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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수호성인 이야기: 생태계 보호하고 재해에서 지켜주는 성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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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성인 이야기] 생태계 보호하고 재해에서 지켜주는 성인들
생태계의 수호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축일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12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포목상은 프랑스를 좋아해서 아들의 이름까지도 ‘프랑스 사람’이란 뜻의 프란치스코라고 지었다. 아버지의 생각만큼이나 현세적이었던 아들은 한때 낭비하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지냈다. 그런 프란치스코가 기사가 되려는 꿈을 안고 20대 초반 나이에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혔다. 옥살이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다시금 예전으로 돌아간 듯하던 프란치스코는 크게 앓고 나서부터 조금씩 변화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여전히 기사가 되려는 꿈을 놓지 못하던 프란치스코는 환시 중에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 하느냐?”라는 메시지를 들었고, 그 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나병 환자와 입을 맞추는 체험을 했다. 그때부터 차츰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시간을 내어 기도하게 되었다. 결국 ‘무너져 가는 성당을 고쳐 세우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아버지 가게의 물건을 내다 팔아서 이를 실행하려던 성인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아버지와 결별하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성인과 11명의 동료들은 철저히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인 ‘작은형제회’, 곧 프란시스코회를 시작했다. 선종하기 3년 전, 성인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자신도 그 고통에 참여하기를 기도하던 중 그분의 다섯 상처를 받았고, 이 은총의 선물로 남은 생애 내내 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태양의 찬가’를 지어 노래하며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했다. 생태적 위기가 점점 심해지는 시기에, 하느님의 창조물을 사랑한 성인은 생태계와 생태계 보존을 위해 애쓰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1979년).
성 메다르도는 5세기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부모는 교육을 위해 아들을 수도원으로 보냈다. 성인은 그곳에서 신학과 성경을 배웠고, 정직하며 사랑이 넘치는 성품에다 경건함과 지식까지 갖춘 성인을 눈여겨본 주교의 권유로 사제품을 받았다. 성인은 설교와 선교에 적극적이었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두 사용할 정도로 자선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왕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과감히 비판하는 용기도 지녔다. 나중에 성인은 자신을 사제직으로 이끈 주교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이웃해 있던 교구의 주교가 선종하자, 그 교구의 사제들과 신자들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어 두 교구의 통합 교구장으로서 봉사했다.
또한 성인은 자신을 주교로 축성한 성 레미지오와 힘을 합쳐 아직 이교도이던 당시 프랑크 왕국의 왕을 개종하도록 이끌었다. 그런 성인이 선종하자, 왕과 왕자들이 그 시신을 장지까지 손수 운구했을 정도로 성인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성인에게는 특별히 날씨와 연관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성인이 어렸을 때 갑자기 비가 쏟아졌는데, 날개를 펼치고 성인의 머리 위를 맴도는 독수리 덕분에 비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인은 비가 오게 하거나 그치게 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또한 성인의 축일에 비가 오면 40일 동안 계속 내렸고, 그러지 않으면 40일 동안 날씨가 맑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전승들과 관련해서, 성인은 날씨, 특별히 악천후에 영향을 받는 일을 하는 이들, 이를테면 농부, 포도주 양조업자, 우산 제작자 등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받는다.
화산 분출의 위험에서 지켜주는 성녀 아가타(축일 2월 5일)
성녀는 체포되어 집정관 앞으로 끌려왔으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바치며 집정관의 제안을 끝내 거절했다. 집정관은 성녀의 믿음과 의지를 꺾기 위해 사창가로 보내기도 했고,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위협과 회유로도 성녀의 굳은 믿음과 결심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고, 결국 집정관은 성녀의 젖가슴을 도려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그런 다음 성녀를 다시 감옥에 가두고는 먹을 음식도, 치료를 위한 약도 주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성녀는 환시 중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도 성 베드로를 만났고, 그로써 상처도 치료되었다. 이에 집정관은 이글거리는 석탄불로 성녀를 익혀서 죽였다고 전해진다.
성녀의 유해는 시칠리섬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성녀의 유해를 매장하고 1년 뒤에 활화산인 에트나산이 또 한 차례 폭발했는데, 성녀의 무덤에서 베일이 나와서 마을 사람들을 위험에서 보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그때부터 성녀는 화산 분출에 따른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는다.
화재의 위험에서 보호하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축일 4월 29일)
무사히 시에나로 돌아온 성녀는 페스트로 황량해진 도시에서 남은 사람들을 돌보았고, 죄수들을 찾아가 보살폈으며, 평화를 선포하고 많은 분쟁을 해결했다. 또한 튀르키예에 맞설 십자군을 모집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프랑스 아비뇽에 가 있던 교황좌가 로마로 돌아오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28세 무렵에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은 성녀는 고행과 희생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진 가운데서도 선종하기 전에 자신의 신비 체험을 기록하여 ‘대화’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으며, 33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스도교의 많은 신비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신비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성녀는 일찍이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교회학자로, 그리고 1999년에는 유럽의 여섯 수호성인 중 한 분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환시 중에 “그때 나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분께서 그분의 거룩하온 사랑의 불길 속에서 그 영혼을 받아들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외친 데 근거해서겠지만, 성녀는 화재의 위험에서 보살피는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는다.
[성모님의 군단, 2024년 8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0 14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