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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영성심리: 익힘의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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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심리 칼럼] 익힘의 정도
얼마 전 많은 인기를 끌었던 요리 경연 대회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심사자로 나왔던 분이 하신 말 가운데 유명해진 말이 있죠.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채소의 익힘 정도인 것 같아요.” 이후로, 음식을 먹을 때뿐만 아니라 다른 상황에도 “익힘의 정도가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됩니다. 웃고 즐길 수 있는 유행어이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덜 익힌 것도 ‘익힌’ 것이지요. 너무 익힌 것도 ‘익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익혔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얼마큼 익혔느냐 하는 구체적인 ‘정도’입니다.
영성신학을 공부할 때 하느님과 우리 삶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을 성찰하는 내용이 매우 새로웠었는데, 이후에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는 새로움을 넘어서 놀라웠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영성신학이 알려주는 방향을 걸어갈 수 있게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심리학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2023년 2월 19일자 주보 참조).
영성 생활은 저 높은 곳에 있는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우리 삶의 매 순간에 만나는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방향성의 문제이고 식별과 실천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모두 “네, 신앙이 있습니다.”라고 답하실 겁니다. “‘나 중심’의 방향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너 중심’의 방향을 따라 살고 싶으십니까?”라고 여쭌다면, 아마도 대부분 “그렇다.”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대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나의 삶에서 몇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의 행복, 성공, 건강, 재물, 가족, 인간관계 등 다른 가치들에 밀려 저 뒷자리에 자리하고 있다면요? ‘너 중심’의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그리로 향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셀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너 중심’보다 ‘나 중심’을 더 많이 선택하고 있다면요?
영성 생활은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그렇다.’ ‘아니다.’로 뭉뚱그려서 막연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알아차리고 무엇을 식별하고 실천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성찰과 식별의 대상, 재료가 우리의 복잡다단한 마음(심리)들이고, 그 결과로 만들어 내는 음식(요리)들이 바로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실천들이겠지요.
구체적인 ‘익힘의 정도’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익혔느냐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지금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가장 좋은 ‘정도만큼’ 익어서 각자가 지닌 고유한 맛과 아름다움을 한껏 뿜어내기를 바라고 계실 따름입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2024년 11월 24일(나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서울주보 7면, 민범식 안토니오 신부(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 0 2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