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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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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된 가난’
예수님이 참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첫 번째로 든 덕목은 ‘가난’이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이 가난의 의미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예를 드시며 ‘현실을 단순히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것’(찬미받으소서 11항)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것’이 극대화된 것을 교황께서는 ‘추출주의’(extractivism)라고 꼬집으십니다.
인류가 역사 안에서 얻게 된 모든 재화는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것입니다.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자원이 인류의 생존과 번영의 재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존과 번영의 바탕이 된 ‘추출’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인류가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특별히 산업혁명 이후에 에너지를 얻기 위한 인류의 노력(화석연료의 사용)은 ‘기후위기’라는 재앙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기후위기’라는 재앙은 우리 인류의 생존과 번영의 방식을 새롭게 되돌아 보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2023년 11월 30일부터 12월 13일까지 UAE 두바이에서 2주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제28차 당사국 총회(COP)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당사국 총회는 파리 협정(2015년) 목표 달성이 어려운 것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또한 화석연료로부터의 에너지 전환에 대해 더욱 활발히 논의할 것을 약속하는 자리였습니다.
파리협정을 통해 국제사회가 약속한 온실가스 배출 절감에 대한 인류의 노력이 미흡했다는 평가는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 인류는 온실가스 배출 절감 노력의 미흡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조용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하거나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류는 우리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하여 응분의 대가를 자연현상을 통해 치를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상황입니다.
다가오고 있는 재앙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도 둔감합니다. ‘성장’과 ‘번영’이라는 논리에 젖어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재앙은 그저 새롭고 신기한 ‘뉴스거리’처럼 느껴지는 듯합니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 73장에서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疏而不失)’-하늘의 법망은 넓고 커서 엉성한데도 놓치는 것이 없다- 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악에 대한 경계의 말이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기후위기 시대에 새롭게 해석해 보자면, 인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0년 9월 16일 수요 일반알현에서 스페인 속담을 인용하시며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시고, 우리는 가끔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영성의 결핍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 첫 번째로 요청되는 생태 영성은 ‘참된 가난’의 영성이라 하겠습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처럼 ‘참된 가난’은 사람과 자연을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참된 가난’이라는 영성이 ‘성장과 번영’이라는 굴레가 가져올 확실한 미래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줄 인류의 빛일 것입니다. [2024년 2월 25일(나해) 사순 제2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영운동 본당 주임 겸 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2) ‘동일한 관심을 통한 일치’
인간과 세상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늘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만들어지고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 들어서 죽는 순간까지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변화될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치셨습니다(1코린 15,52-53).
세상도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 이 세상에 나타난 시대를 거쳐서 자연에 순응해 살았던 원시적인 삶의 양식을 지나 이제는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어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우주를 탐사하는 세월이 되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나름의 사회질서를 만들어 삶을 함께 영위했던 시대를 원시시대라고 한다면, 원시시대에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였습니다. 인간의 주변 환경인 자연이 너무나도 광대했기에 인간은 자연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인구와 더 많은 인간의 욕구를 해결해 가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서, 인간은 자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2020년 12월 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지의 발표에 따르면, 인간이 만들어 낸 인공물 총량이 자연물을 넘어섰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플라스틱, 콘크리트 건물, 금속, 도로 등 인공물 총량은 약 1조 1000억 톤으로, 총 질량이 1조 톤인 자연이 만들어 낸 모든 생물의 총질량을 넘어섰다고 평가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인공물은 자연물의 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100년 사이 인류는 자연물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인공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2040년이 되면 인공물은 약 3조 톤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학자들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지칭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인류는 지구 전체 생명체들 입장에서 보면 0.01%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0.01%의 인류가 지구 전체 생태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류가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한다면 결국 인류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경험하고 있습니다. 생태적 회심은 들리지 않는 자연의 아우성이자 목소리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엄정한 현실입니다.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께서는 특히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지구를 해친 것을 회개할 필요를 언급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생태적 피해를 일으키면” 우리가 “크든 작든 피조물의 변형과 파괴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요청받기 때문입니다. 총대주교님께서는 강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이를 되풀이하여 말씀하시며 우리가 피조물에게 저지른 죄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찬미받으소서」 8항)
총대주교님께서는 우리가 소비 대신 희생을, 탐욕 대신 관용을, 낭비 대신 나눔의 정신을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주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 금욕주의로 실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는 사랑의 방법, 점차로 내가 바라는 것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세상에 필요한 것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는 공포와 욕망과 충동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찬미받으소서」 9항)
우리는 이 기후위기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동일한 관심”을 갖고 일치할 것을 자연현상을 통해 요구받고 있습니다. “동일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일치를 이루는 토대이자 영성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멸종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공통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인류의 성장이자 살아남을 길일 것입니다. 이 ‘동일한 관심’을 통한 일치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요청되는 기후 위기 시대의 영성일 것입니다. [2024년 3월 24일(나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영운동 본당 주임 겸 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3) ‘신앙의 확신’ - 빛, 지혜
2024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기후위기 소송이 각 나라 별로 진행 중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 소송이 제기된 것은 2000여 건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2024년 4월 23일에 헌법재판소에서 기후 위기 소송에 대한 공개 변론이 진행됩니다. 국내 기후소송은 4건입니다. 청소년 기후소송, 시민 기후소송, 아기 기후소송, 제1차 탄기본(탄소중립기본계획) 헌법소원 등 4가지 안건을 합하여 공개변론을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기후 위기에 관한 소송이기에 귀추가 주목됩니다. 또 심심치 않게 각 나라의 기후 위기 소송 결과에 대해서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문제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기후문제는 곧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미래가 시간적으로 더 많고 소중한 아기들과 청소년들에게 기후문제는 자신들이 처할 미래이기에 더 절박한 사안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른들의 책임 있는 대책을 요구하는 소송들이라 여겨집니다. 판결을 맡으신 헌법재판관님의 현명하고 균형감각 있는 판결이 있기를 고대해 봅니다.
기후위기 문제는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곧 생태위기 문제와 직결됩니다. 생태 위기는 복합적이고 그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해결책이 현실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에서만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63항).
생태위기 문제는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어느 한 분야의 학문이나 지혜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이 문제를 우리 교회는 사회교리에서 담당할 문제입니다. 사회교리는 이 문제의 도전 앞에서 더 풍요롭게 발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신앙적 확신’입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돌보도록 촉구한다고 볼 때, 그리스도인들도 “특히 피조물 안에서의 자기의 책임은 물론 자연과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의무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15항)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우리의 확신에서 나오는 생태론적 의무를 더 잘 깨닫는 것은 인류와 세상 전체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찬미받으소서」 64항).
성경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니......좋았다’(창세기 1장)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시니 좋으신 조화의 파괴를 ‘불화(부조화)’, 곧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불화는 피조물 중의 하나인 인류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데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죄는 언제나 파괴적인 힘으로 드러납니다. 이 파괴적인 힘은 자신의 한계와 본분을 잊은 인류에게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성경은 인류의 본분을 ‘돌보고’ ‘가꾸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분은 세상의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정교한 균형’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정교한 균형’을 헤아리며 존중하는 것이 아마도 지혜이자 빛일 것입니다.
이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류는 ‘정교한 균형’을 이루는 길이 무엇인지 함께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유용성 앞에서 희생된 수많은 생명체들에게 인류가 진 빚이 무엇이며 인류가 이들을 보전하고 함께 하는 길이 무엇인지 깊이 되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신앙의 확신’은 돌보고 가꾸어야 할 우리의 본분을 상기시킵니다. 이 신앙의 확신이 ‘형제애’와 ‘정의’와 ‘다른 이에 대한 충실함’으로 꽃피워지고 드러날 것입니다. ‘신앙의 확신’은 모든 피조물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2024년 4월 28일(나해) 부활 제5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영운동 본당 주임 겸 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4) “모든 피조물들이 전하는 메시지”
시편 8편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장엄하고도 소박하게 찬미하고 있습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8,4-7).
하느님의 능력과 업적을 찬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을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찾고 감사하는 찬양의 시편입니다.
시편 8편의 찬미의 정신을 이어가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쓰신 소중한 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리교육」 6항). 이 책의 “글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조물들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조물들과 생명체들이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계시의 책이기에 우리 인간에게는 ‘경탄과 경외의 끊임없는 원천’임을 말씀하십니다(「찬미 받으소서」 85항).
‘경탄과 경외의 끊임 없는 원천’인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약 1500만 종 이상의 생물들로 가득합니다. 이 중에서 과학자들이 꼽은 ‘지구 상에 꼭 있어야 할 5가지 생물 종’이 있습니다. 영장류, 박쥐, 벌, 균류, 플랑크톤입니다. 영장류는 숲에서 과일 등을 따먹고 배설해 열대 및 아열대 우림의 존속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영장류가 없으면 지구의 허파인 숲을 보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학자들은 이 영장류를 ‘숲속의 정원사’라고 부릅니다. 지구상에 1100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쥐는 생물들의 수분(受粉)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해충을 잡아먹어 ‘천연 살충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박쥐가 없다면 인류의 식량 중 30%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2만여 종이 있는 벌은 기후변화 등으로 개체 수가 80% 가량 줄었다고 합니다. 벌의 활동이 없다면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야채도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벌은 인류 식량 생산의 ‘중요한 매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150만 종에 달하는 균류(Fungi)는 거의 멸종의 염려가 없습니다. 이 균류들이 없다면 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균류들은 이 세상에 살아 있던 모든 생명체를 분해해서 처음으로 되돌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균류들을 ‘자연의 청소부’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바다에 있는 약 5만여 종의 플랑크톤들은 수십억 해양 생물들의 먹이가 되며, 바다 표면 근처에 서식하는 식물성 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통해 지구상의 산소 절반을 생산해 냈습니다. 바다 속의 이 플랑크톤 덕분에 우리는 생선을 먹을 수도, 숨을 쉬며 살아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1500만종 들의 삶의 향연 속에서 우리 인류도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이 수많은 생명들과 피조물들이 없다면 우리도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질세계 천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무한한 자애를 체험하고 경탄할 수 있는 것입니다(「찬미 받으소서」 84항).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의 ‘경탄과 경외의 끊임 없는 원천’입니다. 이 피조물들이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로마 8,22). 이들의 탄식과 진통은 인류에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의 초대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쓰신 소중한 책들인 피조물들의 소리를 알아들으며 살아가는 인류는 하느님 사랑과 희망 안에서 기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24년 6월 2일(나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5) “보편적 친교-제헌의 힘”
「찬미 받으소서」 89항
이 세상의 피조물들에게 주인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지혜 11, 26). 그래서 우리는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보편 가정, 곧 숭고한 공동체를 이루어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며 겸손한 존중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긴밀하게 결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토양의 사막화를 마치 우리 몸이 병든 것처럼 느끼고 동식물의 멸종을 우리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낍니다.”(「복음의 기쁨」, 215항)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의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늘의 별이며 산이며 강이며 나무며 짐승이며 둘레의 인간 세계며 할 것 없이 인식으로써 파악해서 자기의 내심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하거나 내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저항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쉬워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환경을 마음대로 조성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과 그리움, 서러움과 사랑, 고요와 흥분이 서로 엇갈리면서 물결치듯 기나갑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힘’은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음을 깨닫고 그 존재를 섬기며 헌신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위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고 받들며 “하느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하느님을 섬기며 헌신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간 영혼의 심오한 능력을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님은 “제헌의 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이 “제헌의 힘”은 보편적 친교를 향한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제헌의 힘”은 바로 인간의 가장 깊은 데에 하느님께로 제헌이 올라가는 고요하고 맑은 샘터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이 “제헌의 힘”에 의지해서 살아갈 때 참행복에 이를 수 있고 보편적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반도 109년 기후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약 100년 전 여름은 6월 11일에 시작되어 9월 16일에 끝났지만, 최근 10년에는 5월 25일에 시작되어 9월 28일까지 여름이 지속되는 현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여름의 길이가 98일에서 127일로 약 한 달이 늘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2021년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은 약 13일 빨라졌고, 서울의 개화시기는 17일 빨라진 3월 24일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자연적 원인과 인위적 원인이 있습니다. 자연적 원인으로는 기후시스템과의 상호작용, 태양의 흑점 수 변화 및 화산활동에 의한 태양에너지의 변화, 지구 공전궤도의 변화 등이 있습니다. 인위적 요인으로는 화석연료의 남용에 따른 화석연료 배출, 에어로졸의 효과, 토지피복의 변화, 산림파괴 등이 있습니다. 이 인위적 원인에 의한 기후변화는 인류의 편리와 번영을 위해 필요한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리와 번영을 위한 노력이 거꾸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면 우리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새롭게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의 내면에 있는 “제헌의 힘”을 통해 살아갈 때 “보편적 친교”를 이루어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보편적 친교”는 이 기후위기 시대에 뉴노멀이 되어야 할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온유, 연민, 배려의 마음이 없다면 자연의 다른 피조물과도 깊은 친교를 올바로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제헌의 힘”은 바로 이 보편적 친교를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1) 「거룩한 표징」PP72-73, 로마노 과르디니, 분도출판사, 1976. [2024년 6월 30일(나해)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6) “예수님의 눈길”
예수님께서는 피조물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사셨기에 다른 이들이 놀라워하였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 27) 그분께서는 세상과 떨어져 사는 금욕주의자의 모습을 하지도 않으시고 삶의 즐거운 면을 적대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다!’하고 말한다”(마태 11,19 참조). 예수님께서는 육신과 물질과 세상 현실을 경멸하는 사상들과는 매우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불건전한 이원론은 역사를 통하여 일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쳐 복음마저 왜곡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사용하는 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물질들을 날마다 다루시며 장인의 기술을 발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일, 전혀 경탄할 것도 없는 단순한 일로 보내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마르 6, 3)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만드시어 우리가 성숙하는 데에 노동이 특별한 가치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 참아 냄으로써, 인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협력하고 있다”(「찬미받으소서」 98항).
예수님의 눈길은 언제나 하느님 뜻의 완성에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최근(2023년 3월 23일) 서울대교구는 조선천주교회 초대 대목구장이신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님과 김수환 추기경님(1922-2009)과 한국 순교복자 가족 수도회 창립자이신 무아 방유룡 신부님(1900-1986)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무아 방유룡 신부님은 ‘삶의 길’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렇게 묵상하셨습니다.
“천주는 만선만복이시니, 이것이 인생의 천생유산이로다. 인생은 낙관이요, 비관이 아니로다. 천지만물의 주인이니, 제 길을 가고 제구실을 한다면, 저 세상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낙천이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내실 적에, 뜻하신 바 있었으니, 하느님의 뜻이 사람의 길이요, 천생사명(天生使命)이로다. 하느님의 뜻이 양심이요, 양심은 천명(天命)이로다. 하느님의 뜻이 십계요, 십계는 길을 조종하는도다. 하느님의 뜻이 정심수신(正心修身)이요, 이는 종교요, 수원(修院, 수도원)이로다. 하느님의 뜻이 신비요, 신비는 수도(修道)의 길이로다. 신비로 성인되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죽지 않고 살아, 만유에 군림하는도다. 이것을 이성이 외치나니, 하느님은 계시도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내신 하느님이 계시도다. 양심이 외치나니, 상선벌악이 천명이로다. 지성도 외치나니, 만선만복이 선자의 상속이로다. 자유도 외치나니, 선택이 천직이로다. 천직이 선택이면, 어이 선 대신에 악을 고르느뇨? 선에서 선으로 가서, 지선에 이름이 천직이 아니뇨! 불을 뿜는 지옥이 소리치기를, 악을 사르는 불이로다. 침묵하는 영혼이 경고하되, 하자없이 살지어다. 황금 순간을 뜻없이 지내고, 후일을 뉘우칠까 하노라. 천당에선 빛이 와서, 마음문을 흔들고, 천신들이 날개치며 외치되, 여기가 천당 가는 길이로다”(「영혼의 빛」 95쪽,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님 영적어록집).
예수님의 눈길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눈길은 언제나 성숙을 지향합니다. 성숙은 하느님의 뜻이자 인간행복의 길입니다. 성숙은 이 세상과 사람들을 사욕추구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충만으로 이끌어 주는 신비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감탄하시던 들판의 바로 그 꽃들과 새들은 이제 그분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2024년 7월 28일(나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7) “참된 인본주의와 기도”
「찬미 받으소서」 112항.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야를 넓힐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기술을 제한하고 그 방향을 바꾸어 기술이 다른 형태의 발전, 곧 좀 더 건전하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이며 온전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지배적인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일이 실제로 가끔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군소 생산자들이 오염을 줄이는 생산 방식을 채택하여 소비 지상주의를 지양하는 삶과 여유와 공동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기술이 다른 사람들의 구체적 문제 해결을 우선 목표로 삼아, 그들이 더 존엄하게 덜 고통받으며 살아가도록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이를 바라보려는 의지가 모든 대상을 객관화하려는 힘을 극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아름다움과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는 일종의 구원이 됩니다. 새로운 종합을 요청하는 참된 인본주의는 마치 닫힌 문의 아래 틈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안개처럼 알게 모르게 기술 문화 한가운데 자리잡는 듯합니다. 모든 어려움에도 참된 인본주의가 올곧은 이들의 굳센 저항처럼 싹트는 영원한 약속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인본주의’는 모든 것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을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것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공허함을 달래 줄 대체재가 점차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은 대체재를 생각 없이 사용하는 데서는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잠시 멈추어 ‘삶의 깊이를 되찾는 일’은 아마도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요청되는 일일 것입니다.
20세기 가톨릭의 신학자 중 한 분인 독일의 칼 라너(1904년-1984년) 신부님은 1924년 월간지인 ‘등대’를 통하여 ‘왜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가?’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너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땅의 것들에 매달리게 된다. 땅의 것들처럼 작아지고 그것처럼 좁아지고, 그것에 짓눌려 결국 그것에게 팔려 버리고 말지니, 이는 우리가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게 마냥 내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를 작고 좁게 만드는 일상에서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래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주님이신 그분께 가 닿을 수 있다. 하느님을 가까이 하는 자를 하느님은 가까이 하신다. 그러나 그분이 피조물에게 자기 자신을 전달하시고, 사랑으로 피조물을 감싸 안으셔서 영광을 받으실 때, 바로 그때 그분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기 현실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신다. 초라한 존재의 허무함으로 가득 찬, 십자가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알량한 자존심과 편협한 자기 중독으로 가득 찬 존재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이 기뻐하시는 때가 되면 그 영혼에 빛을 비춰 주신다. 그러면 영혼은 강력한 희망으로 가득 찬 마음, 결코 그치지 않는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 드넓고 헌신적이고 순결한 마음, 그렇게 신실한 마음을 원하게 된다”(칼 라너, 「기도」, 12-13쪽).
기후위기 시대 인류에게 요청되는 또 다른 영성은 ‘참된 인본주의’일 것입니다. 모든 것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게 될 때 우리는 또 다른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도는 목적과 의미에 대한 되새김질을 하는 통로이자 도구일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 더욱 깊이를 더해주고 참된 인본주의를 가능하게 할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2024년 8월 25일(나해) 연중 제21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8) “상대주의와 사랑”
『찬미 받으소서』 123항
상대주의 문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단순한 대상으로만 취급하여 강제노동을 시키거나 빚을 명분으로 노예로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 질병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아동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이익에 보탬이 안 되는 노인을 유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이 경제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내적 논리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러한 힘이 사회와 자연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저마다의 욕망과 즉각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 외에 객관적 진리나 확고한 원칙이 없다면, 인신매매, 조직범죄, 마약 매매, 아프리카 분쟁 지역의 불법 다이아몬드 매매, 멸종 위기 동물 가죽의 매매를 어떻게 제한하겠습니까? 가난한 이들의 장기를 팔거나 실험에 이용하려고 구매하고, 부모의 바람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이를 ‘버리는’ 것도 이러한 상대적 논리와 같지 않겠습니까? 이는 ‘쓰고 버리는’ 논리와 같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실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하려는 무절제한 욕망 때문에 쓰레기가 양산됩니다. 그러므로 환경에 해로운 행위를 방지하는 데에 정치적인 조치나 법의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문화가 부패하고 객관적 진리와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더 이상 인정되지 않을 때, 법은 자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거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여러 문헌들을 통해 누누이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에서 나오는 실천적 상대주의가 교리적 상대주의 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면 당장에 눈앞의 유익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게 되어 나머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나에게 즉각적인 유익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상대주의가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것은 이상할 일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패한 일들의 내면에는 언제나 이 실천적 상대주의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적 상대주의에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가치가 빠져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가 사라진 곳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워질 뿐입니다.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이신 연제식 신부님이 2024년 여름에 펴내신 ‘꿈’이라는 작품집이 있습니다. 연신부님은 ‘사랑법’이라는 편에서 올바른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묵상하셨습니다.
“사랑은 올바른 계산이다. 오늘 계산에는 맞는 것 같은데 내일 계산해 보니 틀렸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오늘 맞는 것 같은데 한 달 후에 계산해 보니 틀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지금은 맞는 것 같은데 10년 후에 틀릴 수 있다면 그것도 틀린 것이다. 지금 계산한 것이 죽을 때 계산해도 맞다면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니까 지금 계산해서 행동한 것이 죽을 때 생각해도 맞는 계산법이라면 그것이 바로 사랑하며 사는 올바른 방법이다. 사랑은 최소 에너지로 사는 것이다. 즉 힘들지 않게 사는게 사랑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달다’고 하셨다. 내가 최소 에너지로 살면 내 주변이 힘들지 않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지 않게 한다. 세상 사는 게 힘들지 않을 수야 없다. 인생 공부가 다 고통을 견디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고통을 이긴다. 고통도 이기고 죽음도 이기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 말씀은 최소 에너지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장 쉽고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과 자연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살면서 쓰레기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몸에 쌓인 쓰레기가 병이 된다면, 마음과 영혼에 쌓인 쓰레기는 죄가 됩니다. 사랑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의 길입니다. 쓰레기가 없어야 가볍고 밝게 살아갈 수있습니다. 상대주의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쓰레기를 만드는 죽음의 길이라면, 복음이 가르쳐 주는 사랑의 길은 세상을 치유하고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생명의 가벼운 길일 것입니다. [2024년 10월 27일(나해) 연중 제30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9) “고용보호의 필요성”
『찬미 받으소서』 129항.
지속적인 고용 보장을 위해서는 생산의 다각화와 기업의 창의력을 고무하는 경제의 증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마련해 주는 다양한 소규모 식량 생산 체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땅과 물을 적게 사용하고 쓰레기도 적게 배출합니다. 이는 소규모 경작지, 과수원, 농원, 사냥, 야생 작물 채취, 지역적 어업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규모의 경제는, 특히 농업 분야에서 영세농들이 결국 자기 땅을 팔거나 전통적 생산 방식을 포기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영세농들이 다른 다양한 생산 방식을 개발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지역 시장과 세계 시장의 접근이 어렵고 판매와 운송의 기반시설이 대기업에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정 당국은 군소 생산업자들과 그들이 생산하는 품종의 다양성을 투명하고 확실하게 지원하는 조치를 취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참다운 혜택을 누리게 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고용 기회가 계속 축소되고 있는데, 단지 경제적 자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에 명예롭지 못한 모순된 주장입니다. 기업활동은 부를 창출하고 모든 이를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고귀한 소명입니다. 기업이 일자리 창출을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필수 요소로 여긴다면 그 활동 지역의 풍요로운 번영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2022년 영국 가디언지 9월호에 실린 글1)을 보면, 현재 영국 젊은이들의 절반 이상이 “인류의 멸망”을 믿고 있다고 전합니다. 75%의 젊은이들은 “미래가 두렵다”라고 답하고 있고, 그래서 41%의 젊은이들은 자녀출산을 꺼린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에 화답하듯이 2022년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설문조사한 기사2)를 보면, 20대 젊은 여성들의 33.5%는 “기후위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않아야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32.4%는 ‘기후 우울증 혹은 분노를 느낀다’고 응답했습니다. 영국과 한국 젊은이들이 답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젊은이들은 단지 기후위기만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70% 이상의 젊은이들은 기후위기에 따른 주거와 부동산 문제, 일자리와 고용의 문제를 가장 큰 고민거리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젊은이들의 고민들은 기우일까요? 그리고 그들만의 문제일까요?
130여 년 전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년)라는 회칙을 통해 산업화된 세계 안에서의 인권의 보호와 증진에 대해서 가르치고 외치셨습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기후위기 시대에 인류의 생존과 안녕을 위한 가르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 두 회칙의 공통점은 모두 인류의 안전과 참된 번영과 지속가능한 세상을 고민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을 배제하거나 무시한 채, 어떠한 인간의 활동도 지속적일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자연 안에 존재하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성숙을 도모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공동선을 증진하는데 협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용 보호의 필요성’은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윤추구라는 기업의 가치에 밀려 고용보호가 간과된다면 우리는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모든 사람의 노동을 보호하는 우선적 정책과 판단은 기후위기로 우울해질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위로의 난로가 될 것입니다.
1) Caroline Hickman, The Guardian, 2022/9/10 2) <대한민국 위기 보고서>, 2022년 1월, 시사IN.
[2024년 11월 24일(나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0) 통합생태론 - 1. 환경, 경제, 사회의 생태론
『찬미 받으소서』 138-142항.
생태론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과 그 유기체가 성장하는 환경의 관계를 연구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사회의 삶과 존속의 조건에 대한 성찰과 논의가 따르게 됩니다. 또한 발전, 생산, 소비의 모형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솔직함이 있어야 합니다......(중략). 지구의 물리학적, 화학적, 생물학적 구성 요소들이 서로 관련되듯이, 생물종들도 우리가 결코 그 전체를 알고 이해할 수 없을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유전 정보를 여러 생명체들과 공유합니다. 따라서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지식은 현실에 대한 폭넓은 전망에 연결되지 않으면 일종의 무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이라고 말할 때 이는 자연과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가 이루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합니다. 어떤 지역이 오염된 이유를 알아내려면 사회의 기능, 경제, 형태, 유형, 현실 이해방식에 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중략) 반드시 자연계 자체의 상호 작용과 더불어 자연계와 사회체계의 상호 작용을 고려하며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위기와 사회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입니다. 그 해결책을 위한 전략에는 빈곤퇴치와 소외된 이들의 존엄 회복과 동시에 자연 보호를 위한 통합적 접근이 요구됩니다......(중략) 한편으로, 경제 성장은 생산 과정의 단순화와 비용절감을 위한 자동화와 규격화를 추구합니다. 이 때문에 현실을 더 포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경제 생태론”이 필요합니다. 환경보호는 사실 “발전 과정의 핵심 요소 이어서 별도로 다룰 수 없습니다.”1) 그런데 이와 동시에 우리는 경제학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인본주의가 절실히 필요합니다.....(중략) 생태계들의 상호 작용과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 간의 상호 작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복음의 기쁨』, 237항)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입증됩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2016년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1)
“기후 변화는 현실이며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종 전체가 맞고 있는 가장 시급한 위험이며,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오염의 주범들이나 거대 기업을 옹호하지 말고, 인류 전체를 위해, 세계 각지의 토착민들을 위해, 기후변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수많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탐욕의 정치에 의해 발언조차 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세계 지도자들을 지지해야 합니다. 이 행성은 우리에게 당연하게 주어진게 아닙니다. 저는 오늘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탐욕의 정치에 의해 발언조차 하는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세계 지도자’들 중의 한 분이 아마도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이실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교황께서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듯이 환경파괴의 문제는 우리가 어디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문제입니다. 이 환경파괴의 문제는 동시에 지속 가능한 우리 생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환경파괴는 우리 인간 사회가 건전한 인본주의에 바탕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건전한 인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고 존중하는 태도도 포함해야 합니다. 건전한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는 아마도 ‘생명중심’의 새로운 질서일 것입니다. 생명중심의 경제질서는 새로운 사회 생태론의 모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환경, 경제, 사회의 새로운 생태론은 ‘인간중심’(Anthropocentrism)의 생태론이 아닌 ‘생명중심’(Biocentrism)의 생태론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간중심의 세계에서 생명중심의 세계로 변화해 나가고 있는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1) 국제 연합,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 선언’(Rio Declarat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1992.6.14., 제4원칙.
[2024년 12월 22일(다해) 대림 제4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0 92 0 |