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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덕체를 겸비한 덕원 신학교의 첫 열매, 하느님의 종 한윤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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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2-12 ㅣ No.1832

[앞서 걸어간 길] 지덕체를 겸비한 덕원 신학교의 첫 열매, ‘하느님의 종’ 한윤승(1911-1949) 신부

 

 

덕원 신학교는 일제 강점기 당시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들이 가장 많은 고등교육기관이었다. 1921년 서울 백동에서 시작하여 1949년 폐교될 때까지 28년간 독일에서 온 차부제 4명까지 포함해서 약 10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덕원 신학교 출신 사제 가운데 11명이 공산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연길교구 한윤승 필립보 신부는 덕원 신학교 첫 입학생이며, 동료 1명과 첫 사제품을 받은 덕원 신학교의 맏배이다. 한 신부는 6·25 때 3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연길교구 첫 번째 한국인 신부

 

한윤승 신부의 아버지 한홍순은 간도에서 옹기를 구우며 생계를 꾸렸다. 한 신부는 1911년 만주 용정에서 약 24km 떨어진 시루애 마을에서 태어났다. 두 아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사제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11세 되던 해인 1921년 서울 백동의 베네딕도회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덕원 신학교로 학업을 이어갔다. 1936년 6월 7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성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해 신학교를 설립한 이래 14년 6개월 만에 배출한 첫 사제, 첫 연기였다.

 

한 신부의 사제 서품식에서 5명의 후배가 송별사를 하였다. “개선가를 부르는 그 날 형님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천지에서 피를 흘리시오. 우리는 그 뒤를 따르리다”라며 복음을 선포하려 세상을 향해 떠나는 사제들을 환송하였다. 신학생들은 ‘빛의 전달자’란 연극도 하였다. 세상은 암흑 속에 있고, 세상의 왕이 가난한 이들을 지배하고, 많은 이들이 우상을 숭배한다. 그러나 이 불안한 세상에도 진리와 빚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오늘 탄생한 두 명의 새 사제가 이 길을 인도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덕원의 신학생들은 ‘선교사로 현장에 나가는 사명’을 투철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한윤승 신부의 생이 이 말 그대로 실현되었다.

 

한 신부는 성체 성혈 대축일에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덕원 수도원은 소박한 잔치를 베풀었다. 새 사제는 한동안 덕원 수도원에서 머물며 수도생활의 고요와 수도자들과의 우정을 마음에 담았다.

 

이후 한 신부는 연길교구 목단강본당 보좌로 임명되었다. 재임하는 동안 1938년 이를 대홍수와 러일전쟁을 겪었다. 그는 빼어난 사목자 기질을 발휘해 갖은 난관을 극복하였다. 1939년 용정 상시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연길교구에서 첫 한국인 본당 주임사제였다.

 

 

지덕체를 갖춘 한윤승 신부

 

덕원 신학교는 지덕체의 완벽한 조화를 요구하는 교육을 구현하였다. 한윤승은 신학생 시절 내내 운동. 특히 테니스와 축구를 좋아하였다. 또한, 음악도 좋아해 바이올린 연주 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고향 용정 사람들은 그가 방학 때마다 바이올린을 가져와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독일어 공부에도 몰두하였다. 독일어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상당히 세계적인 지식을 쌓았던 것 같다. 그는 학창 시절 학생 잡지 『신우』에 ‘맹목적 자유사상을 파기하라’(창간호), ‘그리스도의 천주성과 그의 영적(靈蹟)’(3호),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진상’(4호)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11살부터 신학교에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던 그는 22살 청년이 되어, ‘맹목적 자유사상을 파기하라’라는 글로 남과 다른 자신의 생활에 대한 가치를 문답식으로 설득한다. 신자유 사상이 몰려와 신구(新舊) 양 사상의 충돌이 일어나면, 청년의 본성은 옛것을 배척하고 새것을 쫓는다. 동시에 감정이 앞서는 청춘인 만큼 진리인 구(舊)도 타파하며 허위인 신(新)도 맹목적으로 따른다. 그러나 인생은 예나 이제나 진리를 따라야 하며, 진리 자체는 옛것과 새것이 없는 그 무엇이라고 전제한다. 그는 청년들이 함몰되는 자유사상에 대해 차근히 살피고, 결국 자유란 양심에 따라 양심법에서 우러난 참[眞] 자유여야 함을 산골 한 귀퉁이에서 성장한 젊은이의 내면에서 나오는 말로 차근히 설파한다. “참자유란 ‘마음대로 함이요.’ 즉 자기 마음의 법칙을 닮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적극적 자유를 행할 때에는 그 지배와 규율 중에도 자유가 엄연히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천주성과 그의 영적(靈蹟)’은 그가 24살에 쓴 글이다. 한윤승은 그리스도 가르침의 가장 기본인 네 복음서를 확신하고, 마음에 품도록 철저한 분석을 시행하였다. 1. 네 복음서의 사적 권위, 2. 천주성에 대한 그리스도 자신의 선언, 3. 기적의 가능성과 증명 가치와 그리스도의 기적으로 나누어 다루었다. 우선 복음서의 진위(眞僞) 파악을 위한 내적, 외적 사료를 비판하였다. 이어 그는 네 복음서 속에 드러나는 31번의 기적들을 믿을 수 있는지 일일이 검토하였다. 특히 기적 중에 가장 위대한 기적인 예수님의 부활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어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왔는가, 하느님 자신인가’라고 물으며 그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모든 기적이 하느님께서 시켜서 한 것인지, 하느님이 직접 한 것인지를 따져 물었다. 그 질문이 상당히 체계적이며 분석해 들어가는 방법도 흥미롭다. 한국 교회 초기 신자들이 교리를 설명하거나 대답을 제시할 때 감동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사회 현상 안에서 예시를 제시해서 그 생각하는 과정이 우리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인 것처럼 그의 글도 그렇다. 상당히 긴 글인데, 네 복음서의 진의를 마음에 새기게 한다. 한편, 이미 90년 전에 이미 오늘날 실시하는 사료 비판과 같은 방법을 적용하고 있음이 놀랍다.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진상’에서 한윤승은 개신교가 가톨릭교회보다 100년 늦게 한국에 들어왔는데도 단기간에 놀랄 만한 전교 성과를 내었음에 주목하였다. 개신교는 운 좋게 가톨릭이 100년 동안 이 땅에서 박해를 견디며 기진맥진해 있는 상황에서 들어와 루터의 종교개혁을 선전함으로써 전교의 한 방책을 삼았다고 보았다. 그들의 노력으로 종교개혁 사실은 역사 교과서에까지 게재되었고, 서양 역사에 상식조차 없던 조선인들은 ‘믿으면 신교를 믿자’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그는 루터가 그리스도교를 진정하게 개혁하였나를 강구해 보아야 한다고 전제했다. 그는 이그나츠 폰 될링거(Ignaz von Dollinger(1799-1890)의 글 등 상당히 많은 서적을 읽고 이를 차분히 설명하여 오늘날에도 함께 되새길 점이 많은 글을 남겼다. 한편, 그가 이미 90년 전에 종교개혁 때 나오는 ‘면죄부’라는 단어는 잘못된 번역이라며 이는 죄를 고하고 보속의 한 방법으로 재물을 희사하는 것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아직도 면죄부라는 잘못된 용어가 흔히 사용되고 있음이 안타깝다.

 

 

평양교구와 황해도 감목대리구 활동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당시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는 부족한 사제를 충당하기 위해 각 교구에 사제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때 한윤승 신부도 연길교구에서 평양교구로 파견되었는데, 평양교구 요청도 있었지만, 만주 지역의 정치 상황 변화로 임시로 사목지를 옮겼을 가능성도 있다. 한 신부는 1943년 6월 영유본당 제1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영유본당 신자들은 가톨릭운동에 적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모범적인 표양을 보였다.

 

 

 

한 신부는 1945년 광복과 함께 진남포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아 1948년까지 사목하였다. 진남포본당 신자 수는 3,000명이었고, 판공성사를 보는 신자수가 800명쯤 되었다. 한 신부가 부임할 당시 본당에서 운영하던 소아병원이 문을 닫았고, 본당과 병원에서 소임을 맡았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도 서울 본원으로 돌아갔다. 대신 1946년부터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수녀들이 진출해 신심 단체와 양로원 사업을 도왔다.

 

한 신부는 교회 육영사업을 부활시키고자 중학교를 신설하였다. 그러나 이미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종교 탄압의 실마리를 찾고, 종교교육이 자신들의 정책에 위반된다며 교육과정 개편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학생들의 모든 행사를 주일에 강행하여 미사 등 교회 활동을 방해하였다.

 

한 신부는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장래에 들이닥칠 교회의 수난과 목자 없는 교회 유지 및 운영에 대비하였다. 믿을만한 평신도 지도자들을 모아 교회 운영을 위한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교회 활동의 주축이 될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교회에 대한 당국의 박해가 심해지고, 월남하는 신자가 늘어났다. 신부는 평신도들에게 위급 시 대세를 베푸는 양식을 가르쳤다. 1948년 연길교구 소속 신부들이 평양교구를 떠날 때 한윤승 신부는 황해도 해주본당으로 이임하였다.

 

 

끝까지 목자로 순교하다

 

해주본당은 1912년 빌렘 신부에 의해 세워졌고, 제10대 한윤승 신부 체포 후 폐쇄되었다. 한 신부의 전임인 김철규 신부는 공산주의자들의 포섭 공작을 피해 월남하려다가 체포되어 해주 형무소에 갇혔는데, 42일만에 거짓으로 약속하고 석방된 후 선을 넘었다. 해주본당 회장은 공산당의 신자 명단 제출 명령을 피해 월남하였고, 본당의 많은 청장년이 남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주로 부녀자들만이 성당에 나왔다. 한 신부는 주임 자리가 1년여 공석이던 이 성당에 부임한 것이다.

 

38선이 가까운 해주는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월남하는 신자들의 아지트였다. 해주까지만 무사히 도착하여 성당을 찾아가면 어떻게든지 남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당시 월남을 희망하던 북한 신자들의 통념이었다.

 

이미 진남포성당에서부터 성직자 없이 신자들만 남을 날에 대비하였던 한 신부는 이곳에서 월남을 시도하는 신자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안내인을 붙여 38선을 넘게 하였다. 해주 곡산 신천본당의 구천우 신부도 1949년 2월 한 신부의 도움으로 무사히 월남하여 나중에 이를 신문에 기고한 바 있다. 구천우 신부가 ‘붉은 선전물(반공 전단지)’을 작성한 혐의를 받고 신천 내무서에서 취조받던 중 탈출하여 어머니 대녀가 사는 산동공소로 몸을 숨겼다. 구 신부는 그곳에서 한윤승 신부에게 38선 월남 안내인을 찾는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한 신부는 안내할 사람을 소개하고 자전거를 한 대 보내주었다.

 

해주 시내의 붉은 선전물이 살포되어 시 보안 당국이 범인 색출에 혈안이 되었을 때, 그렇지 않아도 의심을 받던 한 신부는 더욱 감십다게 되었다. 신자들이 신부에게 남한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신자들이 있는 한 절대 월남하지 않겠다고 고집하였다. 그러면서도 한 신부는 여회장 박정의와 식복사 안나의 도움을 받아 성작, 성합, 제의, 포도주와 전임 신부가 월남하면서 남기고 간 의복류, 서류를 큰 김칫독 3개에 넣어 밀봉하여 사제관 지하실 나뭇광에 땅을 파서 묻었다. 이는 6.25전쟁 때 연합군과 함께 북진한 군종 신부가 발견했다.

 

정치보위부는 해주본당에서 등사기를 발견하고는 본당 신부가 조직적으로 일을 꾸몄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한 신부는 1949년 5월 20일에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여회장 박정의가 식복사의 연락을 받고 뛰어갔을 때 한 신부는 두 사람에게 연행되고 있었다. 사제관에서 기르던 개가 짖으며 따라갔는데도 한 신부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며칠 후인 성령 강림 대축일에도 한 신부가 풀려나지 않자 30여 명이 신부가 구속된 정치보위부로 가서 ‘신부 석방’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박정의는 한 신부가 체포된 뒤부터 20일간 매일 정치보위부로 소환되어 심문받았다. 마지막 날 박정의는 새벽 3시경, 2층 창밖으로 지프차에 실려 오는 한 신부를 목격하였다. 해주교화소에 갇혀 있던 한 신부가 정치보위부로 심문받기 위해 오던 길이었는데, 한복을 입고 삭발하였으며, 얼굴은 창백하였다.

 

해주시 정치보위부는 이 사건을 일으킨 배후 조직이 남한의 어느 정치 세력이 조직한 반공 지하 단체이며, 한 신부가 그 책임자라고 하였다. 당시 해주시에 남한의 서북청년단 계열의 지하조직 단원들이 꽤 많았다고 하지만, 한 신부가 책임자라는 주장은 공산주의자의 계략이었다. 한 신부는 해주시 인민재판소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체포된 지 얼마 안 되어 해주 인근 바닷가 모래톱에 생매장되었다고도 하고, 6·25전쟁 때 연합군이 북진할 무렵 신의주로 끌려가다가 ‘죽음의 행진’ 중에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한윤승 신부는 자신의 장래를 예측하였고 이를 대비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배들의 바람처럼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그가 태어난 연길교구 그가 공부한 덕원자치수도원구, 그가 사목을 도우러 갔던 평양교구가 모두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다. 그가 순교한 해주본당은 황해도 감목대리구에 속하였다가 1942년 그가 사목하기에 앞서 폐지되어 서울교구에 속하였지만 역시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보관되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그가 남긴 3편의 글은 더욱 주옥(珠玉)같다.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4년 봄(Vol. 65), 김정숙 소화 데레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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