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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부가 밀고 당기며 이룬 평협 손춘수 베드로 · 여협 김성악 안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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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2-11 ㅣ No.1825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부가 밀고 당기며 이룬 평협 손춘수 베드로 · 여협 김성악 안나 회장

 

 

말년의 손춘수·김성악 부부는 빛누리집이 옛집을 정리할 때 거기서 모셔온 성모님을 ‘수호자’로 모시고 자나 깨나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동시설인 빛누리집에 늘 도움의 손길을 전하던 후원자였다. 성모상을 선물로 받아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며, 부부가 성모님 앞에서 까떼나와 묵주기도와 저녁기도를 바쳤다. 사회 생활과 교회 활동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남편도 기도 시간을 지나칠까봐 주의를 기울이며 서로를 지키는 시간을 보냈다.

 

 

옥봉동성당에서 관면혼배

 

김성악은 두 살 때 온 가족이 일본 니가타현으로 이주 하여 살았다. 스무 살이나 터울이 지는 큰오빠가 심한 병을 앓으면 실의에 빠졌을 때 가톨릭을 만나게 되어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집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성당에는 독일 신부가 사목했는데 안나의 집에 드나들면서 친밀하게 지냈다. 세례를 받은 때가 초등 4학년이었다. 독일 신부의 사랑을 받으며 성당에 다니다가 여고 2학년 때 해방을 맞으면서 고향인 진주로 돌아와 옥봉동 신자가 되었다. 다시 진주여고에 다니게 되었고, 성당에서 학생회장을 맡으며 친구들을 전교해서 또래들과 참 재미있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김성악은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1950년 손춘수를 만났다. 사람됨에 끌려 결혼을 결정했으나 정통 유교집안의 배우자를 맞이하자니 난관이 컸다. 쉽게 신자가 되겠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총각은 물론이거니와 시아버지 될 사람까지 본당신부에게 불려 다녔다. 우여곡절 끝에 옥봉동성당에서 관면혼배를 치렀다. 시아버지는 경건한 예식에 감명을 받았고, 며느리와 사돈을 신뢰했다. 손춘수가 먼저 입교하고 시댁 식구들이 하나둘 세례를 받더니 연로한 어른들은 대세를 받을 정도로 온 집안이 신앙을 갖게 되었다. 

 

3월에 결혼한 후 곧 6.25전쟁이 나서 남편 손춘수의 징집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피해 다니던 남편은 결국 둘째 아들을 낳고 누운 아내를 두고 떠나 해군장교로 진해에서 복무했다. 제대 후에는 마산에서 정착했다. 시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한일함섬이 창립되면서, 그리로 자리를 옮겼다. 손춘수는 한일합섬을 발전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교구 바자회를 만들어내다

 

손춘수·김성악 부부는 마산교구에도 크게 기여했다. 김성악은 여성연합회가 창립되어 활동하는 과정에서 남편의 물질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활동할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돈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봉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여성연합회 창립 멤버로 출발하여 5,6,7대 회장을 역임했고 한 차례 물러섰다가 9대 회장도 맡아 여성신자들을 이끄는 저력을 보였다.

 

그러나 김성악은 스스로 자금마련을 하자는 취지로 여성연합회 바자회를 출발시켰다. 1980년 3월, 성소후원회 활동과 불우환자 치료비 돕기를 목표로 교구 전체가 음식을 폭넓게 장만하여 지역의 축제처럼 펼치자고 기획했다. 믿을 수 있는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여 수익금을 만들고, 그 돈을 요긴하게 써 보자고 결의했다. 교구의 뜻이 본당으로 전해지고, 여성연합회 바자회는 튼튼하게 구축되었다.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 이 연중행사를 해마다 기다리는 비신자들도 많았다. 오랫동안 오동동 구 교구청 마당은 바자회 장소로 널리 알려져 이름을 날렸다.

 

김성악 안나는 본당에서도 까리타스, 제대회, 성모회, 여성협의회 회장을 맡아 봉사했다. 교구에서는 에콰도르 선교후원회를 결성하여 지원하는 일이나 성소후원회를 운영하는 일에는 누구보다 앞섰다. 뿐만 아니라 은퇴신부 후원을 위한 아가페회를 조직하여 일일이 찾고 나누는 일에도 솔선수범하며 그의 에너지는 마구 분출되었다. 공동체를 무척이나 아끼며 혼자 일하지 않고 지혜롭게 다른 사람의 호응을 끌어들이고, 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인재를 알아보는 탁월한 리더십을 소유하였다.

 

- 2011년 그라츠사절단 환영

 

 

마산교구를 탄탄하게 하려는

 

손춘수 베드로는 상남동성당에서 사목회장을 맡았고, 월남동성당으로 옮겨서도 사목회장을 역임했다, 마산교구 차원에서는 꾸르실료 주간을 맡아 1988년 10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이끈 다음 임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듬해 1월 평협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렇게 맡은 회장직은 연임하여 4년동안 교구의 구석구석을 챙기고 보듬어야 했다. 회장 재임 중 자매교구인 오스트리아 그라츠교구에도 두 번 방문하여 우리 교구 신학생과 사제를 격려하고, 관계를 결속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 뒤에도 그라츠자매교구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했다. 마산교구에서 개최하는 심포지엄과 자매결연40주년 행사를 위해서도 그라츠사절단을 맞이하고 행사를 지원했다. 어디를 가나 한결같은 지원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말년의 김성악 안나 회장은 “사랑에게서 나서 사랑으로 살다가 끝내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차동엽 신부의 글을 자주 입에 올렸다. 남편 베드로가 옆에 있어 제일 행복하다던 안나는 혈액암으로 투병하던 2013년 1월 17일 81세에 선종했다.

 

일심동체가 되어 손잡고 살다가 홀로 남은 손춘수 회장은 5년을 더 살며 쓸쓸한 시간을 보냈다. 3남 2녀 중, 가까이 사는 둘째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약간의 치매와 노환에다 외로움이 더해졌다.

 

2016년, 막 마산교구장으로 착좌한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는 출신 본당인 월남동성당을 방문했다가 예정에 없던 손춘수 회장을 방문했다. 배주교는 본당에서 부족한 신학생을 보듬으며 신부가 되도록 이끌어준 어른에게, 교구에 헌신적으로 몸바쳐 일했던 어른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르신이 챙겨주셨기에 이렇게 주교가 되어 왔습니다.”라고 예를 갖추었다. 이렇게까지 큰 행복을 안은 손춘수 베드로 회장은 2018년 5월 21일 88세로 선종하여 아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는 주님 곁으로 떠났다.

 

▶ 참고 : <마산교구40년사> <그라츠-섹카우교구와 동행 50년> 마산교구 홈페이지 자료 등

 

[2025년 2월 9일(다해) 연중 제5주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가톨릭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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