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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남북의 가교, 하느님의 종 이춘근 수사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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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2-12 ㅣ No.1830

[앞서 걸어간 길] 남북의 가교, ‘하느님의 종’ 이춘근 수사신부

 

 

 

 

순교자, 하느님의 종, 복자, 성인들은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지난 5월, 양주성지에서 순교자들에 대해 발표를 하다가 이춘근 라우렌시오(1915-1950) 신부의 5촌 조카인 이정훈 신부를 만났다. 갑자기 라우렌시오 신부가 나타난 것 같았다. 이춘근 신부의 여동생이 칠울로 시집가서 낳은 자녀가 김충수 신부, 김영희 수녀, 김충연 수녀라고 한다. 이 댁은 성소가 많이 나온 칠을 공소(현 갈곡리본당)의 기둥을 이루는 집안 중 하나이다.

 

칠울은 이춘근 신부의 고향인 경기도 고양시 신암리본당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이다. 여기에서 이춘근 신부와 한 살 위 또래인 하느님의 종 김치호 베네딕도(1914-1950) 신부가 태어났다. 두 6·25 순교자는 어려서는 개성, 신안리, 덕정리본당 등 같은 본당신부의 지도를 받았다. 두 사람은 베네딕도회에 입회하는 과정은 달랐지만, 같은 수도 정신을 실천하며 덕원 수도원의 한국인 성직수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했다. 김치호 신부는 덕원 수도원 최초의 성직수사로서 베네딕도회 동양 진출의 첫 지역인 한국에서 거둔 첫 열매이다. 이춘근 신부는 사제품은 서울교구에서 받았지만, 수도원에 입회하여 덕원 수도원의 행정처리를 마지막으로 담당했다. 즉, 김치호 신부는 덕원 수도원의 첫 열매이고 이춘근 신부는 덕원 수도원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한 신부이다. 이춘근 신부는 덕원 수도원뿐 아니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원산 수녀원 등 북한의 세 수도원의 마지막 단계도 함께했다.

 

이춘근은 1915년 3월 8일 신암리공소에서 이공명 바오로와 홍 베로니카 슬하의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이춘근은 신암리에서 보통학교 4년 과정을 마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했다. 신심이 깊고 말수가 적으며 섬세했던 그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극복했다. 그는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통을 참아서 이기셨는데 이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견뎠다. 한번은 그가 열한 살일 때 모자에 곡식 낟알을 가득 모아왔기에 모친이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들은 천주께서 주신 곡식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왜 밟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가족은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자 매일 묵주기도와 성체조배를 잊지 않았다. 무릎이 성치 않던 조부는 문고리를 잡고 손자를 위해 기도했다. 이춘근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를 특히 공경했다.

 

이춘근은 1939년 3월 부제품을 받고 6월 24일 명동성당에서 원형근 라리보(Larribeau)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이 신부는 황해도 사리원본당 김명제 신부 밑에서 1939년부터 1940년 7월까지, 그 뒤 경기도 장호원(現 감곡)본당에서 1년간 보좌신부로 있었다. 이 신부는 활동적으로 사용했지만, 수도 영성에 매진하고 싶었다. 결국 사제 수품 2년 뒤인 1941년 주교의 추천을 받아 덕원 수도원에 입회했다. 라우렌시오라는 수도명으로 법정 수련을 마친 후, 1942년 7월 26일에 첫서원을 했다. 그 직후 동생 이근재 부르노(1925-2006)도 수도원에 입회했다. 싱글거리며 청소하는 형에게 동생이 즐겁냐고 묻자, 이 신부는 “일처럼 성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남·북한 사이의 교회 소식을 전하다

 

이춘근 신부는 1945년 8월 15일 종신서원을 하고 덕원 신학교 사감 겸 교수신부로 일했다. 이 무렵 이 신부는 성대에 문제가 생겨 1946년 7월부터 1947년 봄까지 치료를 위해 서울 명동 주교관에 머문다. 이를 계기로 그는 남·북한 사이의 교회 소식을 전했다. 해방되고 북한에서 박해가 시작될 무렵 『경향잡지』는 연길교구의 사정을 알리며 모금을 했지만, 당시 북한 상황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 신부는 ‘땟거리조차 없는’ 덕원 수도원의 상황을 자세히 전했다. 그는 미사 지향, 의약품, 의복이 필요하다며 서울의 메리놀회 신부들을 통해 전달받게 해 달라고 했다. 또 덕원 수도원에서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사망하거나 피살된 이들의 소식도 전했다.

 

이 신부는 북한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1947년 다시 38선을 넘어 덕원으로 돌아갔다. 왜 돌아왔느냐는 물음에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것뿐이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교구에 가해지는 박해에 대해 그가 덕원에서 서울의 노기남 주교에게 보낸 엽서 크기의 양면 괘지에 깨알처럼 박아 적어 보낸 글이 남아있다. 덕원 수도원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선교사들은 먹고살려고 고군분투했다. 일부는 농사를 짓거나 다른 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준본당이었던 성진 성당 주임이었던 이춘근 신부는 농지도 없고, 신자도 별로 없어 독립하기 힘들었다.

 

 

주님께서 이춘근 신부를 ‘평양에 보존’해 두시고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뒤 미국 메리놀회 신부들이 전부 추방되어 평양교구의 사제가 부족해지자 덕원 수도원은 평양교구에 젊은 신부들을 파견한다. 1948년 이 신부도 서포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로 파견됐다. 평양에서 기차로 한 정거장 거리인 서포는 메리놀회 한국지부와 교구청이 있었다. 메리놀회가 나가면서 교구청 건물은 성모 수녀회 본원이 되었기 때문에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가 서포본당 사목까지 겸했다.

 

이 신부는 성대결절에도 불구하고 강론하고 피정을 지도했다. 이 신부가 평양교구에 온 지 7개월 후인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이 폐쇄됐고, 수도자들은 체포되어 평양인민교화소로 압송됐다. 사홀 뒤에는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가 행방불명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평양 시내 신부들은 차례로 체포되고, 관후리 주교좌대성당을 비롯한 성당들이 공산주의자들 손아귀에 들어갔다. 평양 교우들은 주일과 대축일에는 신부가 남아있는 사리원, 서포, 진남포 등지로 수백 명씩 몰려갔다. 이춘근 신부는 자연히 평양교구의 신자들을 마지막으로 돌보게 되었다.

 

한편, 성모 수녀원 사정도 점점 어려워졌다. 수녀회에서는 주교가 행방불명된 뒤, 종신서원 예정자들이 서포본원에서 하던 피정을 중지하고 각기 본당으로 돌아가게 했다. 성직자들이 계속 체포되자 분원에 있는 수녀들에게 각 본당신부에게 서원을 갱신하도록 하고, 종신서원 준비자들 9명은 1년간 서원을 갱신했다. 이 신부는 이 업무를 수행했다.

 

 

 

평양 시내 신자들이 수녀원으로 미사에 참여하러 오자 북한군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매일 걱정스러운 일이 생겼다. 신부를 체포하러 올 것이라는 전갈에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최후의 영성체를 생각하며 성체를 모시는 일이 반복되었다. 느닷없이 숙박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 와중에 본당신부가 잡혀간 곳에 연금되어 있는 수녀들이 평복으로 빠져나와 서포본원에서 미사를 하고 가기도 했다.

 

결국 공산당은 1949년 12월 29일 교구청 건물과 수녀원 건물을 몰수했다. 성모 수녀회는 해산을 준비했다. 1950년 5월 12일 미사 후에 1년간 서원 갱신했던 종신서원 준비자들에게 3년간 서원 갱신을 했다. 다음날 수녀들은 이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보았다. 장정온 악네타 원장수녀는 본원에 모인 수녀들에게 공산 치하에서 더는 수도 생활을 계속할 수 없어 부득이 해산한다고 선언했다. 5월 14일, 수녀들은 마지막 미사를 드리고, 미사 후 제대포를 벗기고 제대를 뜯었다. 원장수녀는 서원 기간이 만료되면 가까이 있는 자매들 앞에서 서로 갱신하고 서명해 주라고 당부했다. 이 신부는 순안공소로 옮겼고, 서포본당은 폐쇄되었다. 서포본당 신자들은 이춘근 신부가 순안공소에서 체포될 때까지 공소 미사에 참여했다. 이 신부는 “밥 먹는 시간이 아깝다”며 끼니마저 거르고 아픈 성대로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덕원 수도원의 마지막 행정 책임자

 

이춘근 신부는 덕원 식구들의 마지막 시간도 함께하며 그들을 지도했다. 수도원의 다른 성직자들이 모두 체포되고 오직 그만이 남아있었다. 베네딕도회로서는 신부 한 명을 미리 평양에 피신시켜 놓은 것 같았다. 1919년 5월 17일 풀려난 한국인 수녀들은 시골의 가족에게 갔는데, 평양 근방으로 간 이들이 많았다. 이춘근 신부와 김 데레사 수녀의 오빠인 김필현 신부, 임준성 수녀의 조카인 이재호 신부 등이 이들을 도왔다. 그러나 두 평양 신부들은 곧 체포되었다.

 

원산 수녀원의 부원장 박정덕 수녀는 시골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갔다가, 다른 수녀들과 좀 더 가까이 있기 위해, 평양에 작은 방 하나를 빌렸다. 박정덕 수녀는 이 신부와 꾸준히 연락했고, 7월 11일 베네딕도 축일에는 이춘근 신부 앞에서 유기 서원만 한 수녀들이 공동으로 서원 갱신을 했다. 1950년 2월 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축일에는 부원장 수녀가 마련해준 옷감으로 ‘흰 치마저고리’를 해 입은 서원 수녀들이 서포에 모였다. 3월 21일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에도 모였다. 수녀들은 개별적으로도 이 신부에게 성사 보러 다녔다. 이 신부는 수녀들이 평양에 자리 잡도록 인홍리 임시집합소를 마련해 주었다.

 

이춘근 신부는 구금된 성직자 · 수도자들의 행방을 파악하고 그들을 돕는 일도 수행했다. 덕원 수도원에 폐쇄된 후 김영근 성직지망수사와 임근삼 수사는 평양감호소에 갇힌 형제들을 살피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 1949년 5월 16일 임근삼 수사가 이춘근 신부를 찾아왔다. 이틀 전에는 한천수 수사와 김삼도 수사가 평양에 도착했다. 김필현 부감목 신부가 친절히 맞아주었으나, 그들은 바로 이춘근 신부를 찾아가 덕원의 근황을 전했다. 임 수사가 수녀원에 도착하던 날, 마침 수녀원에서는 공산당들이 습격하리라는 전갈을 받고 문제가 될만한 물건들을 불 태우고 있었다. 밤 9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성당에 모여 이 신부가 고별강론을 하고 성체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이때 안뜰로 향한 제의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신부는 문을 여는 대신, 서둘러 성체를 분배한 뒤 루눌라의 성체를 꺼내 본인이 영하고 수녀들에게 마지막으로 강복했다. 문을 두드리던 임 수사는 여관에서 자고 아침에서야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수녀원은 너무 가난했고 처지가 절망적이어서 그곳에서 묵을 수는 없었다.

 

평양교구 신자들은 주교와 성직자들의 행방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평양인민교화소 의무관으로 일하던 노재경과 이기영을 통해 수도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필요한 물품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교회 연락 대표는 임근삼 수사였다. 임 수사는 두 연락원과 매주 만나 소식을 듣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이춘근 신부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임 수사 일행은 백응만 신부, 신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 덕원 신학교의 킬링자이스 신부의 유해를 찾아 이장하기도 했다.

 

평양감화소에 갇혀있던 루치오 로트 원장 신부가 수사들에게 보낸 쪽지들이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문서고에 남아있다. 옥중 동료들과 직접 연락은 1950년 3월부터 시작된 것 같다. 이후 원장신부는 동료들에 대한 정보, 옥에 들어온 평양교구 사제나 신자들의 근황도 알리고, 필요한 물품도 쪽지에 적어 보내곤 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상단에 ‘전권 위임’이라고 명기된 6월 16일 자 쪽지다. 루치오 원장신부는 1950년 2월 7일 신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의 선종 이후 교회법상으로 덕원의 장상이었다. 원장신부는 이 자격으로 덕원 수도자 중 유일하게 아직 체포되지 않은 이춘근 신부에게 1950년 6월 16일, 선교회와 수도원에 관련된 전권을 위임하는 동시에, 아직 체포되지 않은 한국인 수사들의 서원 연장을 허락하는 권한을 위임했다. 이 라틴어 쪽지는 공식 위임 문서다.

 

이춘근 신부가 위임장의 권한을 실행할 수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보통 편지를 주고받는 기간이 열흘쯤 걸리는데, 이 신부는 이 날짜에서 열흘이 지나지 않은 때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 신부는 이미 덕원 수도원의 마지막 신부로서 행정처리를 하고 있었다. 신학교가 해체되자마자 월남하여 서울 신학교에서 공부를 이어가고 있던 성직지망수사 5명이 유학 절차를 밟을 때였다. 김상진 성직지망수사는 규율을 지키지 않는 등의 이유로 유학을 떠나는 데 문제가 있었다. 서울 신학교에서는 평양의 이춘근 신부에게 가부를 물었고, 이 신부는 그의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장신부의 전권 위임은 이춘근 신부가 이미 어려움 속에서 행해온 덕원 수도원의 행정처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쪽지가 되었다고 해야 옳겠다.

 

 

공산 치하에서 순교를 택하다

 

이춘근 신부는 6월 25일 순안에서 체포되었다. 인흥리 임시집합소에서 생활하던 오영길 수녀는 1950년 6월 24일, 다음날 주일미사를 위해 순안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 피신해 있던 박민숙 수녀가 감시가 심하니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하여 되돌아섰다. 한편, 6월 25일 임근삼 수사가 이춘근 신부에게 갔을 때, 그는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연행되기 직전에 임 수사에게 큰길로 가지 말고 샛길로 가서 평양에서 피신하라고 당부했다. 이춘근 신부는 1950년 10월 5일 북한군이 북으로 후퇴할 때 평양에서 피살되었다고 추정된다.

 

이 신부는 남북한 교회소식을 전하고, 옥에 갇힌 동료들을 살피고, 북한 내 세 수도원의 마무리 순간을 이끌었다. 그는 공산 치하 5년 동안의 ‘능욕, 천시, 억압, 무신론의 공격’을 고스란히 견디고 전쟁 중에 순교했다. 공산정권 치하의 상황을 잘 알면서도 이를 벗어날 기회를 거절했다.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고 난 뒤, 동생 이근재 수사가 함께 월남하자고 권했을 때도 그는 양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남았다. 수많은 사제를 배출한 칠울공소와 신암리공소의 역사, 또 신부 집안의 후손들은 분명 남북대화의 징검다리가 될 이춘근 신부의 경험과 신앙을 더 말해 줄 것이다. (도움: 이성근 신부)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3년 가을(Vol. 63), 김정숙 소화 데레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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