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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의 군종사목2: 전쟁에서 평화를 찾고 돌봄의 문을 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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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11-27 ㅣ No.1774

[한국의 군종사목 · 2] 전쟁에서 평화를 찾고 돌봄의 문을 열다 (2)

 

 

군종교회는 이탈리아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징집된 젊은이들과 동행하기를 원하며, 주교의 지휘하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사제들의 반응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는 1926년 3월 11일에 이탈리아 군종교구를 설정하여, 이 영적인 사도직을 공인하였다. 성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4월 21일, 「군 사목에 관한 교회 헌장」(Sprituali Militum Curea) 반포를 통해, 군종교구가 ‘교회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단계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는 교회’의 단계로 변화하였음을 인정하면서 군종교구를 일반교구와 동일한 체계로 규정지었다.

 

이탈리아 군종 교구장 주세페 마니(Giuseppe Mani) 대주교는 1996년 10월 25일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제대에서 제1차 이탈리아 군종교구 시노드의 개회를 선언하였고, 1999년 5월 6일 성 베드로의 무덤 제대에서 폐막식을 장엄미사로 거행하였다. 이 3년간의 시노드 과정을 통해 신자군인이 군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일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사랑에 의해 변화되도록 자신을 내맡긴 군인은, 보다 약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사랑으로 임하고 있다. 즉, 그들은 군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을 넘어, 군인이면서 성인(聖人)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제 교회가 전쟁에서도 ‘정의와 평화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신자 군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난다. 이 시노드 문헌은 「군종교구」, 「복음 선교」, 「전례」, 「애덕」, 「가정」, 「젊은이」, 「군종 사제」, 「평화」, 총 여덟 개의 문헌으로 되어 있다.

 

한국 천주교 군종교구장 이기헌(베드로) 주교는 이 문헌이 한국에도 소개되어 한국의 군종사제들과 군인 신자들도 단순한 신앙인을 넘어, 벗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는 성인이 되는 이 길로 초대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군종교구의 제1차 시노드 문헌, 「PRIMO SINODO DELLA CHIESA ORDINARIATO MILITARE IN ITALIA」(1999)을 교회법을 전공한 이경상(바오로) 주교에게 추천하고 번역하게 하여 「정의와 평화의 봉사자」1)라는 이름으로 발간했다.

 

대한민국 군종교구 연혁은 군 사목의 태동시대(1951년 이전), 군종신부단 시대(1951-1989), 군종교구 시대(1989년 이후)로 나눌 수 있다.2) 1951년 2월 7일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軍僧課)가 설치된 것을 육군 군종제도 창설로 본다. 1989년 10월 2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대한민국 국군을 관할하는 교황청 직속의 가톨릭 교구가 설정되었고, 공식 명칭은 ‘천주교 한국군종교구(Ordinariatus Militaris Corea)’이다. 현 교구장은 서상범(티토) 주교이다.

 

한국 전쟁이 갑자기 벌어졌을 때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전쟁에 대한 대응 자세와 전시하의 활동계획이 준비 되어있지 않았다. 당시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노기남(바오로) 주교는 1950년 성년(聖年) 행사로 로마에 있어, 의사결정도 공백 상태였다. 전쟁이 시작된 후 피난지역 대구와 부산의 거리는 몰려드는 상이군인과 피난민으로 큰 혼잡을 이루었고, 구국(救國) 결사항쟁(決死抗爭)을 부르짖는 대규모 군중집회는 연일 열렸다.

 

가톨릭 청년결사대의 조직 안건도 정부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을 수 없게 되어 무산되었다.3) 1950년 9월 12일, 30여명의 신학생들이 육군본부를 찾아가 자원 입대하였다. 미군 각 사단에 한국군을 파견한 후 이들의 인사 행정을 담당할 대학생 군인이 필요한 때였다. 이들 신학생들은 1개월 동안의 훈련을 받고, 유엔군 산하 미 제2보병 사단, 제1기갑 사단 등에 카투사(KATUSA,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행정요원으로 배속되었다.4)

 

한국 천주교회는 평화와 일치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인류의 일치는 교회의 과업이요, 인류의 평화는 교회의 이상이다. 분열이 바벨탑에서처럼 죄악의 표지라면, 일치는 성령강림 때처럼 은총의 표지요 축복임을 교회는 믿고 있다.5)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모든 분야에서 국제적 협력을 촉구했고, 이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세계평화의 길이라고 주장했다.6)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평화를 향해 인류의 일치로 나아가는 길은 국제 협력이다. 지상의 길은 유엔이고, 하늘의 길은 바티칸이다.

 

 

생명의 길을 만들어 준 미국 군종 신부들의 영웅적 헌신

 

군종교구 시노드는 목자의 지도 아래, 시작과 끝이 분명한 일정 기간 동안, 기도와 성찰을 반복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 안에, 신자 군인들로 형성된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심화하고, 군종교구 공동체에 대한 주님의 계획을 하느님의 말씀에서 다시 읽고, 그 결과로 신자 군인들이 오늘날의 군 생활 현장에서 어떻게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쇄신 과제를 부여받는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 군대는 민족 간의 평화와 조화, 그리고 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한 도구가 되는 소임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게 된다. 여기서 기억되는 사람들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백인대장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인정받는 순교자 군인들이다.7)

 

 

카파르나움의 백인 대장

 

성서에 기록된 세 명의 로마 육군 백인대장들이 있다. 바로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 예루살렘의 백인대장, 그리고 카이사리아의 백인대장이 그들이다. 로마 시민이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증언한 최초의 군인신자 모범들로서, 성인이 될 수 있는 군인들이다.

 

첫번째 백인대장을 만나기 위해 서기 30년경 팔레스티나 북부, 헤로데 안티파스가 로마스타일로 지배하는 작은 왕국의 성장하는 국경도시 카파르나움으로 가보자. 그곳에 한 백인대장이 지휘하는 주둔군 백인부대가 있다. 그는 야전에서 전투하면서 얻은 경력으로 거의 이백 명의 훈련된 군인을 거느리고 이 도시 카파르나움을 지키고 있다. 예수라는 이름의 예언자로 여겨지는 이가 나타나 갈릴레아 사람들을 데리고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눈먼 이를 보게 하여 새로운 길로 세상을 불지르고 있는 곳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에 열광하는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소요가 걱정되는 곳이다.

 

로마 백인대장이 유대인인 예수에게 다가와서 병든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겸손되이 청하고 있다. 이제 여기서 청원 자체가 곧 전능하신 이의 말씀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회복의 모든 능력이 부여된 말씀, 권위있는 말씀, 표현대로 작용하는 말씀, 말씀하시는 분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말씀이다. 예수를 찾은 카파르나움의 로마군 백인 대장은 예수께, 직접 오셔서 손을 대어 주실 것을 청하지도 않는다. 그것도 직접 찾아와 청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친교를 이루고 있는 유다인의 원로들과 친구들을 통해서 예수의 말씀 선포가 그에게 전해지기만을 원하고 있다.

 

그는 점령지 원로에게 인정받은 백인 대장이며, 백성의 필요에 응답하는 지휘 통솔력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병들어 죽게 된 노예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돌봄의 사람이며, 사랑이 넘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다. 이콘 작가 마리 폴(Marie-Paul)수녀는 예수께서 들어 올린 손에 오른손 방향을 일치시킨 채 왼손은 자신의 가슴에 대고 있는 겸손의 자세로 백인대장을 표현하였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 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6-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의탁하는 겸덕을 갖춘, 로마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 로마 육군 백인대장이다. 예수도 감탄하신 이 백인대장의 믿음을 교회의 안배로 모든 로마 가톨릭 신자는 영성체 때마다 고백하고 있다.

 

 

순교자 군인 에밀 카폰 신부

 

‘전장의 성자’ 에밀 조지프 카폰(Emil Joseph Kapaun, 1916~1951) 미육군 군종신부가 한국 정부에 의해 6·25 전쟁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국가보훈처가 2023년 5월의 6·25 전쟁 영웅으로 선정한 카폰 신부는 한국전쟁 당시 포로로 잡혀 적의 포로수용소에서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전우들을 간호하고 음식과 약을 구해주고, 물을 끓여 나누어 주고, 강제 사상 교육에 저항해 신앙을 지켜주고, 성사를 베풀어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열정적으로 삶에 희망을 갖도록 인류애를 실천했다.

 

 

 

독일과 보헤미아 혈통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주해온 부모를 가진 카폰 신부는 1916년 4월 미국 캔자스주 필센에서 태어났다. 1940년 6월 9일 캔자스주 위치토 소재 성 요한 성당에서 윈켈만 주교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43년 9월 필센 성당 주임 신부가 되었다.

 

고향에서 보헤미아어로 강론하던 친밀함과 익숙함을 떠나,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기 위해, 아무리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해 몸바치겠다고 결심하고 군대에서 일하기를 자원 했다. 윈켈만 주교의 허락을 받아 1944년 군종신부 사목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대위로 진급한 카폰 신부는 1946년 전역 후 정부 장학금으로 워싱턴 D.C. 소재 미국 가톨릭대학에서 공부하여 1948년 2월 역사학 석사 학위를 마쳤다. 학교 교육에서 종교가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는가를 서베이를 통해 실증적으로 알아보려는 깊이 있는 첫 연구였다.9) 카폰 신부는 학문 연구에 몰두할수록 “정말 이상하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났다. 겸손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넓힐 수 있도록 검소해져야 한다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카폰 신부는 비상시에는 군인들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한다고 믿고, 1948년 9월 25일 마크 K. 캐럴 주교에게 다시 군복무 허락을 받아 재입대하여 군종 신부로 돌아갔다. 그는 1950년 1월 23일부터 2월 7일까지 일본 요코하마로 가는 배를 탔다. 6·25 전쟁 발발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7월 16일 미 육군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부대가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한 후 중공군에 고립됐지만 카폰 신부는 탈출 대신 자발적 잔류를 선택, 부상자를 수습하다 그해 11월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카폰 신부는 수용소에서도 미군, 유엔군, 한국군, 중공군, 인민군을 가리지 않았다.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 신자 모두에게 봉사하였다.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음식을 나누는 등 전우들을 위해 신앙과 인류애를 실천했다. 하지만 수감 6개월 21일 만인 1951년 5월 23일 부상과 추위, 그리고 질병에 시달리다 선종했다. 미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2013년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우리 정부는 2021년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카폰 신부는 모두에게 봉사자(servitium)였다.

 

그분의 철모가 마당 한가운데서 나뒹굴고 있어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직도 앞쪽에는 하얀 십자 표시가 선명했습니다. “내가 모자를 쓰고 다니면 중공군 비위만 거슬릴 것입니다. 그러나 저렇게 쓰레기 더미 위에 굴러다니면 모두가 저것을 볼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을 그들에게 기억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쓰레기를 향하여 얼마나 많은 기도가 올려질지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스며들어 오고 계십니다.”10)

 

로마 교황청 시성성은 1993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하느님의 종’(servus Dei)으로 선포한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을 결정하는 재판 절차를 2012년 개시하였다. 2015년 위치토 교구장 칼 캠(Carl A. Kemme) 주교는 1,066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생애, 사제직, 덕행, 성덕에 관한 보고서 심문요항(posito)을 로마 시성부 위원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 추기경에게 제출하였다. 시성부와 교황의 보고서 채택으로 가경자(Venerabilis) 칭호를 얻게 되면 기적심사가 생략되는 순교사실이 인정되어 다음 단계인 시복 시성 절차가 빨라진다. 2016년 역사자문위원회(consultor historicus)도 이에 동의하였다. 2022년 1월 하느님의 종 에밀 카폰 신부 시복 시성 주교 대표단 존 호츠 신부(Reverend John Hotze, J.C.L.)는 바티칸이 카폰 신부를 가톨릭 신앙의 순교자로 인정할 것을 고려 중이라고 발표했다. (계속)

 

……………………………………………………………………………………

 

1) 「정의와 평화의 봉사자」 Volunteers of Justice and Peace, 2009,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 천주교 군종교구사(군 사목 50년사), 2002.

3) 한국 가톨릭 군종신부단, 「타자본 한국 가톨릭 군종사」,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4) 지학순, 『내가 겪은 공산주의』, 1976.

5) 네델란드 주교회의, 박종수 옮김, 『가톨릭신앙입문, 화란 새교리서』 초판 1971, 수정판 2024, 성서와함께, p649-650.

6) <사목헌장> 83-90항 참조.

7) 『정의와 평화의 봉사자』, 교황님과의 만남, p286-291.

8) 『정의와 평화의 봉사자』, p254-255.

9) 아더 톤, 정진석 옮김, 『 종군 신부 카폰 』, 초판 1956, 개정3판 2021, 가톨릭출판사, p109.

10) 『종군 신부 카폰 』, 「제13장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 p216-217

 

[교회와 역사, 2024년 10월호, 글 정진호 프란치스코(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경쟁력평가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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