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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2: 민족화해와 일치라는 패러다임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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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11-27 ㅣ No.1773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 · 2] ‘민족화해와 일치’라는 패러다임의 전환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간행에 앞서, 민족화해위원회(이하 민화위) 역대 위원장 및 위원 등을 모시고 민화위 설립 배경부터 방북 및 대북지원 과정, 앞으로 나아갈 발전 방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물인 이 구술채록문은 민화위 30년사에 수록될 예정이고, 그 일부를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 구술자 : 최창무(안드레아) 대주교/광주대주교

• 면담자 : 조한건(프란치스코)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 일  시 : 2024년 6월 24일(수) 오후2시

• 장  소 : 담양 예수 마음의 집

 

 

 

조한건 신부 : 민족화해위원회(이하 민화위)가 처음 설립될 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창무 대주교 : 이름이 생긴 것으로 따지자면 민화위의 설립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주교회의에서는 늘 북한선교라는 것을 과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6.25로 남북을 합쳐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잖습니까? 교회의 사명은 이 땅의 복음화니까, 북한도 복음화를 해야겠다 해서 처음에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북한선교위원회가 조직 되면서 주로 이북의 평양교구, 함흥교구, 원산교구, 길림교구 지역 출신 신자들, 이산가족 신자들을 중심으로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동호 아빠스가 위원회 책임자로 오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시대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북이 남북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1990년 초에는 유엔에 남북이 동시에 가입되었습니다. 우리도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지요. 당시에는 통일을 많이들 이야기했는데, 주교회의에서는 민족의 화해라는 복음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6.25 전쟁의 기억이 아니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정했습니다. 그 뒤로 뭔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1994년도에 제가 서울교구 보좌주교로 발령받게 됩니다. 당시에 사회사목 주교 대리라는 직책이 새로 생겼는데, 노동사목, 빈민사목, 사회교정사목, 정의평화위원회, 사회복지사목,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총괄해서 교회의 대사회 사목 전략을 책임지는 자리였습니다. 제가 교구장 대리로 그 자리에 취임하게 된 거지요.

 

1995년 초에 가톨릭 신문 이윤자 기자가 김수환 추기경과 신년 특집 인터뷰(연두교서)를 하면서 광복 50년, 분단 50년에 교회가 이 분단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질문해서 추기경이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회사목 주교 대리니까, 교구장님이 말씀하신 분단 50년의 극복이라는 사목 지향을 따라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해서 2월에 사회 사목 담당 사제들과 사람들을 모아서 엠티 형식의 모임을 했어요. 모임하면서 교구장님의 연두교서 내용대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조직을 서울교구 안에 만들자는 안이 나왔고, 구체적인 활동은 기도 운동, 사랑의 나눔, 이북의 실상을 제대로 알기 위한 교육 이렇게 세 가지가 중요하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결국 북한선교라는 이름에서 민족화해로 바뀐 것은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지요.

 

그때는 적십자를 통해 남북 교류가 있었는데, 이북에서 팩스로 김수환 추기경님을 여러 차례 오시라고 초대를 했어요. 서울대교구장인 김 추기경이 1975년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니까. 여러 가지로 여건이 준비가 안 됐을 때라 제가 방북을 준비해야 하나 하고 방북위원회 조직의 필요성을 따져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이 초대의 팩스를 저희가 받았거든요. 그래서 이에 대한 답변도 다시 팩스로 보내고 하면서 이북과의 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이북과의 종교적 교류는 바티칸에서는 1986년과 1988년도에 장익 주교님, 그리고 정의철 신부가 방북한 적도 있지요. 그때 교황님이 보낸 선물을 가지고 가기도 했었고요. 그리고 이때쯤에는 이북에서도 평양교구 장충성당 중심으로 연고가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을 만들어서 우리도 천주교 신자가 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하고 국제사회에 알리는 노력을 해서,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진 거죠.

 

이런 상황에서 팩스가 왔다갔다 하니까, 그러면 이제 이북과의 교류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건을 조성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우선 할 수 있는 것으로 기도 운동을 하자, 이북의 동의를 얻어서 장충성당에서도 하자. 그러면 무엇으로 기도를 할 것인가의 결정이 남습니다. 협의 끝에 매주 화요일 명동성당과 장충성당에서 함께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하자 해서 남북의 기도 운동이 시작했어요. 기도 운동의 하이라이트는 미사니까요. 3월 2일에 첫 미사를 지내자, 결정 해놓고, 추기경님께 첫 미사 주례를 부탁드리면서 ‘연두교서에서 말씀하신, 해방 50년 분단 50년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인 한 걸음을 나아가는 겁니다’라고 했지요. 그날 추기경님 강론이 참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다음 나눔 운동으로 당시 이북이 큰 수해를 당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한마음한몸에 모금된 것을 적십자나 홍콩 까리따스를 통해서 민족화해위원회 이름으로 보내면서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당시에 민화위는 뭐 별도의 활동 자금이나 모금된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냥 위원회 조직만 있었을 뿐이지요. 제가 사회사목 주교 대리로 한마음한몸 책임자기도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또 한마음한몸에 당시 행정 책임자로 오태순 신부가 있었는데 개인적인 연고와 교류가 있었습니다. 이런 관계가 활동을 함께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민화위가 처음에 이렇게 시작하게 됐기 때문에, 새로운 조직의 창립이라기보다는 개명이라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와 북한선교에서 시작해서 이북과의 교류를 위해 노력해온 것이 시대에 따라 화해와 일치가 더 적합한 표현인 것으로 해석하고, 이름이 바뀌니까 하는 일의 성격도 조금씩 달라지고 하는 연속선상의 흐름이 있었던 거지요. 누가 계획해서 새롭게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 자리를 통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한건 신부 : 방금 말씀에도 언급하시긴 하셨습니다만, 민화위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한마음한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단체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최창무 대주교 : 제가 이미 교구장님한테 위임을 받아서 한마음한몸을 하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민화위에 뭐 따로 활동 자금도 없었고. 모금을 하려고 해도 이미 한마음한몸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계좌번호만 새로 하나 만들면 되지 않겠어요? 전화번호는 해방일인 0815로 해가지고, 그게 아마 지금도 민족화해위원회 번호일 거예요. 그러면서 한마음한몸 직원들이 민화위 일을 같이하는 거지요. 오태순 신부랑 의논했더니 직원을 모집하라 하는데, 나는 관리는 못 하겠다 해서, 한마음한몸이 실질적으로 운영을 위탁 받아서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모금 계좌를 설정하고 이제 본격 모금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홍보가 중요하니까. 그때 잔치국수라는 표제를 정했어요. ‘사랑의 국수 나누기 운동’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는 것일 뿐 천주교의 활동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심부름을 하는 것이고, 종교를 초월한다 해서 당시에 호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민간 단체의 모금 운동에 대해 국가가 통제하는 것이 많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참여가 아주 적극적이라 이러한 모금 운동이 들불 퍼지듯이 확산됐습니다.

 

또, 한편으로 제가 사회사목 주교 대리로서 추기경님이 기존에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종교인연합회 같은 범종교계 조직에 천주교 대표로 참여를 하게 됐어요. 그때 경실련 총무도 하고 하던 서경석 목사가 적극적으로 뭘 같이 해보자 그래서, 따로따로 하면서 같이 할 것은 같이 하자 하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발족하게 됐습니다. 이 단체에 불교계에서도 송월주 스님같이 오래 활동하시던 분들도 합류하고 해서 하나의 새로운 운동 분야가 또 개척된 셈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화위의 대북 지원 나눔 운동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조직해 놓고 나서 강냉이죽 현장 체험이라고 해서 VIP들을 모시고 63빌딩에서 모금 참여하고 강냉이죽 한 그릇씩 드시고 했는데, 그날 모금액이 꽤 많이 모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존 조직을 활용했기 때문에 한마음한몸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사무일은 한마음한몸이 하면서 모금 계좌, 말하자면 예산만 구별하는 거죠. 마치 KTX하고 SRT하고 선로를 공유하듯이. (웃음) 새롭게 시작하는 어떤 조직을 꾸리려면 비용이 많이 드는데 우리는 비용은 최대한 절감해서 최소한으로 하고 사용을 늘리자 이런 취지로. 그래서 필요한 직원을 추가로 뽑을 때도 한마음한몸 소속으로 해서 직원 관리까지 한마음한몸에서 하고, 일은 민화위 일을 하고 이런 식으로 했지요. 두 조직 다 책임자가 나니까 그게 수월했었죠.

 

세 번째로 ‘민족화해학교’를 개설했습니다. 냉전 체제하에서는 일방적 선전에 급급하니 우리는 실상을 알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극좌나 극우를 피하고 중도적인 전문 연사들을 초빙하여 강의를 듣게 하였습니다.

 

조한건 신부 : 민화위의 조직 운영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기록에 보면 통일사목위원회가 따로 있다가 1998년에 민화위에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인지요?

 

최창무 대주교 :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통일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도 통일사목이라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통일이 금방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통일 후에 이북 교회를 어떻게 복원할 것이냐 하는 맥락에서 통일사목위 조직이 만들어졌다가 민화위와 통합해서 효율적인 운동을 하는 게 좋지 않겠나 하게 된 겁니다.

 

1998년도에는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이북 방문도 가능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 전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팩스를 교환하고 어디서 만날 것인가 의논하다가, 당시 미국에 있는 교포들은 이북을 좀 더 자유롭게 드나들었거든요. 그래서 당시 뉴어크(Newark) 지역에서 교포 사목을 하면서 북한을 위한 후원회나 나눔 활동을 하던 박창득 신부가 제 동기동창이라 어디서 만나는 게 좋겠냐고 물었더니 포트 리(Fort Lee)를 추천해줘요. 그렇게 해서 이북 신자들과의 첫 만남인 뉴욕 세미나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직후에 북한에서 잠수함을 6척이나 보내고 하면서1) 남북 관계가 나빠졌어요. 민화위 활동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그것 보라고, 무슨 대화냐 헛일 하지 말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니까 해야한다. 전쟁은 절대 안 된다. 전쟁을 하면 공멸한다 하고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소통하고 중국에서도 두 번 만나고 해서 관계를 맺어가다가 드디어 네 번째 만남이 이북에서 이루어진 그 시기지요. 그리고 그 과정 중에도 대북지원 사업을 통한 교류와 협력은 계속 있었고요. 그런 시점에서 통합이란, 운동의 효율을 위해 같은 정신을 가진 단체를 통폐합 하는 그런 과정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한건 신부 : 그러면 이제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 그리고 이름을 바꿔서 민족화해위원회가 됐을 때 서울교구 민화위와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당시 사무실이 이웃하고 있었다는 말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최창무 대주교 : 제 기억과는 다릅니다.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는 위원장이 이동호 아빠스라 장충동 분도회관에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서울교구와 주교회의는 다릅니다. 그럼 저는 서울교구 대표로서 주교회의에 참석한 거고요. 북한선교위가 있을 때 활동의 분위기가, 북한만을 대상으로 할 것이냐, 소위 남남 갈등 즉 동서 갈등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민족의 화해라는 것이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민족을 초월한 화해의 사도들이 되는 건데, 화해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하는 방향이었습니다. 민족화해라는 작명이 괜찮으니까 주교회의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름이 바뀐 거지요.

(중략)

조한건 신부 : 그렇다면 서울교구 민화위만의 독자적인 대북지원 사업은 없었을까요?

 

최창무 대주교 : 한마음한몸을 빌려서 했지요. 모금은 민화위에서도 하고, 민족화해미사 헌금도 모이고, 한마음한몸으로도 모금하고 한 것이 모두 서울교구의 이름으로 진행됐습니다. 처음에는 이북에 직접 지원할 수가 없어서 주로 홍콩 까리따스를 통해서 했습니다. 통일부에 신고는 하고 진행했었지요. 그러다가 번거롭게 홍콩을 통하지 말자 이북에서도 이에 대한 동의가 되어서 우리가 직접 서로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정치적인 분위기도 반영되었습니다.2) 이렇게 대북지원사업은 정치적 영향력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지금같이 이렇게 경색된 상태도 오는 거지요.

 

조한건 신부 : 네, 아무래도 대북지원 사업에 한국 정부와의 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텐데요, 그 당시에 한국 정부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혹은 정부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최창무 대주교 : 강인덕 통일부 장관이 이북 출신이었나 그런데, 서로 안면이 있었고 해서 좀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이런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 보고하고. 정부가 못하는 것을 우리가 하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동시에 정부의 하는 일에 대한 최대한의 협력입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것이고 통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반쯤 농담 삼아서 반공교육을 시키지 말고 북한 실정을 있는 그대로 좀 알 수 있게 해달라, 혹시 물들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국민들을 믿으라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우리가 이북 사람들 만나려고 외국 가려면 사흘인가 일주일인가 특별 반공교육을 받았어야 했거든요. 그거 안 했으면 좋겠다 다 민주주의에 대해 교육받은 성숙한 사람들인데 괜히 시간 낭비, 경비 낭비다 했는데 그런 대화가 통했어요.

 

이후로도 방북을 하게 되면 통일부에 가기 전에도 보고 하고 만난 뒤에도 보고서 만들고, 우리가 아는 정보 교환도 하고 그랬습니다. 교황청 대사에게도 활동 보고를 하고. 교회의 힘은 그런 개방성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누가 통일부 장관이 되든지 통일부 장관이라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견이 있더라도 만남은 있어야 하니까, 저는 기꺼이 만났어요.

(후략)

 

최창무 대주교님은 민화위가 처음 설립됐을 때부터, 여러 기관 단체와의 교류 협력을 통해 하나의 조직으로 자리잡을 때까지 심혈을 기울이시며 활발한 활약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사회적으로도 ‘북한선교’ 혹은 ‘통일’이 ‘민족 화해와 일치’라는 개념으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방향성이 열리게 된 점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화해위원회가 내년에 설립 30주년을 맞게 되는데요. 오늘 들려주신 말씀들이 저희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만들고 있는 『민화위 30년사』 집필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것으로 최창무 대주교님의 구술채록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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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6년 9월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의미한다.

2) 1998년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 정책 기조가 바뀐 것을 의미. 

 

[교회와 역사, 2024년 10월호, 구술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광주대교구) 정리 김가흔(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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