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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하느님의 종 김치호의 덕원 신학교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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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걸어간 길] 하느님의 종 김치호의 덕원 신학교 생활
덕원 신학생들의 자부심과 소명 의식
함경선을 타고 덕원 평야를 지나 함경선 중 제일 작다는 덕원 정거장에서 내리면 북쪽 산 중턱에 보이는 2층 양옥의 화려하고 큰 건물이 덕원 신학교였다(1937년 화재 이후 3층 건물이 되었다). 이 학교는 1921년 서울 혜화동 백동 수도원에서 소년 14명으로 시작한 소신학교를 모태로 한다. 수도원 이전과 함께 덕원으로 옮겨와 1927년 12월 1일에 낙성식 겸 개교식을 거행했다.
집에서 부모가 생각날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어머님을 위로로 삼으라는 당부를 듣고 신학교에 들어온 신학생들의 일과는 오늘날 신학교와 거의 같다. 그렇지만 그들은 학교 공동생활의 즐거움과 규칙, 사제가 되려는 이유와 어떻게 사제 성소를 찾았는지, 그리고 독신생활 등을 타인들에게 설명하고 동시에 본인들에게도 다짐해야 하는 주제들에 몰두하였다. 덕원 신학생들은 사제생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덕원 신학교 출신 허창덕 치릴로(1919-1992) 신부는 인간 생활의 특질이 사회라고 한다면, 이 사회에 공헌이 있는 자는 인간의 특징을 더욱 발휘한 것이라고 했다. 또 공헌이 위대하면 이것을 위한 노력도 그만큼 위대할 것이며, 노력이 위대하다 함은 그것을 위한 생활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사제만이 홀로 사회적, 정신 문화적 공헌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사제가 남보다 더 어려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리고 사제생활이 사회의 정신문화에 대하여 큰 공헌을 한다면 신학교생활도 또한 같은 공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하느님의 종 신윤철 베드로(1906-1950) 신부는 성직생활의 가치를 이렇게 정의했다. 개인, 단체, 국가, 사회생활의 목적은 행복이지만, 생활 가치의 고저는 행복의 범주와 기한에 달렸다. 가정의 행복 범주보다 국가의 행복 범주가 더 넓고, 국가의 행복 범주보다 사회(전 세계)의 범주가 더 넓다. 따라서 행복의 가치도 이처럼 차례로 높아진다. 며칠의 행복 가치보다 한 해의 행복 가치가 크고, 유한한 행복의 가치보다 무한한 행복의 가치가 몇 배로 더 높다. 그런데 신학교생활은 민족을 초월하고 지방을 초월한 전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하고, 유한한 행복이 아니고 무한한 행복을 위한 생활이라는 게 신 신부의 의견이었다.
덕원 신학생들은 시대적 소명에 대해서도 무척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교황사절이 신학교를 방문해 ‘동양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한 부탁을 새기면서, 성덕과 지식의 양면이 다 갖추어져야 할 뿐 아니라 신앙 선조들보다 훨씬 더 밝은 빛과 짠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조선 교회 선각자들은 눈에 보이는 박해 속에서 선혈(鮮血)로서 조선을 비추고 삼천리강산을 절여 ‘세계의 빛과 소금’이 되었는데, 자신들은 가시적 박해보다 훨씬 심한 보이지 않는 박해인 진리 배척의 ‘허무한 사상’에 빠진 사회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의 종 안셀모 로머(1885-1951) 교장 신부도 당대 시기를 매우 다른 ‘신인류의 시대’로 느끼라고 강조했다. 교장 신부는 사람은 항상 어떤 일정한 시대에 사는데, 당대는 타국에 있는 사람과의 교제가 더 쉬워졌고, 세계 경제를 포함한 여러 국가와 민족의 상호 연대가 강해졌다고 판단했다. 독일에서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미 덕원 수도원 사정은 어려워졌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그 영향이 더욱 크게 미치던 곳이 신학교였다.
제화공으로 시작한 팔방미인 신학생 김치호
김치호는 1926년 12세에 루드비히 피셔 수사의 제화공 도제로 서울 백동 수도원에 정착했다. 그는 유능한 사제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보였다. 그의 총명함과 사제 성소에 대한 뜨거운 원의가 받아들여져 1927년부터 덕원에서 신학교 예비반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29년부터 중등과정(초급반 5년, 고급반 2년)으로 진학했고, 1936년 말에는 2년간의 철학 과정을 시작하여 1938년 봄에 마쳤다.
덕원 신학교에서는 1928년 학우회 발족 이후 여러 동아리가 조직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학우회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다 하느님께 받은 것이므로 제대로 보존하고 성장시켜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스포츠 생활이 중요함을 강조한 운동부, 문맹률이 거의 80%인 한국에서 글보다는 웅변으로 선교해야 한다며 토론회, 강연, 웅변대회 등을 개최하는 웅변부, 도서관 설립과 도서 수집 및 독서에 앞장섰던 도서부, 그리고 학생들의 글재주를 향상하고 보급하며 교지 발간을 담당했던 편집부와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행사를 빛냈던 음악부 등이 있었다.
수도자로서 첫걸음
철학 과정을 마친 김치호는 1938년 4월 9일에 수도원에 받아들여졌다. 그는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30여 년 만에, 덕원 수도원의 첫 성직 지망 수사 수련자로 선발되어 사부 베네딕도 성인의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고 법정 수련을 시작했다.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그가 베네딕도회가 동양에서 확고히 자리 잡는 데 이바지하리라고 기대했다.
김치호는 수도생활과 베네딕도회 선교사의 사명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교지의 「수도원에 들어와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의 생애 20여 년에 첫영성체 날과 수도원 입회 날이 가장 기쁜 날이었다며, 거친 들판의 보잘것없는 패랭이꽃이 주님의 꽃동산으로 옮겨져 주님께서 직접 가꾸어주시게 되었다고 했다.
김치호는 수도생활은 웃음의 생활이며, 수도자는 늘 웃음을 얼굴에 띠고 다녀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요구되는 어려운 희생과 절대적 순명은 사랑받는 이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며, 그것은 주의 멍에와 주의 짐에서 나오므로 오히려 사랑 앞에서 모든 고통이 즐거움으로 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극기라는 말에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는데, 이 극기를 능히 감당해 나갈만한 성총을 받으며 또한 이에 상응하는 큰 위로를 받게 된다고 했다. 한편으로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도생활 중에서 마주하게 되는 단점들을 극복해야 하는데, 이때 “원경(遠景)은 근경(近景)보다 아름답다”라는 비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달은 먼 데서 바라보면 아름다우나 가까이 가서 보면 곰보이다. 그러나 내경(內景)을 아는 자는 그 안에서 모든 선함과 아름다움을 갖추신 조물주의 얼굴을 찾아보는 참된 ‘시인 · 과학자’이다. 시인은 아름다운 색을 보고, 과학은 현미경으로 세포를 본다. 이 둘이 합하여 세포에 뚜렷이 새겨있는 ‘경이(驚異)’를 보게 된다. 수도원 생활의 관찰법에서 이를 적용해야 한다. 수도원 생활 자체의 묘미는 수도원 제일 심오한 한구석에서 샘물과 같이 솟고 있다. 즉, 수도원의 서원은 세속의 세 가지 욕구인 물욕, 육욕, 명예욕을 끊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사랑할 것을 언약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늑방(肋傍)을 열어, 달고 단 그 샘물을 흘려주신다. 또 하나, 수도원에서는 좀 더 내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내면적 생활의 극치는 천주 성총의 작용으로써 이루어지며, 초자연적 내면생활은 천주와 합치하는 생활이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천주를 사랑하는 동기에서 할수록 내면생활이 깊어진다. 수도복과 수도규칙 자체가 수도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수도원은 모든 영적 생활의 필요물이 구비된 공장인 만큼 마음만 잘 먹으면 천주와 더 합치하는 생활, 곧 초자연적 내면생활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아울러 김치호는 오틸리엔 연합회의 첫째 목적은 수도생활을 통한 자기 완성이고, 둘째 목적은 주님을 모르는 지방에 대한 선교사업임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인식했다.
선교사업으로는 직접 외교인들에게 나가서 전교하거나 혹은 교육사업, 출판사업, 자선사업 등을 할 수 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이 본토인 선교사 양성이다. 그리고 선교사 양성이나 교육사업이나 출판사업 등은 여러 사람의 협치를 필요로 하는 만큼 수도원이 적당하다. 그리고 관상생활과 활동 생활을 겸한 베네딕도회는 관상적 생활로서 천주께 성충을 받아 활동적 생활로써 전교한다. 그러므로 수도원이 어떤 지방에 새로 건설되는 것은 그 지방에 천주의 강복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사람은 이 수도원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덕원 수도원의 ‘황태자’ 김치호
덕원 수도원 본관에서 200m쯤 떨어진 신학교에서 이런 다짐을 하며 생활하는 김치호는 한국인 첫 수도회 사제 탄생을 예고했고, 나아가 언젠가는 그와 그의 뒤를 이을 한국인 사제들이 유럽인 신부들과 동등한 권리로 수도회 운명을 결정하리라는 희망을 품게 했다.
덕원의 독일인 수도자들은 김치호를 ‘수도원의 황태자’로 부르며 특별히 대우했다. 신부들은 수도원 식당과 회의실에서 평수사들 둘레의 돋은 자리에 앉았다. 이것은 종신서원 후에나 이뤄지는 승급이었다. 하지만 김치호는 예외였다. 덕원 수도자들은 그를 수련자 시절부터 돋은 자리에 앉혔다. 독일인 차부제들은 김치호 성직 지망 수사와 나이가 비슷했으나, 고향 수도원에서 서둘러 종신서원까지 했기에 ‘온전한 수도승’으로 여겨졌다. 그런 그들에게는 덕원 식구들이 김치호를 대우하는 방식이 의아했지만 김치호는 이 독일 동료들의 호감도 얻어냈다.
덕원 수도원의 첫 한국인 수도사제 순교자
김치호 신부는 공산당 정권이 집권한 후인 1949년 5월 10일 밤 북한의 공산당 정치보위부원들이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쳐 모든 독일인 선교사와 한국인 성직자들을 체포할 때 함께 ‘평양인민교화소’로 압송됐다. 1950년 10월 5일 북한 인민군이 평양인민교화소를 말끔히 비우고 북쪽으로 후퇴할 때, 그는 폐병으로 각혈이 심한 상태였다. 인민군은 그를 다른 독일인 수도자들과 함께 후송하지 않고 각목으로 때려죽였다고 전해진다.
12년을 수도원 주위에 머무르다 입회했지만, 그의 벅찬 수도생활의 기쁨은 12년 만에 끝났다. 김치호를 둘러싼 덕원 신학교 청소년들의 각오와 그들이 노래한 수도생활의 진미는 싱그러운 ‘떨림’으로 남았다. 한국 교회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순교했다. 한국 땅 최초의 베네딕도회 성직수사도 순교했다. 그리고 그들이 열어놓은 희망은 이 땅에 찬란히 꽃피고 있다.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3년 겨울(Vol. 64), 김정숙 소화 데레사 교수] 0 1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