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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분도의 숨은 식구, 최명화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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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2-11 ㅣ No.1829

[앞서 걸어간 길] 분도의 숨은 식구, 최명화 베드로 신부

 

 

 

대구대교구청 안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 갔다. 최명화(1924-1975) 신부께 인사하기 위해서였다. 「분도통사」에서 미 군종 신부의 원산 교회의 복구 작업 보고를 보며 한 번은 꼭 다뤄야 할 인물로 꼽아 두었다. “최명화 베드로 차부제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써 주지 않아 유감이다. 그는 훗날 이들과 부산으로 가서(함흥교구 신부로) 사제품을 받고 덕원 출신 수사들을 돌보았다.”

 

최명화 신부는 현재까지 원산 출신의 유일한 신부로서 교회사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는 1937년 덕원 신학교에 입학한 24명 중 한 명으로 이들 중 윤공희 대주교, 김남수 주교, 이종순, 최명화 신부 겨우 네 명이 사제가 될 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는 덕원 수사들 피난 공동체를 돌보았고, 덕원 신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원산 출신의 덕원 신학교 신학생

 

최명화 신부는 1924년 원산에서 3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가톨릭 교우 집안의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두터웠고 책임감이 강했다. 원산 해성보통학교 같은 반 동무와 함께 졸업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미사와 저녁 미사의 복사를 했다. 당시 집에는 시계가 없어서 눈뜨면 바로 성당으로 향했는데, 하루는 성당에 가는 도중에 파출소 순사에게 붙잡혀 검문당하기도 했다. 어린이가 새벽 3시에 나다니는 게 수상히 여길 만했다. 수영도 수준급이었다. 한번은 익사 직전의 여성을 구하러 바다에 뛰어든 적이 있는데, 의식을 잃게 한 뒤 안전하게 백사장까지 끌고 올만큼 침착하고 지혜로웠다. 음악 재능도 뛰어나서 해성학교 시절 피콜로 독주로 인기를 끌었다.

 

1937년 최명화는 해성학교를 졸업(10회)한 뒤 원산본당 주임 탁세영 파비아노(Fabian Damn, 1900-1964) 신부의 권유로 그해 4월 1일, 덕원 신학교에 입학했다. 6학년 때 탁 신부가 신학교에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성소가 있다고 믿었다. 어머니는 해성학교 부교장 오병주 선생의 부인과 막역한 사이로 아이를 낳으면 사돈을 맺자고 했다. 최명화와 오병주 선생의 막내딸 오순희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두 아이는 같은 본당에서 9살에 첫영성체, 이듬해 견진성사를 함께 받았다. 그때까지는 부모들은 막연히 농담 같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순희가 덕원 수도원 사제 서품식에 다녀오는 길에 최명화의 어머니와 마주쳤다. 그때 최명화의 어머나는 “너도 우리 베드로가 신부 되기를 천주님께 기도해다오”라고 부탁했고, 오순희도 그러겠다고 했다. 오순희는 해성학교를 졸업하고 원산본당 성가대원이 되어 최명화 신학생과 그레고리오 성가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다가, 6.25전쟁 발발 직전에 함흥으로 출가했다.

 

최명화의 신학교 시절은 평안한 때가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1941-1945)이 일어나 물자는 부족하고, 신학생도 노역에 차출되었다. 그도 1945년 5월에 징집되었으나, 곧 해방되어 9월 15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산당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공산당은 원산성당과 각종 음악회에서 연주와 성악으로 인기를 누리던 그를 ‘붉은 음악동맹’에 가입시키려고 필사적이었다. 여러 유혹도 있었으나 그는 묵묵히 신학 공부에 열중했다.

 

 

원산본당을 지킨 차부제, 본당 복구에 전념

 

1949년 5월 4일 아침, 총을 멘 군인들이 덕원 신학교를 포함한 덕원 수도원 전체를 완전히 포위했다. 신학생들은 그렇게 일주일을 갇혔다가, 학교가 폐쇄되며 저녁 늦게 쫓겨났다. 공산군의 위협에도 동네 교우들이 이들을 집으로 데려갔다. 최 차부제와 신학생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역에 나갔는데, 표를 팔지 않았다. 마침 그때 최 차부제는 역무실에서 군복무를 함께 한 친구들 발견했다. 표 판매원이었다. 그는 친구에게 떼를 쓴 끝에 80명의 표를 구해 신학생들이 무사히 떠나도록 했다. 이 일을 시작으로, 성직자 없는 지역의 유일한 차부제로서 신자들을 지켰다. 객지에서 방황하던 신학생들을 위해 신자 집을 일일이 찾아다녔고, 신학교 후배들을 격려하며, 신자 가정을 방문하며 비밀리에 세례도 주었다. 그의 뒤에는 항상 정치보위부원이 미행했고, 때로는 보위부에 호출당하기도 했다. 미사는 김봉식 신부 등이 와서 몰래 집전했다. 6.25가 발발하자, 그의 행동은 더욱 제한되었다. 공산당은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보내는데 광분했다. 최 차부제는 교우 집이나 산으로 피신하며 때를 기다렸다.

 

1950년 10월 10일 국군이 원산에 입성했다. 나흘 뒤 존 머피(John Murphy, 1905-1981) 군종 신부가 도착해 마침 성당을 청소하던 최 차부제와 마주쳤다. 그는 네브래스카주 링컨교구 소속인데, 1939년 9월부터 1961년 6월까지 해군 군종신부로 복무했다. 머피 신부와 최 차부제는 파괴된 성당 복구 공사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패트릭 오코너 군종 신부는 “여기 신학생은 둘인데 최명화 베드로 차부제가 그중 하나다. 그는 학업을 끝내고 싶어 한다. 대단히 훌륭한 청년이다. 현재 이곳 신자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머피 신부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다시 모여 수도생활을 하도록 헌신적으로 도왔다. 시약소도 다시 열었고, 부모를 잃고 헤매는 아이들도 모았다. 그는 신자 여부를 따지지 않고 주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했다. 머피 신부는 1950년 10월 말 원산에서 미사를 집전했는데, 1949년 5월 9일 이후 처음 봉헌한 미사였다. 11월에는 원산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세운 함흥교구 최초의 학교인 호수천신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미사가 봉헌되었다. 신부가 매일 미사를 드릴 때면 150여 명의 신자가 복도까지 줄서기도 했다. 그런데 신부들이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려니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한글과 라틴어로 된 제목을 적은 인쇄물을 만들어 고해성사 때 그 번호를 대고 성사를 받게 했다. 그 무렵 덕원 신학교 출신 임화길 신부(함흥교구)와 김성환 신부(연길교구)가 도착했다. 최 차부제는 두 신부를 붙들고 눈물을 터뜨렸다. 임화길 신부는 최 차부제가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도록 서둘렀다. 최명화는 머피 신부의 도움으로 미 해병대 항공편으로 서울로 갔다. 머피 신부는 후일 부산에서도 베네딕도회를 도왔고, 또 그의 부대가 일본으로 이동한 뒤에도 부산 피난 수도자들을 지원했다.

 

 

원산 첫 번째 신부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고

 

서울에 도착한 최명화는 10월 말경 원효로에 있던 성신대학부속중학교로 허창덕(연길교구) 덕원 신학교 선배 신부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절망적이었을 이북교회에서 용케 살아남은 신학생이었지만, 교회법상 최명화가 사제품을 받으려면 소속 교구장의 수품 허가장이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 그가 지닌 상본 한 장이 해결의 열쇠가 되었다. 신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가 최명화의 차부제 수품 기념으로 서명해준 상본이었다. 정규만 학장 신부는 이를 근거로 노기남 주교와 관계 참사관의 허락을 얻어냈다. 최명화는 지금의 제도에는 없는 차부제였으므로 부제품을 받은 다음, 11월 18일 부제반 피정에 합류했다. 먼저 월남한 원산 신자들은 최 부제가 용산 신학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들었고 최 부제 서품식을 준비했다.

 

최명화는 11월 21일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주교 주례로 최익철, 김창문, 이종홍 등 여덟 명의 부제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원산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사제가 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최 신부는 서품식이 끝나고 마당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일일이 첫 강복을 주었다. 그리고 구상 시인을 보자, 미사 중에 공산당에게 납치된 구대준 신부 등 덕원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간절히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군이 다시 진격하면 원산 본당으로 돌아가서 첫 미사를 봉헌할 계획으로 첫 미사를 미뤘다. 하지만 언제 귀향할지 기약조차 할 수 없으니 미사를 봉헌하라는 노기남 주교의 지시에 11월 30일 용산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허창덕 신부 외 네 명의 신부와 20여 명의 신학생, 몇몇 신자가 함께했다. 첫 미사의 기념 촬영을 맡았던 최석우 신부가 마침 이날이 자기 영명 축일이라며 조촐한 축하연을 베풀어줬다. 최 신부는 최석우 신부의 이 호의를 오래도록 기억했다.

 

 

부산 피난 공동체 지도로 시작

 

전세(戰勢)가 크게 달라져 최 신부는 김영근(1918-2002) 차부제를 비롯한 덕원 수도자들과 부산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근 차부제는 최 신부보다 여섯 살이나 위였지만 학년으로는 2년 후배였다. 수도원과 신학교가 해산되자, 김영근은 평양으로, 최명화는 원산으로 헤어져 숨어 살다가 각자 1950년 3월과 10월에 월남했었다.

 

김영근 차부제 일행은 12월 8일 오전 부산 대청동 중앙성당에 도착했다. 피난 내려온 원산 신자들과 오랜만에 만나 기쁨을 나눈 것도 잠시, 이튿날부터 살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수도생활을 새로이 시작해야 했다. 김영근 차부제는 자립 계획을 세워 수사 18명의 생계를 챙겼고 궁핍한 수도자들을 힘닿는 데까지 보살폈다. 이때 최명화 신부는 덕원의 피난 공동체와 함께 기거하면서 고해성사도 주며 고락을 함께했다. 그것은 결정적인 도움이었다. 수사들은 5시 정각에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했으며 아침 식사 후 일터로 나갔다. 그러다가 최 신부가 밀양 성신소신학교의 교사로 초빙받고 1951년 6월 6일 덕원의 수도자들도 대구교구청으로 이사했다. 옥사덕 강제수용소 생활을 거치고, 1956년 한국으로 다시 파견된 탁 파비아노 신부는 최 신부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아꼈다.

 

 

  

김천 황금본당 사목

 

최명화 신부는 대구교구에 입적해 1960년까지 소신학교, 1970년부터 광주 대신학교의 교편을 잡았다. 지인수 에른스트(1907-2000) 신부가 ‘본국 휴가’ 가는 동안 화령본당 임시주임으로 사목했지만(1964-1965), 정식으로 본당 사목을 한 곳은 김천 황금본당이었다(1965-1970). 그의 아버지 신부인 탁 파비아노 신부가 이곳에서 분가해 평화성당을 짓고 사목하다가(1958-1964), 1964년 심장마비로 선종한 후이다. 최 신부가 1965년 김천 황금본당에 부임했을 때, 김영근 신부는 탁 신부의 후임으로 평화본당에 있었다(1964-1968). 두 성당의 거리는 2km로 가까워서 두 신부는 자주 왕래했다. 가끔 기관장이나 신자들 모임에 최 신부는 기타로 반주하고 김 신부는 노래를 부르며 모임을 이끌었다. 최명화 신부는 김천 황금본당 주임으로 있는 동안, 음악을 통한 문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김천 시민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최명화 신부와 원산 교우들은 한가족으로 살았다. 원산본당의 이선옥 아녜스 회장 등은 최 신부를 마치 친자식처럼 여겼다. 피난지에서는 최 신부가 악기를 들고 고향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했다. 또 그를 중심으로 동향인들이 모였다. 오순희는 1957년 서울 청양리본당 주일미사에 갔다가 강론하는 최명화 신부를 만났다. 그들은 함께 탁 파비아노 신부의 회갑을 차리고, 오병주 선생의 묘를 찾았다. 남한 땅에 자리 잡은 왜관 수도원은 그들이 기댈 고향 언덕이었다.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3년 여름(Vol. 62), 김정숙 소화 데레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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