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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2: 전통 혼례식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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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2) 전통 혼례식 (상) 사모관대 혼례복 입은 신랑, 흰말 타고 말없이 신부집으로 초행
- 노르베르트 베버, ‘신랑의 초행’, 1925년 함경남도 내평,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5년 갓 결혼한 신혼부부 혼례식 연출
선교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우리의 전통 혼례를 촬영했다. 그는 먼저 1911년 5월 21일 안중근(토마스) 의사 일가가 살고 있던 황해도 청계동성당을 방문해 그 집안의 혼례식에 초대받아 촬영했다. 그리고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성당을 방문해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사례비를 주고 혼례식을 연출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의 전통 혼례식을 볼 수 있어 매우 들떴다. 그는 혼례식에 가면 손가락은 젓가락질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고, 연필은 피곤하도록 바삐 움직일 것이며, 카메라에 담아야 할 흥미진진한 일들이 풍성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우리의 전통 혼례는 의혼·납채·연길·납폐·초행·전안·교배·합근·신방·신행·현구고례·묘현·근친 순으로 절차가 복잡했다. 혼례의 첫 절차인 의혼(議婚)은 말 그대로 중매자가 신부 집으로 찾아가 혼담을 나누는 과정이다. 중매자는 신부 집안의 의중과 조건을 알아 신랑 집에 알린다. 의혼 과정에선 혼인 당사자의 나이, 동성동본 여부, 집안 사정과 가풍, 지병 등을 주로 확인했다. 양가가 혼담 내용에 만족하면 청혼서와 사주단자·허혼서를 주고받는다. 이를 납채(納采)라 한다. 그리고 길일을 택하는 연길단자(涓吉單子)도 전한다.
이렇게 혼약이 이뤄지면 신랑 쪽 함진아비가 신부 집안으로 혼수와 혼서지(婚書紙)를 전하며 “함 팝니다”라며 납폐(納幣)를 한다. 이어 신랑은 혼례복을 입고 함진아비와 함께 신부집으로 초행(初行) 걸음을 한다. 신부집에 들어간 신랑은 맨 먼저 신부 부모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전안례(奠雁禮)를 한다. 이를 위해 신부집에서는 미리 대문 안 적당한 곳에 전안청(奠雁廳)을 차려놓는다. 멍석을 깔고 두른 병풍 앞에 작은 상을 놓고 상 위에 붉은 보자기를 덮어놓는다. 신랑은 기러기를 전안상에 놓고 큰 절을 두 번 한다. 신부 어머니는 신랑이 절하는 사이에 기러기를 치마로 받아들고 신부가 있는 안방에 던진다. 이때 기러기가 누우면 첫 딸을, 일어서면 첫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이어 신랑과 신부가 선 채 서로 맞절을 하고(交拜, 교배), 술잔을 주고받으며 혼인 서약(合巹, 합근)을 하며 혼례를 마친다. 혼례를 마친 신랑과 신부는 신방(新房)을 차려 첫날밤을 치른 후 앞으로 한평생을 살아갈 시댁으로 길을 나선다.(新行, 신행) 시집에 간 신부는 처음 뵙는 시부모께 폐백을 드리고(見舅姑禮, 현구고례), 3일간 시댁 사당에 가서 묘현례(廟見禮)를 한다. 묘현을 마친 신부는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 부모를 뵈러 간다.(覲親, 근친)
- 노르베르트 베버, ‘묵주를 든 신부와 신부 들러리’, 1925년, 황해도 청계동,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묵주를 든 신부와 신부 들러리’ 이색적
조선 「경국대전」은 혼인 적령기를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로 정하고, 의혼은 13세에 한다고 규정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신부가 어릴수록 혼인 지참금이 낮아진다며 13세 처녀는 평균 150원, 19세는 300원 정도를 요구한다고 적어 놓았다. 그는 신자들도 이교적 요소만 없다면 민족 고유의 풍습을 고수한다며, 신자끼리 혼인할 때는 점쟁이가 낄 여지가 별로 없고 외형적 의례로 그치지 않고 교회의 축복도 받고 싶어한다고 밝혔다.
사진 ‘신랑의 초행’은 1925년 내평성당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신랑의 초행길에는 신랑집을 대표하는 혼주와 친척들, 함진아비, 마부와 가마꾼, 하인 등이 동행했다. “오늘은 신랑이 주인이다. 아무도 그가 가는 길을 막아서면 안 된다. 관리들도 옆으로 비켜서서 신랑 일행이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어여 한다. 바야흐로 젊은 남자가 세상으로 나가는 첫걸음인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44쪽)
- 노르베르트 베버, ‘치장하는 신부와 구경꾼’, 1925년, 황해도 청계동,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모관대를 한 혼례복을 입은 신랑이 흰말을 타고 신부집에 도착했다. 초행길에 오른 신랑이 말을 하면 복이 달아난다고 해 신부집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신랑의 초행’ 사진에 담긴 주인공도 입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묵주를 든 신부와 신부 들러리’ 역시 좀처럼 보기 드문 사진이다. 신부로 추정되는 왼쪽 여성은 쪽머리를 하고 가슴을 웃도는 짧은 삼회장저고리에 흰색 허리말기가 달린 치마를 둘렀다. 들러리로 소개된 오른쪽 여성은 일본 메이지 시대 말기에 유행했던 히사시가미(ひさしがみ) 머리 모양을 하고 쓰개용 장옷을 입었으며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무늬를 새긴 운혜(雲鞋)를 신고 있다. 1930년대에 쓰개치마와 장옷은 폐기됐으나 1950년대까지 남쪽 지방에서는 서민 혼례복으로 사용됐다. 장옷을 입은 여인은 들러리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아마도 신부의 어머니가 아닐까 한다.
‘신부 치장’은 툇마루에서 치장하고 예복을 차려입는 신부의 모습을 담았다. 어린 신부가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신부 곁에 몰려든 어린 소녀들과 여인들이 곱게 단장하는 신부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예쁘다”고 한마디씩 거든다.
- 노르베르트 베버, ‘전안례’, 1925년, 황해도 청계동,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부부간 신뢰 상징하는 기러기 놓고 큰절
드디어 혼례가 시작됐다.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전안례를 위한 전안청이 차려졌다. ‘전안례’ 사진 속 흰 도포를 입고 중절모를 쓴 이가 예식 절차를 적은 홀기를 읽는 노인이다. 신랑이 전안상 위에 기러기를 놓고 큰절을 하고 있다. 병풍 너머로 노인들과 장정들이 짓궂게 웃고 있고, 그 양옆에선 어린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기러기는 부부간의 신뢰를 상징한다. 진짜 기러기를 못 구했을 때는 나무로 만든 가짜 기러기를 쓰기도 한다. ⋯하객들은 온갖 우스갯소리로 어떻게든 신랑 신부를 웃기려 드는데, 짐짓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점잔만 빼고 있다. ⋯사람들은 신랑 신부를 웃겨 보겠다고 신랑 다리 사이에 작대기를 끼워 넣는 등 별 얄궂은 짓을 다 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45~447쪽)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0월 20일, 리길재 선임기자] 0 1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