속의 때가 묻은 어른들 눈에는 안 보이니까 때 묻지 않은 동자 80명을 데리고 우리나라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제주도까지 왔다고 하죠. 한라산 백록담 흰 사슴이 먹는 연못 그곳에서 장생불로 초를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합니다.

 

교황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이렇게 영원히 산다면 지구의 어떤 폭발 문제 정말 인구 폭발이라든지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렇게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사실 오늘날 불사불멸성에 대한 시도가 과학 기술의 힘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과학 기술의 힘이 인류 역사상 이렇게 발전한 적이 없고 특히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AI의 출연이라든지, 지금 5G를 이야기했었는데 6G(6 제너레이션)는 IT와 BT(바이오 테크놀로지)가 결합되는 형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건강이라든지 생명 연장에 있어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고 상용화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미항공우주국 나사에서 항공우주산업을 선도했는데 이제는 일론 머스크하고 아마존의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가 민간 부문에서 경쟁하다가 결국은 일론 머스크가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프 베조스는 이 생명공학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면서 지금은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듣고 있습니다. AI의 출연과 이런 유전공학의 발전이 이제 장기 이식이 아니라 DNA 차원에서 장기 자체를 바꾼다든지, 하여튼 상상도 못 하던 일들이 가능하게 되면서 트랜스 휴머니즘 운동이라는 게 생겨납니다.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저를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해 주셨는데, 국제신학위원회는 교황님 직속으로 신앙교리성과 연결돼서 전 세계 27명의 신학자들이 교황님께 자문하고 교회 문헌을 만드는 임기 5년의 신학위원회입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 신부님과 제가 참석하고 있는데, 2021년에 다시 한번 하라고 하셔서 2026년까지 10대 임기를 맡고 있습니다. 저희가 9대 위원회에서 만들었던 문헌이 바로 시노달리따스에 관한 문헌이고 지금 10대 위원회에서 만드는 주요한 두 가지 문헌 중 첫 번째가 ‘Laudato si: 찬미받으소서’의 후속편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창조론적인 신학 텍스트를 만들어 달라고 교황님께서 메시지를 전해주셔서 저희가 그걸 만들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보편교회가 마주한 가장 큰 위기가 바로 현대의 문화적 도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두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둘 다 트랜스입니다. 하나는 트랜스젠더리즘의 문제입니다. 요즘은 옛날의 ‘동성애’ 이런 걸 많이 넘어서서 동성애 커플을 교황님께서 축복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교리상으로는 절대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사나 전례 안에서는 절대 할 수 없고 다만 예전에 동성애는 우리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 차별하지 않고 사목적 배려를 해야 한다는 그 원칙이 조금 더 발전해서 축복의 형태로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동물 축복도, 자동차 축복도 해주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 축복인 것입니다. 저도, 이 트랜스젠더리즘에 관해서 연구 논문을 하나 썼는데 굉장히 놀랍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동성애 정도의 단순한 것이 아니라 이제 그동안 이야기했던 생물학적 성이 아니고 사회학적인 성, 즉 젠더를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주체적으로 내가 남자가 되고 싶으면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고 싶으면 여자도 되고,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그런 전환 수술이 가능하고 그래서 이런 성 유동성을 트랜스젠더리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 가톨릭교회가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축복이 지금 다 혼란과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그래서 이 트랜스젠더리즘의 문제를 하나 다루고, 또 하나 트랜스 휴머니즘이 있습니다. 예전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휴머니즘을 이야기합니다. 인간 그 이후에 트랜스휴머니즘은 그 포스트휴머니즘을 향해서 가는 과도기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가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는 상태로 트랜스젠더라는 젠더가 구분이 안 되는 범젠더라는 개념처럼 지금 AI의 발전으로 인해서 사실은 AI가 인지 기능뿐만이 아니라 학습하고 감정까지도 이입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고 마인드의 발전 그러면서 이제 우리에게 다리가 잘려진 사람에게 로봇 다리를 부착한다든지 이런 식의 것을 넘어서서 뇌에 연결이 된다든지 하는, 사실 인간인지 기계인지 구분이 안 되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고 이런 것 때문에 이제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호모 사피엔스, 고전적인 개념이잖아요. 이성적인 인간, 생각하는 인간을 말하는데 지금은 그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데우스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데우스는 라틴어로 신을 말합니다. 인간이 곧 신이 되는, 말하자면 진시황제가 꿈꾸었던 불사불멸성(不死不滅性, Immortality)이 어느 정도 과학 기술의 힘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는 단계까지 오게 된 겁니다. 이게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창세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때 뱀이 유혹자로서 말하는 달콤한 게 두 가지죠.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 하느님이 죽는다고 했는데 너희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 말하는 인간 죄악의 원천과 근원이 바로 탐욕과 교만인데 그게 인간의 불사불멸성 문제거든요. 인간이 신처럼 절대 죽지 않는 것을 꿈꾸는 이것이 지금 그렇게 매칭이 되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왜 하느님이 이걸 너희가 먹지 말라고 했느냐 이거를 먹는 순간 너희가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전통적인 신관에서, ‘하느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전선 무소부재(無所不在) 편재(遍在)하시는 분이다.’라고 배웠습니다. 전지(全知) 모든 것을 아신다. 너희가 이것을 먹는 날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곧 신처럼 될 수 있다는 게 유혹의 근원이었는데, 사실 그러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트랜스 휴머니즘은 사실 신학적인 문제가 인간학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과학 기술을 완전히 도외시하면서 살 수도 없고 공존해야 하는데 이 새로운 과학 기술의 시대에 공존하면서 어떻게 인간의 모습을 참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저희가 찬미 받으소서 후속편과 더불어서 인간학적인 도전 문제, 문화적인 도전의 문제를 지금 다루고 있고, 관련 문헌 집필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인간에게 큰 도움이 되겠지만 위험한 측면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천재 물리학자이고 무신론자였지만 죽음 직전에 남긴 말은 우리를 섬뜩하게 합니다. “AI의 발전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세대는 새로운 인종주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AI의 발전이 너무도 빨라져서 결국은 인간을 개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문제는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지는 않고 선택된 인간들에게 적용될 것이며, 따라서 어떤 장기를 개조하고 피를 바꾸고 그런 정도를 넘어서서 DNA 차원의 조작이 이루어지면 이제 새로운 슈퍼 휴먼의 탄생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슈퍼 휴먼들이 일반 사람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인종주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경고한 게 바로 무신론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례 없는 발전을, 특히 챗GPT와 같은 거를 보면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변호사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판례 같은 거 찾을 때 옛날에는 다 뒤져야 했는데 지금은 챗GPT한테 명령어 놓으면 다 찾아 줘서 너무 편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함정이 왜 그런 오류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판례가 하나씩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그냥 갖고 갔다가 정말 낭패가 되는 것이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회칙 3번에서 현대 사조를 따르는 이들의 오류는 인간이 과학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사람들은 과학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희망은 기만입니다. 과학은 더욱 인간다운 세상과 인류를 위하여 큰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 영역 밖에 있는 힘들을 통해 단련되지 않으면, 과학 영역 밖에 있는 힘들에 의해서, 인문학의 문제, 철학의 문제, 신학의 문제가 있는 과학은 인류와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6항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살아가면서 커다란 사랑의 체험을 하는 바로 그때가 자기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구원의 순간이 됩니다. 사랑으로 인간은 구원받는다. 믿음, 희망, 사랑이라고 하는 우리의 삼덕이 결국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사랑으로 구원된 우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다음 희망을 배우는 자리인 고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 고통의 문제는 정말 너무도 고전적이고 전통적이면서도 오늘날 우리를 여전히 고통스럽게 하는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한 벌로서의 고통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성장을 위한 시련으로서의 고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건 무의미한 고통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겪으셨던 십자가의 고통, 대속적인 고통, 타인 때문에 겪는 고통, 하느님이 어린 양으로서 속죄양으로서 겪는 고통을 묵상하는 게 이 사순시기 우리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치유되는 것은 고통을 비켜 피하거나 고통에서 도망침으로써가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통하여 성장하며 무한한 사랑으로 고통받으신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고통의 의미를 찾는 능력을 통해서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에 대한 해석 능력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어떤 성숙함이란 이 고통을 해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찾아온 고통을 한없이 한탄하고 탄식하면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수천 명의 암 환자를 다룬 루도비코 발루치라고 하는 플로리다 대학교 종양학 교수가 죽음의 단계로 접어들 때 암 환자의 고통은 죄의식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고 합니다. 빙산의 일각, 즉 빙산이 떠 있는 부분은 의식이고 그 밑에 정말 어마어마한 것은 무의식인데 타이타닉호가 그 밑에 있는 빙산 거대한 빙산을 피하지 못해서 침몰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무의식을 회피하려고만 한다면 언젠가 타이타닉호처럼 침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을 보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결국 죽음의 선고를 받을 때 이 무의식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암 선고를 받으면 그때 하필이면 왜 내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런 암이 찾아왔는가. 그리고 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가. 그러면서 자기가 잘못했던 모든 잊혀졌던 무의식 속에 있던 망각되었던 모든 상처들, 주고받았던 모든 아픔, 분노 상처 이런 것들이 그냥 일과에 떠오르면서 몸도 아픈데 마음도 아픈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단계에 있는 분들은 영적 돌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유명한 명품인 샤넬 화장품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남겼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죽음의 가장 고통스러운 동반자는 죄의식이다.” 샤넬이 디자이너였었는데, 그 세계도 치열하지 않았을까요? 샤넬도 성공 가도를 달릴 때는 괜찮았는데 딱 죽음의 선고를 받고 난 후 자신이 잘못한 모든 것들이 엄습하면서 고통이 찾아왔을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치유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어떤 고통도 그것을 찾는 해석 능력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죽음에 이르러서 에릭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가 제시한 ‘절망이냐? 자기 통합성(ego integrity)이냐?’ 다시 말해 나에게 주어졌던 모든 불평등함, 잘못된 것들, 타인의 잘못으로 인한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수용하고 해석하면서 통합을 이루고 선종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남 탓하고 탄식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한탄하다가 디스페어(despair) 절망 속에서 죽을 것인가 그렇게 갈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가 있지만 반면에 외상 후 성장도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심리학에서 자기 서사(Self-narrative)를 다시 쓰라고 하는데, 내가 이 고통을 당했지만 나에게 다가온 의미는 무엇이며 이것을 내가 지금 어떻게 대처하고 있고 어떻게 더 성장할 수 있는가를 완전히 기계를 재구성하듯이 컴퓨터를 재조립하듯이 내 삶의 실재를 재조립하면서 고통의 의미를 해석해 나갈 때 이런 자기 서사를 다시 씀으로써 우리는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외상 후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고통에서 의미를 찾는 이 해석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희망을 배우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해주십니다. 여기까지가 전반부로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희망에 관한 좋은 메시지들이 있었습니다.

 

그다음 후반부에서는 종말론적인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연옥이 너무 무섭고 벌 받고 반지옥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준비하는 곳이라는 희망찬 내용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말 교리가 죽음, 심판, 지옥, 천국에 관한 굉장히 희망찬 해석, 다시 말해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 너머의 희망, 그리고 고통을 통한 심판 그러나 그 심판이 우리에게 벌을 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것이며 연옥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치 불 속에서 금이 제련되듯이 우리를 정화하는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희망찬 내용들은 종말 교리의 새로운 해석으로서, 시간 되실 때 한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아름다운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를 함께 묵상할 수 있는 자리를 가질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함께하신 모든 분께 사순시기 주님의 사랑과 은총, 희망이 충만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평화가 넘치는 샘물(전국가톨릭경제인협의회 발행), 2024년 가을호(Vol. 34), 박준양 세례자요한 신부(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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