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온화함의 대명사 제2대 교구장 장병화 요셉 주교 |
---|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온화함의 대명사 제2대 교구장 장병화 요셉 주교
표어 “사랑으로 봉사하자”를 앞세워
1968년 5월에 초대 김수환 스테파노 교구장이 서울대교구로 떠나고, 신생 마산교구는 최재선 요한 부산교구장이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이후 4개월이 지난 1968년 9월 7일 교황청으로부터 부산교구 부주교로 있던 장병화 요셉 몬시뇰을 제2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하는 소식이 도착했다. 장병화 요셉 몬시뇰은 그해 10월 7일 바티칸 성베드로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고, 10월 30일 성지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황대사 로똘리 대주교 집전으로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장병화 주교는 “사랑으로 봉사하자”란 표어를 사목 지침으로 삼아 어린 교구를 깊은 신심과 온화한 성품으로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그라츠교구와의 자매결연 체결
어버이의 마음으로 어린 교구를 돌봐야 한 장병화 주교는 가난한 교구 살림살이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번민의 나날을 보낸 끝에 대구대교구의 자문을 얻어 자매결연이라는 방향을 잡게 되었다. 대구대교구에는 일찌감치 오스트리아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으며, 잘츠부르크교구와 자매결연도 이루고 있었다. 거기다 김수환 스테파노 신부가 독일 유학 중 오스트리아 부인회와 교류가 있은 터라 대구에는 유럽의 후원 물결이 많이 일렁이고 있었다.
장병화 주교는 그라츠교구를 소개받아 자매결연을 요청하게 된다. 그라츠는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이고 가톨릭문화가 깊이 스민 아름다운 곳이다. 1971년 9월 당시 교구 설정 750여 년이 된 그라츠교구와 다섯 살 마산교구가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장병화 주교의 기쁨은 어디에도 비유할 수 없을 만큼 컸고, 마산교구로서는 큰 행운이 되었다. 특히 마산교구 신학생들이 그라츠교구 신학교로 유학하여 선진 문화와 학문을 연마할 수 있었다.
가톨릭 문화원 건립을 위해
우리 교구는 설정 후에도 행정적인 모든 기능과 선교활동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마산시로부터 여러 난관을 극복하며 오동동 소재 부지를 매입하고 1972년 5월에 문화원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건립이 있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은인은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였다. 그라츠교구와 자매결연한 직후였고, 가톨릭 부인회에서도 마산교구를 내방하고 실태를 파악하였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4년 5월에 드디어 가톨릭 문화원이 완공되었고, 10월에 거행된 축복식에는 교황대사 도세나 루이지를 비롯하여 그라츠교구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다. 비로소 이곳에 교구의 모든 행정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교구청이 입주하여 교구사목의 거점이 되었다.
장병화 주교는 이후에도 그라츠교구와의 유대를 통해 가톨릭여성회관, 양덕동성당, 가톨릭사회교육회관 등의 건축으로 교구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 몰두했다.
마산교구의 성장을 위해
잰걸음, 간절한 마음으로 교구를 키우느라 노심초사한 장병화 주교는 1976년 10월 교구 설정 10주년 경축대회를 감동 속에서 개최하고 천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렸다. 초대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그라츠교구장 요한 베버 주교도 참석하여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마산교구가 일어서서, 걷게 되었고, 뛰기 시작했다.
1987년 1월에는 우리 교구에 세 분의 몬시뇰이 탄생했다. 장병화 주교가 보낸 청원에 따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정하권 플로리아노, 정삼규 요한, 김두호 알로이시오 신부를 몬시뇰에 임명했다. 마침 2월에 설립된 구암동성당의 규모가 컸으므로 이곳에서 5월에 몬시뇰 수임미사를 성대히 거행했다.
장병화 주교는 1988년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이하게 되어, 4월에 성지여자중고등학교 강당에서 경축행사가 열렸다. 교황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하여 각 교구 주교들이 참석하여 일편단심 사제 생활에 바친 삶을 아낌없이 치하했다. 교구장 재임 20여 년 동안 초창기 본당 수보다 2배가 넘는 44개 본당에, 신자 수도 3배가 넘는 8만 7천여 명으로 확장되었다. 성지학원을 설립하여 지역사회의 육영사업에 이바지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성모공경심이 강해 묵주기도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는 모범을 보였으며, 오직 ‘사랑’으로 신자들이나 지역민을 대면하여 존경을 받았다.
장병화 요셉 주교 선종
마산교구의 영적 아버지로 우리를 주님께로 이끌었던 장병화 요셉 주교는 1989년 2월 교구장에서 은퇴했다. 성지여고 뒤뜰에 있는 사제관에서 지내오던 중 지병인 폐렴이 악화되어 1990년 8월 3일 78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영결미사는 각 교구 주교와 교구 전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경남도지사를 비롯한 여러 기관장들과 많은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8월 6일 성지여고에서 열렸다.
장병화 주교는 1912년 7월 부친 장윤이 안드레아와 모친 지 데레사의 장남으로 대구에서 태어나 성유스티노신학교 중등과에 입학했고 1938년 6월 대구 성유스티노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문산, 진영, 대구 계산, 충무성당에서 사목했다. 성유스티노대신학교 교수로 2년 재직하고 대구 남산동성당에서도 사목했다. 그 후 1949년 대구대교구 경리부장을 맡았다가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유학한 후 1956년 진해, 부산 중앙동성당에서 사목했다. 1960년 부산교구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1963년 몬시뇰로 임명되었다. 마산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착좌하여 20여 년간 마산교구의 정신적 지주로 신자들을 이끌었던 장병화 요셉 주교는 고성 이화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2024년 8월 11일(나해) 연중 제19주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가톨릭문인회)] 0 1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